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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8.13. 연중19주일/평화통일기도주일

Christ Rescuing Peter from Drowning (1370), Lorenzo Veneziano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19주일이자 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 세상의 두려움과 공포와 혼돈을 이기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심을 배웁니다. 그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용기를 내고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또한 오늘은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올해로 우리 민족은 광복 72주년을 맞이합니다. 1988년 이래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조선그리스도교련맹(KCF)은 8월 15일 직전주일을 한반도 평화통일 남북공동기도주일로 지키기로 합의하고, 당일 예배에서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남북이 함께 작성한 공동기도문을 사용해 줄 것을 요청한 바 있습니다. 오늘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순서에서는 이 공동기도문을 바칩니다.

아울러 지난 목요일 별세하신 서용준(베네딕트) 교우의 조모이신 故 유정자님의 안식을 위하여 기도하고, 슬픔을 당한 유가족의 마음을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에게 힘을 주시어 어떤 처지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인생의 풍파 속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깨달아, 모든 시련을 이기게 하시고 마침내 영원한 평화에 이르게 하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막힌 담을 허시어 하나가 되게 하시나이다. 구하오니, 갈라져 고통당하는 이 겨레를 불쌍히 여기시어, 사랑과 이해로 전쟁과 대립의 상처를 극복하고 평화 통일을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37:1-4,12-28
  • 시편 – 105:1-7,16-22,45
  • 독서 – 로마 10:5-15
  • 복음서 – 마태 14:22-33

1독서 《창세기》는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가는 고난의 이야기입니다. 아시다시피 연중 11주일이래로 지금까지 <전례독서> 1독서로 낭독한 《창세기》는 ‘아브라함 가문(家門) 시리즈’입니다. 특히 연중 15주일부터 시작된 ‘야곱의 생애’(生涯)는 흥미진진합니다. 태교와 출생, 성장과 도피, 처가생활과 아내들, 속임수와 고생으로 얽힌 생활 등. 인간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해 약속을 성취해 가시는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보아왔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그의 아들들, 특히 이집트로 팔려가는 ‘요셉이야기’입니다. 앞으로 펼쳐질 요셉의 이야기를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할 지 《시편》으로 노래한 <105편>이 잘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가장 사랑받는 아들로 자라납니다. 하지만 형제들에게 시기, 질투, 미움을 받아 이집트로 팔려갑니다. 이 장면 속에서 형제처럼 여기던 ‘가리옷 사람 유다’에게 팔리시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요셉은 이집트의 2인자에 오릅니다. 그를 통해 우리 삶을 주관하시고 비극마저도 선용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이전 이야기들보다 훨씬 복잡한 방식이지만, 어떻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구원계획’(후손과 가나안 땅)을 성취해 가시는지가 잘 드러납니다. 이를 통해 세상살이와 우리 삶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 속에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묵상할수록 깊은 통찰로 이끄는 흥미진진한 시리즈입니다.

영화 중에도 성공한 시리즈물이 있습니다. ‘스타워즈’(Star Wars) 나 ‘인디아나 존스’ (Indiana Johnes)가 그런 영화입니다. 인디아나 존스는 B급 배우였던 ‘해리슨 포드’(Harrison Ford)를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만든 작품입니다. 세 번째 시리즈 제목은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Indiana Jones and the Last Crusade 1989년)입니다. 이 영화를 군복무시절 휴가 나와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최후만찬’ 때 사용한 ‘성배’(Holy Grail, 성작)를 둘러싼 액션 어드벤쳐 영화의 영원한 전설입니다.

‘인디’(인디아나 존스의 애칭)는 ‘성배를’ 찾아 나섭니다. ‘성배’는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상징하고 나아가 우리 안의 ‘신성’(최고의 가치)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액션 어드벤쳐 형식을 빌린 ‘영성’ 추구 영화라는 것이 제 해석입니다.

영화 속 ‘특정 장면’이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복음이야기의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서던 그 절정의 순간과 잇닿아 있습니다. 자세히 설교에 인용하기 위해 한 번 더 찾아보았습니다. 영화를 보다가 문득 오늘 <전례독서>에 공통소재로 클로즈업 되는 ‘발’을 발견합니다.

1독서 《창세기》는 형제로부터 버림당하는 요셉의 ‘절규하는 발’입니다. 《시편》은 차꼬에 채여 종으로 팔려가는 요셉의 ‘비참한 발’입니다. 《로마서》는 ‘기쁜 소식’(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아름다운 발’입니다. 복음이야기는 베드로가 내딛는 ‘믿음의 발’입니다. 이 ‘발’이 종국에는 누구에게로 인도하는 상징인지는 여러분도 생각하면서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오늘 설교와 관련한 영화클립을 보겠습니다.

‘인디’는 천신만고 끝에 ‘성배’가 안치된 곳으로 알려진 요르단 페트라 사원에 도착합니다. 그를 추적해 온 나치 장교는 성배를 빨리 찾게 하려는 의도로 인디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에게 총상을 입힙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그는 서둘러야 합니다. ‘성배’에 물을 담아 마시면 ‘불로불사’하고, ‘성배’에 담긴 물을 바르면 모든 병이 ‘치유’된다는 전설 때문입니다. 마지막 장면에 그 증거가 나옵니다.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가(이것이 영화제목이 되었습니다) ‘불로불사’하게 된 노인 기사(騎士)가 등장합니다. 그는 ‘성배’가 안치된 성전을 지키다 자신처럼 모든 ‘관문’을 통과해 들어온 인디를 자상하게 맞이합니다.

감독(시나리오 작가)은 인디가 ‘성배’(예수님, 신성)를 마주하기까지 3개의 관문을 통과하도록 설정했습니다. 각각의 관문을 통해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합니다. 다시 말해 각각의 관문은 감독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우리와 나누고자하는 설정입니다. 한번쯤 이 영화를 보면서 믿음에 대해 사유해 보기를 추천합니다.

인디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오랜 꿈(가치)을 위해 ‘계단’을 오릅니다. 계단은 베델에서의 야곱의 층계(술람, 사다리)처럼,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하늘 사다리’를 상징합니다. 그의 손에는 수첩모양의 고대 ‘안내서’ 한권이 들려져 있습니다. 성배가 안치된 비밀의 장소로 안내하는 그림과 암호문이 적혀 있습니다. 이 고대의 안내서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을 상징합니다.

계단을 오르면서 그는 안내서를 펼칩니다. 안내서에 나오는 첫 암호문은 “하느님의 숨결, 회개하는 자만이 통과하리라. 회개하는 자는 주님께 복종하리라”입니다. 이 암호문을 계속 읊조리며 첫 관문의 계단을 오릅니다.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이 너무 쉽게 문제가 풀리면 재미가 없지요. 인디는 그 암호문의 뜻을 깨치기 위해 끙끙댑니다.

마침내 “회개하는 자는 주님께 ‘복종’하여 무릎을 꿇습니다.”라고 뜻을 깨칩니다. 급히 ‘엎드림’으로써 뻣뻣이 서 있는 자의 목을 날려버리는 ‘죽음의 칼날’을 간신히 피합니다. 첫 관문을 통과합니다. 이 장면을 통해 감독은 ‘믿음이란 회개가 따르는 복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두 번째 관문 앞에 섭니다. 두 번째 관문은 바닥에 새겨진 알파벳을 밟고 건너가는 시험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밟아야 할지 모른다는 겁니다. 주어진 암호문은 “하느님의 말씀, 그 뒤를 따르는 자만이 나아가리라”입니다. 그가 찾아낸 해석은 하느님의 이름, 즉 “야훼(영어로는 JEHOVA, 개역성경은 여호와)”입니다. 중세에는 영어가 아니라 라틴어가 공용어였습니다. 따라서 ‘야훼’의 ‘라틴어 표기’ 알파벳을 밟고 건너면 됩니다. 처음에는 영어 발음식으로 ‘J’를 밟았다가 빠져 죽을 뻔 했습니다. 스스로를 ‘바보’라고 자책합니다. 고전 라틴어에는 ‘J’가 없고 ‘I’로 표기했기 때문입니다. 가령 라틴어 IESUS(이에수스, 예수)가 영어 JESUS(지져스)로 표기되듯이 말입니다. 그는 고고학 교수답게 라틴어로 IEHOVA를 밟고 통과합니다. 이 장면을 통해 감독은 ‘믿음’이란, 오직 ‘하느님만을 따르는 일’(충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관문이 복음이야기와 직접 관련됩니다. 두 관문을 통과한 인디는 ‘사자’ 머리 상 앞에서 건너편을 바라봅니다. 발밑은 까마득한 낭떠러지입니다. 연결된 다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입니다. 그는 주저합니다.

안내서에 적힌 그림과 암호문은 “하느님의 길, 사자의 머리에서 뛰어내릴 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리라!”입니다. 그는 자신의 ‘눈’과 ‘이성’이 말하는 것을 신뢰할 것인지 아니면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고대의 안내서가 말하는 것을 따를 것인지 결정해야합니다. “불가능해! 어떻게 뛰어 넘어!”라고 혼잣말을 합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합니다. 인디가 갖고 있는 ‘고대의 안내서’에는 그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그림과 암호문이 분명히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저합니다. ‘이성’에만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인생길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어떻게 해야 지상에서 천국으로 건너가는지 ‘하느님의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인디처럼 주저합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과학’(이성)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비이성적이고, 불확실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따르기보다 ‘이성’을 도구로 하는 ‘과학’과 다른 ‘경험적 증거’를 따르겠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사실 우리만 이런 고민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복음이야기를 보십시오. 제자들은 ‘바다’에서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바다’는 《성경》에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겪는 ‘두려움과 공포와 혼돈’을 상징합니다. ‘새벽 4시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고 보도합니다.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소리칩니다. 바다 위를 걸어오셨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주로 땅에서 양과 염소를 치며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검푸른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는 낯설 뿐만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와 혼돈의 장소’였습니다. 고대 근동지역의 사람들은 이런 ‘바다’를 보면서 ‘괴물 신이 산다.’는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 옛 조상들이 바다에는 ‘용왕이 산다.’고 믿던 것과 같은 차원입니다. 고대소설 중에 무사항해를 기원하며 ‘인당수’(印塘水, 장산곶과 백령도 사이)에 처녀를 ‘인신공희’한 《심청전》도 있잖습니까?

그 ‘괴물 신’은 바다 깊은 곳에 엎드려 있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으러 나오면 많이 잡게 해줍니다. 하지만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이나, 죄인이 건너려고 하면 광풍이 불게 합니다. 온갖 몸부림을 쳐서 배를 뒤집고 바다 깊은 곳으로 데리고 들어가 죽입니다.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민간 신앙이 고대 근동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고대 바벨론 신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바다를 지배하는 그 괴물 신, 즉 ‘어둠과 혼돈의 용’을 ‘티아마트’(Tiamat)라고도 주장합니다. 이 티아마트의 영향이 그리스신화에서는 ‘포세이돈’으로, 로마신화에서는 ‘넵튠’(Neptune)으로 전해집니다. <구약> 학자들도 이 티아마트의 영향이 ‘라합, 괴물, 레비아단, 큰물고기, 용(뱀), 악어’ 등의 이름으로 《성경》에 표현된다고 주장합니다(욥기 26:12; 시편 74:13-14, 148:7; 이사 27:1, 51:9; 에제 29:3, 32:2).

‘바다 신’은 인간보다 힘센 존재이기에 당연히 건너는 이들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구약>은 ‘야훼’ 하느님이 ‘바다를 정복하신 전능하신 분’이라 고백합니다. ‘바다를 정복했다.’는 말은 거센 풍랑, 즉 두려움, 공포, 혼돈의 장본인인 ‘바다의 신을 제압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두려움과 공포와 혼돈의 바다를 다스리시고 징계하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아래의 구절이 그런 예들입니다.

들끓는 바다를 다스리시며 파도치는 물결을 걷잡으십니다. – 시편 89:9

야훼여, 당신은 팔을 벌떡 일으키십시오. 그 팔에 힘을 내십시오. 옛날 옛적에 하셨듯이 팔을 일으키십시오. ‘라합’을 찢던 그 팔을, ‘용’을 찔러 죽이던 그 팔을 일으키십시오. -이사 51:9

주께서 말을 타고 ‘바다 위’를 달리시니 바다 큰 물결이 들끓습니다. – 하바 3:15

이런 배경 이해를 가지고 오늘 복음이야기를 다시 본다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흔히 우리는 이 장면을 예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나타내신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태오공동체에 속해 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이 장면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신앙고백을 합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 마태 16:16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아차리는 신앙고백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이 고백이 있기기 전, 이미 예수님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바다는 세상이 인생에게 주는 근본적인 ‘두려움과 공포와 혼돈’을 상징합니다. <구약>은 하느님이 바다를 다스리시고 정복하신 분이라고 증언합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예수님이 그 바다 위를 걸으시는 분, 즉 바다를 이기시는 분으로 나타났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처럼, 이 세상에 두려움, 공포, 혼돈을 가져오는 모든 세력을 이기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려는 ‘진수’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이야기 말미에 이런 신앙고백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함께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 – 마태 14:32-33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요사이 사회가 양극화되면서 대물림이 심하다고 합니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경우는 이젠 없고, 거의 대부분 부자 집 자녀들이 소위 말하는 명문대를 점령했다고 합니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주창한 것처럼, ‘사회적 지위’를 재생산하는 가장 우수한 기제라는 ‘문화자본’의 병폐가 점점 우리사회를 공고히 점령하고 있어서 걱정스럽습니다.

아무튼 부자 집일수록 부모의 가업을 물려받는 자녀들이 많다고 하는데,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도 비슷합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이미 바다와 바람을 이기신 분입니다. 제자들은 바다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바다를 이기신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아버지처럼 하고 있으니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넓게 말하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일을 충실히 수행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구약의 야훼 하느님과 같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이 그런 분임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령’이라고 소리칩니다. 당시 민간신앙을 따라서 바다의 신인 ‘티아마트’가 나타났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을 헤치려고 역풍과 풍랑이 일게 하더니, 급기야 자신들을 죽이려 바다 위를 걸어서 나타났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정말 기절초풍할 광경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 마태 14:27

‘나다’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에고 에이미’입니다. 이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이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실 때 주로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지난 부활절기 설교 때 다룬 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바다의 신’을 이기시고, 세상의 모든 ‘두려움과 공포와 혼돈’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으로 거기 서 계신 분임을 명확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미 그렇게 당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래아 바다’(호수)를 건너기 바로 전,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 기적을 통해 예수님은 광야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간 먹이시던 하느님 이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바다 위를 밟고 오심으로써, 즉 바다를 이기심으로써, 모든 인생들에게 ‘평안’을 가져오시는 하느님 이미지를 다시 보여주시는 중입니다.

그 순간, 베드로가 소리칩니다.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 마태 14:28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십니까?”라고 물었다는 것은 “당신이 하느님 이미지를 갖고 계신 분이라면”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이라면 능력에 있어서 못하실 일이 없으니 자신도 물 위를 걷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대단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우리 모든 인간의 욕망을 봅니다. 우리도 세상의 두려움과 공포와 혼돈을 이기고 싶습니다. 우리의 위대함을 드러내 보이고 싶은 욕망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은 입술의 고백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너라” 하십니다. 베드로는 그 짧은 순간, 자기 생각(이성)과 싸워야 했습니다.

불가능해! 어떻게 물 위를 걸어!

아니, 오라잖아! 틀림없이 예수님 목소리야!

옆에는 ‘풍랑'(죽음)이고, 앞에도 ‘유령’(죽음)입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순간입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계곡 앞에 서 있는 인디의 등 뒤로 서둘러야 한다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 때 그의 입에서 터전 나온 고백이 “믿음의 도약. 오, 주님!”입니다. 머뭇거리는 그를 위해 총상으로 고통 하던 아버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믿음을 가져, 믿음을 가져야 돼

이 장면을 보면서 인디 아버지의 기도가 마치 예수님이 베드로(우리)에게 하시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복음이야기에는 짤막하게 “오너라.”로 되어 있지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식으로 하자면 예수님은 그 뒤에도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베드로! 믿음을 가져야 돼!”

인디는 무엇을 따를지 갈등합니다. ‘이성’을 따를 것이라면 여기서 포기해야 합니다. 인디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왼손을 가슴에 댑니다. ‘눈’(이성)을 감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이성’이 아니라 ‘가슴의 소리’, 즉 고대의 안내서가 말하는 ‘내면의 소리’를 따르기로 그가 선택했다는 것을요. 이름 하여 ‘믿음의 도약(The Leap of Faith)’입니다.

그가 다시 ‘눈’(영적인 눈, 믿음의 눈)을 뜨고, 숨을 크게 내뱉는 순간 ‘눈빛’이 빛납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이전의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진실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는 허공을 향해 ‘왼발’을 들어 올립니다. 그 왼발은 하느님께 거는 믿음, 아버지를 향한 사랑, 자신에 대한 믿음을 상징합니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위로 왼발을 내딛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입니다.

그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계곡 사이에는 ‘투명한 돌다리’가 생겨납니다. 이성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투명한 다리입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길, 믿음의 도약’입니다. 이렇게 그는 하느님이 마련하신 그 믿음의 길을 걸을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증명했습니다. 이 장면에서 감독은 믿음의 행동이란 일종의 ‘전인적 도약(跳躍)’, 즉 ‘이성을 뛰어넘는 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디는 이성이 아닌 ‘믿음의 도약’을 통해 마지막 관문을 통과했습니다. 그 돌다리를 건너서 성배가 안치된 반대편 동굴로 들어갑니다. 마치 ‘믿음의 도약’을 한 베드로가 물 위를 밟고 주님께 걸어갔듯이 말입니다.

이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감독이 우리에게 꼭 이런 말을 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 허공 속으로 ‘믿음의 한 걸음’(첫 걸음, 행동)을 내딛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일 수 있겠는가? 자신 안에 있는 ‘신성’(궁극적 관심, 위대함)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는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 당신이라면 전인적인 ‘믿음의 도약’을 할 수 있겠는가?

사실 ‘믿음의 도약’(leap of faith)이라는 말은 무형이거나 증명할 수 없거나, 경험적 증거가 없는 것을 믿거나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뭔가 불확실한 것에 봉착하거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비이성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쓰는 말이 ‘믿음의 도약’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믿음의 도약’이라는 말을 들으면 뭐라 할까요? 아마 그들은 극도로 비이성적이고 불확실한 태도라고 평가절하 할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신구교 포함)가 ‘역풍’과 ‘풍랑’을 만나 몹시 시달립니다. 이러저런 일들로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이 많다보니 ‘교회’나 ‘믿음’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일종의 ‘조롱거리’로 전락했습니다. 외부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내적으로도 ‘가나안(안 나가) 신자’, ‘가나안(안 나가) 교회’라고 해서 아예 교회 나가는 걸 거부하는 신자들까지 생겨났습니다. 한 마디로 작년 말 촛불 때처럼, “이게 교회냐? 이게 믿음이냐?”라는 비판과 조롱이 교회내부에서 조차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비판과 조롱 앞에서 가장 슬퍼하실 분은 주님이십니다.

‘교회’, ‘믿음’, ‘복음’ 이 좋은 말들이 일부 성직자와 신자들 때문에 혐오로 변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의 집단’으로 여깁니다. ‘비이성적’이고, ‘불확실’하고, 정신적으로 ‘병든’ 이들의 행위가 ‘믿음’이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세상을 향해 “회개하라” 외치지 말고 “너희 자신들부터 회개하라”고 ‘복음’을 조롱합니다.

그들의 말은 일부 맞습니다. 사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고, 영적인 병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지구상 어떤 교회도 완벽하지 않고, 연약하며, 문제가 없는 교회란 없습니다. 이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건강성의 기준’을 무엇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누가 뭐라 해도 ‘교회의 건강성’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의 태도’를 통해 보여 집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건강하지 않고, 가정들이 건강하지 않은데, 어떻게 교회가 건강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초대교회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사도 바울로의 편지들을 읽어보면 2차 전도여행시 유럽에 최초로 세운 ‘필립비교회’ 말고(사도 16:6-15), 그가 기쁨에 겨워 편지를 쓴 교회는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늘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세운 교회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더욱이 교회는 점점 조여 오는 로마제국의 ‘박해’라는 역풍과 풍랑을 견뎌야하는 한 척의 나룻배와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초대교회는 그 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연약하고, 문제가 많고, 병든 모습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살아남았습니다. 그 살아남은 교회들의 핵심에 ‘공동체의 믿음의 도약’이 자리했습니다. 두 ‘눈’(이성)에 아무런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모든 것을 걸고 허공으로 ‘믿음의 한 걸음'(첫걸음)을 내딛고 걸어간 이들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인 이들입니다. 자기 삶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로 발견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간 이들입니다.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발견한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한 이들입니다. 이들의 ‘믿음의 도약’(행동)으로 복음은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올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땅의 교회, 죽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우리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도약”입니다. 믿음이란 ‘비이성적인’ 것도 ‘불확실한’ 것도 아니라는 진실을 교회는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실 ‘비이성적인’, ‘불확실한’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믿음’과는 관련이 없는 말들입니다. 믿음은 비이성적인 일련의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게다가 믿음은 비이성적인 제안들에 대한 확신도 아닙니다. 적어도 《성경》은 믿음을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말 아닙니다. 믿음은 비이성적인 것에 관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 사실에 대한 확신이나 동의 차원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이성적인 것 이상’이기 때문에 결코 비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믿음은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관계 속에서의 ‘복종’, ‘충성’, ‘도약’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은 우리의 복종, 충성, 도약이 ‘누구를 향한 행동’인가를 말해줍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가장 자주 기술하는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자신의 편지들 속에 ‘믿음’이라는 말을 쓸 때도 이런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교회의 역사적인 신조들을(니케아신경, 사도신경) 통해 명확히 알 수 있듯이, 믿음은 우리가 무엇에, 특별히 ‘누구에게’ 우리의 목숨을 복종하고, 충성하며, 도약하여 살아가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1독서 《창세기》가 전하는 요셉을 떠올려 보십시오. 오늘 그는 ‘역풍과 풍랑’ 속에 있습니다. 그의 삶은 밑바닥까지 내려가 완전히 끝나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가 어떻게 ‘도약’했다고 《시편》은 노래합니까? 전능하신 하느님이 ‘두려움과 공포와 혼돈’ 속에 있던 그의 삶을 주관하셨다고 노래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이 모든 비극마저도 선용(善用)하셨다고 노래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를 위한 구원의 도구로 높이셨다고 노래합니다. 이러한 요셉은 우리 자신의 또 다른 ‘미래의 이름’입니다. 요셉은 평생토록 하느님을 따랐고, 하느님께만 충성했으며, 위대한 도약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복음이야기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증언합니다. 세상의 ‘두려움과 공포와 혼돈’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이라 증언합니다. 우리 삶이 분명 ‘역풍과 풍랑’ 속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부부 갈등, 자녀 양육, 부도, 해고, 질병, 사고 등. 그것이 어떤 고통스런 형태로 찾아올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풍랑 속에 빠지기보다 나와 함께 풍랑 위를 걷자, 문제 속에 허우적대기보다 나와 함께 문제 위를 걷자”며 “오너라” 명령하십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오셔서 ‘주님을 향한’ 순전한 ‘회개(복종)’와 ‘충성’을 다짐하는 우리를 감싸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베드로처럼 주님이 하느님이심을 믿고, 우리 삶의 풍랑 위로 첫 걸음을 내딛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던, 주위의 ‘부정적인’(이성적인) 시선에 갇히기보다 베드로처럼 ‘첫 번째’ 발걸음을 내 딛습니다. 우리 발밑이 깜깜하고 깊은 계곡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인디아나 존스처럼 ‘믿음의 도약’을 시도합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는 것 같이 따르는 ‘복종’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마음의 눈으로 보고 위대한 첫 발을 하느님을 향해 내밀게 하는 ‘충성’이기 때문입니다. 복종(회개)과 충성, 그것이 사랑의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우리 믿음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목숨을 걸 수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에게 이성(理性)만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영적 도약의 발걸음입니다. 베드로처럼 주님을 향해, 인디아나 존스처럼 우리 안의 참된 가치(價値, 궁극적 관심)를 향해 ‘믿음의 도약’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살아계신 성삼위일체 하느님의 ‘평화의 복음’을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과 혼돈에 찬 이 나라와 민족에게 전하는 ‘아름다운 발'(행동)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스텔라 데이지호 수색에 정부가 적극 나서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2. 5명의 세월호 미수습자들이 가족 품으로 돌아오도록 기도합시다.
  3. 남북 대화와 한반도 긴장 완화,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4. 실직자들과 청년 구직자들,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5. 이 땅의 교회들이 사회적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6. 오종민(어거스틴) 교우와 모든 군복무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기도합시다.
  7. 故 유정자님의 안식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2017. 8.13. 연중19주일/평화통일기도주일”의 2개의 댓글

  1. 핑백: 2018.1.21. 연중3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2. 핑백: 2017. 8.27. 연중21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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