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2. 주의 세례축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오늘은 연중시기를 시작하는 주의 세례축일입니다. 연중시기 전례색은 ‘녹색’이나 오늘이 주요축일이기에 영광과 기쁨, 부활과 빛을 상징하는 ‘백색’을 사용합니다. 전례독서 주제는세례, 하느님의 나라와 () 향한 가장 값진 투신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삶에 연대하신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심을 기념하면서 우리의 세례 언약도 되새깁니다. 세례를 통해 죄에 종노릇하던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 은총을 받은 자녀답게 날마다 구원의 일, 즉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을 수행하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예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에 성령을 보내시고 사랑하는 아들이라 말씀하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우리도 세례의 언약을 굳게 지키며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42:1-9
  • 시편 – 29
  • 2독서 – 사도 10:34-43
  • 복음서 – 마태 3:13-17

주의 세례축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세례, 하느님의 나라와 () 향한 가장 값진 투신의 시작입니다.

성공회는 《기도서》를 따라 ‘하늘 여정’을 가는 거룩한 전통이 있습니다. 매일의 <전례독서>와 <본기도>를 나침반으로 삼아 우리의 목적지와 지금 우리가 어디 쯤 와 있는지를 알아차립니다. 지난 주간도 이 하늘 여정을 잘 걸어오셨는지요? 어째서 그런 주간 <전례독서>와 <본기도>를 ‘공현대축일’과 ‘주의 세례축일’ 사이에 배정했는지를 좀 더 환히 알아차렸습니까?

지난 주간 1독서는 《요한의 첫째 편지》를 배정했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나타남’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계속해서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보내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교훈합니다. ‘주의 세례축일’을 하루 앞둔 토요일에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세례’와 ‘수난’을 언급하며 ‘주일’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성시》는 <72편>과 <147편>을 나누어서 배정했습니다. <72편>은 왕의 ‘대관식’이나 해마다 있던 ‘신년축제’ 때 왕실 행사를 위해 사용된 경축의 노래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가져오기 위해 ‘평화의 왕’으로 ‘성육신’하신 ‘메시아 예수님’을 찬미하는 성탄 2주간에 잘 어울렸습니다. <147편>은 ‘우주와 역사의 궁극적 주인’이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만물의 창조주,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 ‘생명’을 주시는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찬미하는 성탄 2주간에 잘 어울렸습니다.

 

<복음서>는 <공관복음>들을 배정했습니다. 하나같이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드러내는 사건과 말씀들입니다. 공현대축일인 월요일은 ‘동방박사의 방문’(마태 2:1~12), 화요일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인 갈릴래아 전도’(마태 4:12~17,23~25), 수요일은 ‘오병이어의 기적’(마르 6:34~44), 목요일은 ‘물위를 걸으신 기적’(마르 6:45~52), 금요일은 ‘메시아 취임사’(루가 4:14~22), 토요일은 나병환자의 치유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빛이신 주님께로 몰려드는 사건’입니다(루가 5:12~16).

주간 <본기도>는 어떤 기도의 지향들이었습니까?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참 빛으로 이 세상을 밝혀 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이 빛과 사랑 안에 살면서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소서. – 성탄2주간

영원하신 하느님, 동방박사를 별빛으로 인도하시어 아기 예수를 경배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이 세상 모든 나라를 참 빛으로 인도하시어 온 인류가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소서. – 공현대축일과 그 주간

다시 돌아보아도 ‘공현대축일’(성탄 2주간)과 ‘주의 세례축일’ 사이에 배정한 주간 <전례독서>와 <본기도>는 참으로 심오합니다. ‘하늘 여정’에 있는 우리에게 축일들의 깊은 의미 뿐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삶의 태도와 기도의 지향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오늘은 ‘연중시기’를 시작하는 ‘주의 세례축일’입니다. 공현일 후 첫 번째 오는 주일에 기념하는 주의 세례축일은 ‘참 빛’으로 ‘성육신’하신 ‘말씀’이신 예수님이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아들로 공공연하게 드러나심(公顯, Epiphany)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신성(神性)이 드러났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더불어 우리의 ‘세례언약’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되새기며, 새롭게 출발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세례’와 우리의 ‘세례성사’가 갖는 의미를 되새기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힘차게 올 한 해를 살아가도록 초대하는 오늘입니다.

특히 오늘 배정된 복음이야기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의 신비’를 잘 드러내주기까지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우리를 삼위일체 하느님의 완벽한 ‘사랑의 교제’(친교, 상통) 속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합니다. 사실 ‘주의 세례’는 ‘연약한 본성을 지닌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지를 들려줍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어떻게 ‘신성’(神性)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들려줍니다. 그 방법은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와의 ‘사랑의 교제’(친교 상통) 속에 있을 때입니다. 그 교제로 들어가는 관문이 ‘세례’라고 오늘날까지도 ‘교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찬례’에 참여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들어왔고, 사랑의 친교 속에 역사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의 신비를 받아 누립니다. 이제 <전례독서>를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독서는 ‘야훼의 종의 첫 번째 노래’인 《이사야》입니다. 구약성서 학자들은(대표적으로는 1892년 Bernhard Duhm) 《이사야》를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1-39장, 40-55장, 56-66장). 구분하는 근거는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동기들의 차이 때문입니다.

오늘 배정한 1독서는 <제 2이사야>에 속합니다. 시대 배경은 유다 백성의 바빌론 귀양살이가 끝나갈 무렵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배반한 죄로 기원전 600년경부터 540년경까지 두 세대 이상을 바빌론에서 귀양살이 중입니다. 오랜 유배생활에 지쳐 더 이상 구원도, 하느님도 희망할 여력조차 없습니다. 총체적 절망입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그들을 향해 제 2이사야는 ‘새로 될 일’(이사 40:9), 즉 ‘하느님의 위로’와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이사 40:1). 절망 속에 있는 그들을 격려하여 ‘죄의식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도록 선포합니다(이사 40:2). 지금까지의 귀양살이면 충분히 ‘하느님의 징벌’을 받았고, 이제는 ‘위로’와 ‘구원’을 받을 때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이사 42:13~14,16). 심판과 분노, 저주와 절망의 과거는 청산되고, ‘해방과 구원의 미래’, ‘자유와 회복의 미래’가 도래했다고 선포합니다. 한마디로 ‘제 2출애굽의 때가 도래했다’고 선포합니다.

 

이 ‘해방과 구원’이라는 ‘새 일’은 그들이 회개했다거나 정의롭게 살아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은혜’와 ‘언약의 신실함’이 그들의 운명을 반전(反轉)시킬 것입니다. 다시 말해 깨질 수 없는 ‘영원한 계약’ 때문입니다. ‘율법준수’가 ‘조건’처럼 요구되는 ‘시나이산 계약’이 아닙니다(출애 24:1~11; 레위 26:15~16a). ‘선물’처럼 ‘무조건적’으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창세 15,17장), ‘다윗’과 맺으신 ‘영원한 계약’(사무하 7:8~16; 23:5; 시편 89:3~4 참조)을 충실히 지키시려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덕택에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결코 깨질 수 없는 이 ‘무조건적이고 영원한 계약’ 덕택에 하느님께서 용서하시고, 다시 그들에게로 ‘얼굴’을 향하실 것입니다. ‘해방과 구원’이라는 모든 일이 ‘원만’하게 될 것입니다.

제 2이사야는 그 ‘해방과 구원’이라는 ‘새 일’을 성취할 ‘야훼의 종’, 즉 ‘메시아’를 소개합니다. 사실 제 2이사야에는 4개의 ‘야훼의 종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이사 42:1~9; 49:1~6; 50:4~11; 52:13~53:12). 특히 세상을 위하여 ‘대신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이사 50:4~11; 52:13~53:12)의 노래가 유명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이 ‘야훼 종의 노래’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세례와 공생애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

이 4개의 노래 중에서 ‘가’해인 올해는 ‘야훼의 종의 첫 번째 노래’(이사 42:1~9)를 ‘주의 세례축일’ 1독서로 배정합니다. ‘해방과 구원’이라는 ‘새 일’을 위해 하느님께서 기뻐하고 선택하여 세워주실 메시아의 성품을 보여줍니다. 그가 성취하실 사역을 들려줍니다. 유다가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되었듯이 ‘해방과 구원’이라는 ‘새 일’도 야훼의 종을 통해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소음으로 꽉 찬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는 예언으로 선포되는 그 ‘음성’(목소리)을 들으며 잠시라도 ‘쉼’을 얻습니다. 사실 오늘 <전례독서>는 ‘목소리’를 소재(素材)로 서로 연결됩니다. 하느님은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다정한 음성’으로 당신의 종을 지명(指命)하십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내가 믿어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 이사 42:1

하느님의 다정하신 음성과 복음이야기의 기쁜 음성이 메아리처럼 완벽히 ‘상응’(相應)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마태 3:17b

 

둘 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시는’(公顯, Epiphany) 천상의 울림입니다. 특히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음성은 ‘인류의 해방과 구원’이라는 ‘새 일’을 성취하러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신성’을 기념하는 ‘공현 절기’에 큰 울림을 줍니다. 동시에 ‘세례 성사’를 받은 우리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금 깨우쳐 주시는 음성입니다.

나 야훼가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 내가 너의 손을 잡아 지켜주고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 너는 만국의 빛이 되어라.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주어라. – 이사 42:6~7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그 분 안에서 인류와 ‘새 계약’(마르 14:24, 예레 31:31), ‘평화의 계약’(에제 37:26)을 맺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를 보지 못하는 이들이 눈을 뜨고 ‘지혜의 눈’을 갖게 해 주실 것입니다(참고 루가 4:14~22). 죄와 사탄과 죽음에 종살이하는 이들을 풀어주실 것입니다. 그 ‘가르침과 활동’, ‘마지막 식사’, ‘십자가와 부활’로 말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을 보내신 이유는 ‘해방과 구원’이라는 ‘새 일’의 성취를 위해서입니다. 간단히 ‘정의’(바른 인생길)를 세우는 일입니다(1,3,4,6절). 이 일을 성취하도록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에게 ‘성령’을 주시어 불러주셨습니다(1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저 나 하나만의 구원을 위해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해방과 구원’이라는 ‘새 일’을 성취하시는 과정에서 ‘야훼의 종의 성품’이 공공연히 드러납니다.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 그는 기가 꺾여 용기를 잃는 일 없이 끝까지 바른 인생길을 세상에 펴리라. – 이사 42:2~4a

‘정의’(正義, 바른 인생길)를 세워 가시는 그 분은 ‘비폭력적’으로, 한없이 ‘자비롭게 행동’ 하십니다. 다시 말해 ‘정의’를 세워 가시는 그 분의 성품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세례 받은 우리가 닮으려는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온유와 겸손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다른 이름도 ‘온유와 겸손’이어야 합니다. ‘정의’를 세우겠다며 광화문에 모여서 ‘폭력적’으로 온갖 ‘소음’(騷音)을 내며 자칭, ‘하느님의 목소리’라는 극단적인 보수 그리스도인들은 귀담아 들어야할 말씀입니다. 우리 민족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주님의 해방과 구원이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귀청을 따갑게 하는 ‘폭력적인 소음’(騷音)이 아니라 ‘위로와 격려의 다정한 음성’이 그립습니다. ‘온유와 겸손’으로 이웃을 대하는 ‘살갑고 자비로운 그리스도인’이 그립습니다. 제 자신이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배반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을 향한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8절).

 

《시편》은 <29편>입니다. ‘지존’(至尊)이신 하느님을 찬미하게 모이라고 초대합니다(1~2절). 특히 ‘자연 현상’을 통해 창조주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을 찬미합니다(3~8절). 주변의 이방 민족들이 섬기듯이 ‘자연’은 숭배할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자연의 힘을 완전히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시인은 무려 ‘일곱 번’이나 ‘천둥소리’를 언급하며 그것이 ‘하느님이 발현’하시는 ‘목소리’라고 찬미합니다. 그 때 나타나는 ‘자연현상’은 ‘하느님의 권능의 표현’이라고 찬미합니다.

시인처럼 우리 역시 ‘자연현상’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의 눈’과 ‘귀’를 가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로마 1:20). 자연이 하느님을 계시하는 또 하나의 《성경》임을 알아차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성전 안에 모인 하느님의 백성들은 ‘천둥소리’로 나타나는 ‘자연현상’에 두려워 떨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께 ‘영광’이라고 찬미합니다(9절). 왜냐하면 하느님의 목소리에 담긴 선포의 본질적인 내용은 1독서 《이사야》가 예언하듯이 언제나 ‘해방과 구원’이라는 ‘새 일’, ‘위로와 격려와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야기가 들려주듯이 ‘사랑과 기쁨과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천둥소리’ 치는 그 요란한 날에 하느님께 바쳐 올릴 수 있는 한 편의 ‘사랑의 시’(詩), 한 자락의 ‘평화의 곡조’(曲調)가 있다면 행복하겠습니다. 내면에 ‘폭풍’이 휘몰아칠 때 잔잔케 할 ‘한 말씀’을 간직하고 산다면 행복하겠습니다.

시인은 하느님께서 온 우주를 ‘평화’로 다스리시고 ‘복’ 주시는 분이라는 찬미로 끝을 맺습니다(10~11절).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시고, ‘평화’를 주신다는 찬미에서 1독서 《이사야》가 전하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시인이 언급한 자연계에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와 예수님의 세례 후 그 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들려주신 ‘천상의 노래’(마태 3:17)가 절묘한 대비를 이루며 감동을 더합니다.

 

2독서는 <사도행전>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사건’을 ‘복음의 정수’(精髓)로 선포하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그리스어로는 케리그마)입니다. 사실 그 설교는 초대교회가 선포한 선교의 ‘핵심내용’이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의 후예인 ‘성공회’(聖公會 하나이요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공교회)도 이 ‘복음의 정수’(精髓), 즉 ‘진리’에 기초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고르넬리오’ 집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성령으로’ 힘차게 ‘평화의 복음’을 전합니다(사도 10:34~43).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살면서 깨달은 ‘신의 관점’, 즉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도달한 의식’의 상태를 들려줍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신다.’는 깨달음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경외’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주신다’는 엄청난 ‘통찰’(洞察)입니다(사도 10:34~35).

그의 ‘증언’(설교)에 따르면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하느님이 행하신 ‘정의(正義)의 일’입니다(참고, 사도 2:32; 1베드 1:21).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주시어 ‘당신의 말씀’인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사도 10:36~38). 예수님은 갈릴래아와 유다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착한 일)을 해주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사도 10:37~38). 한마디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하지만 불의한 사람들(당대 기득권자들이자 종교인들)은 그런 예수님을 ‘눈에 가시’처럼 여겼습니다. 자신들의 ‘안위’를 위협한다고, 자신들의 욕망대로 해 주지 않는다고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요한 11:47~53). 그 종교인들은 그 일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열정의 표현이자, 민족을 위한 길이라고 떠벌리기까지 했습니다(요한 11:50). ‘소음(騷音) 공해’였습니다. 그런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모든 일이 덮어지고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이 저지른 ‘불의’(不義)를 다 보고 계셨습니다. ‘정의(正義)의 하느님’은 가만 계시지 않았습니다. ‘착한 일’(평화의 일)을 하신 예수님을 하느님께서는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시고’ 사도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사도 10:40).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자신이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자’이심을 선포(설교, 증언)하는 ‘새 사명’을 사도들에게 주셨습니다(사도 10:42). 모든 예언자들이 그 사명을 이미 선포한 바 있다(이사 53:5; 예레 31:31~34)는 것이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따르고 살면서 베드로가 ‘깨달은 관점’, 즉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도달한 의식’의 상태이자 완전히 달라진 ‘세계관’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하느님께서 행하신 ‘정의의 일’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희망’을 건 이들은 어떤 죄와 비극의 구덩이에서도 용서받고 다시 일어나 올라올 수 있습니다(사도 10:4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소식’이야말로 인류에게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 덕택에 우리는 자신과 세상에 대해 전혀 ‘새로운 관점’과 ‘의식’을 갖고 살게 되었습니다(2고린 4:6; 에페 5:8; 필립 2:15; 1데살 5:5; 히브 1:3; 야고 1:17; 1베드 2:9; 1요한 1:7). ‘주의 세례’는 이 같은 ‘복음 정수’가 시작되는 ‘출발선’입니다.

 

<복음서>는 《마태오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세례’ 이야기입니다. 지난 ‘성탄대축일’에 우리는 하늘이 땅에 닿는 위대한 사건을 기념했습니다. 우리처럼 ‘연약한 아기’로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를 보았습니다. 그 거룩한 아기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었습니다. ‘왕의 예복’과 ‘왕의 보좌’라기에는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천사가 알려준 ‘구세주의 표시’였습니다. 지난 ‘공현대축일’에 우리는 그 거룩한 아기가 ‘소박한 집’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궁’이라기에는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믿음과 용기와 지혜를 선물받은 동방에서 온 구도자들은 ‘그 집’에 들어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며 ‘왕의 예우’를 갖추었습니다.

오늘 ‘주의 세례축일’에 우리는 전혀 다른 한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은 하나 같이 이 분을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완벽한 사람의 전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잉태’와 베들레헴에서의 ‘탄생’을 통해 참 인간으로서의 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부모의 사랑과 정성스런 보살핌을 받으며 나자렛에서 키와 지혜와 믿음이 자라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내셨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자녀양육과 믿음의 가정을 일구는 일은 소중한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은 ‘건축노동자’인 요셉의 품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법을 익히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인간의 모든 ‘노동’을 ‘성화’(聖化)시키셨습니다.

 

‘하느님의 때’가 무르익자 예수께서는 ‘출가’(出家)하여 인류를 ‘재창조’하시려는 하느님의 ‘거룩한 일’에 자신을 ‘투신’(投身)하려고 하십니다. 사실 태중에 잉태되실 때 인류를 ‘재창조’하시려는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노동자로 살아가심으로써 인간 삶의 모든 ‘직업’을 ‘성화’(聖化)시키셨습니다. 그 누구도 직업의 귀천을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인간의 ‘재창조’와 ‘구속’을 위한 ‘사명’(使命)에 자신을 ‘봉헌’(奉獻)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성화’(聖化)시키실 참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출발 장면’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몸이 완전히 잠기게 하는 침례)를 베풀고 있을 때 예수님도 ‘자발적으로’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그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모세의 인도’로 ‘물’로부터 ‘구원’받은 바 있습니다(출애 14:21~22). 그 옛날 광야생활을 끝낸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여호수아’와 함께 요르단 강에 들어섰습니다(여호 3:15~17). 새로운 모세, 신약의 여호수아인 ‘예수님’도 요르단 강에 들어서십니다. 줄 지어 있는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시며 기다리고 서 계십니다. 거기 서 계신 예수님을 통해 인류 전체는 지금 구원으로 초대되고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서 계신 그 ‘물’은 ‘태초’에 자신을 통하여 창조된 바 있습니다(요한 1:3). 아주 오래 전 노아 시대에 하느님의 심판과 정화의 수단이었던 물이 이제 그 물에 들어서신 예수님 덕택에 인류가 죄로부터 구원받고 새로워지는 ‘성천’(聖泉), 즉 ‘세례의 성수’로 성화될 것입니다. 아들을 통해 아버지가 창조하신 최초 요소 중 하나인 ‘물’은 성육신하신 아들을 통해 이제 ‘재창조’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이 어떤 맥락에서 일어난 일인지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에 세례자 요한의 선포를 받아들인 이들은 자기 삶을 바꾸겠다는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받았습니다(마태 3:6). 다시 말해 죄악의 삶을 살아온 죄인들이 이제부터 ‘새롭게 살기로 작정’하였음을 나타내는 표시가 ‘세례’입니다. 특히 《루가복음》에 따르면 세례 받은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세례자 요한’에게 물었고,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그들에게 친절히 가르쳐 주었습니다(루가 3:10~14). 또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세례’ 받으러 온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을 호되게 꾸짖었습니다(마태 3:7~10).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에게로 가까이 다가왔을 때 깜짝 놀라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상상이 되십니까? 세례 받으러 왔을 때 뿐 아니라 그 다음에도 예수님을 대하는 세례자 요한의 태도는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세례가 죄를 회개할 필요가 있는 ‘죄인들의 세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새롭게 되어야할 ‘죄인임을 인정’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 기자는 이 점을 명백히 하려고 줄 서 있는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시며 세례 받으러 오신 예수님을 향해 이런 말로 ‘사양’하게 합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 – 마태 3:14

 

이것이 진실입니다. 세례자 요한마저도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데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는 ‘정화’되어야 할 ‘죄’가 없었기에 ‘세례 받으실(몸이 물에 잠겨야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예수님은 그에게 세례 받으러 가신 것입니까? 마태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을 이루기 위해서”(마태 3:15) 예수님이 ‘요청’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은 다른 말로 ‘모든 의’(義)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최초의 말씀’이기에 아주 의미가 깊습니다. 사실 각 <복음서>가 전하는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마르 1:15; 루가 4:18~21; 요한 1:38)은 그 복음서 전체의 ‘핵심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마태오가 예수님의 입술에 담은 최초의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의 삶의 목표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모든 일”, 즉 ‘하느님의 의’(義)를 이루는 삶이었습니다. 이 ‘의’(義)가 《마태오복음》 전체의 핵심 주제입니다. 그 ‘의’(義)란 한마디로 ‘인류의 구원’입니다. 다른 말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렇습니다. 그 ‘구원’(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의)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은 줄 지어 서 있는 죄인들(우리들)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일치, 연합)하시며 ‘세례’ 받기를 ‘허락’하셨습니다. 성육신처럼, 구유처럼 ‘새 계약’(평화의 계약, 참고 마르 14:24, 예레 31,31; 에제 37,26)을 성취하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종’처럼 섬겨주시는 ‘연대’입니다(마태 20:28). 이렇게 예수님의 ‘사명’(使命)은 ‘죄인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죄인과의 연대’입니다. 더욱이 《요한복음》 기자는 요한의 세례가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 베푸실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기 위한 ‘하느님의 방법’이었다고 전해줍니다(요한 1:31~34). 다시 말해 ‘거룩한 영과 불’로 진정한 ‘정화’를 이루실 ‘야훼의 종’, ‘메시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예수님을 ‘나타내려는’ 거룩한 수단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세례자 요한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의 의미를 바로 알아차립니다. 성육신하신 아버지의 말씀은 그 거룩한 몸을 요르단 강에 잠기게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것처럼 성령과 심판의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 물에 잠기셨습니다(마태 3:11). 즈가리야가 노래한 ‘구원의 태양’이 물에 잠기셨습니다(루가 1:78). 사도 요한이 선포한 것처럼 아무런 죄도 없는 가장 완전한 성전이신(요한 2:21) 분이 ‘세례’로써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15절).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 태초의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성령)이 휘돌고 있을 때처럼 성령은 물에 잠긴 하느님의 아들 위를 휘돌고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마태오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원문에는 있지만 공동번역에는 이 단어가 없습니다) 물에서 올라오셨다”고 묘사합니다(16절). 물에 잠기고(죽음), 곧 물에서 올라오십니다(부활). 유비적으로 말하면 무덤에 묻히는 죽음과 사흘 후 부활입니다. 이렇게 마태오는 예수님의 세례에서 부활과 재창조를 떠올렸습니다. 정말이지 ‘구원의 태양’은 그 밝기와 열기가 전혀 감해지지 않았습니다. 심판의 불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요르단 강물은 하느님의 아들에 의해 거룩하게 되고, 세상의 모든 물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이 가장 완벽한 사람의 전형이자, 가장 아름다운 성전이심이 ‘그 때’에 공공연히 드러나게 되었다고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오시는 것이 보였다. – 마태 3:16

일어난 사건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홀연히’(뜻밖에 갑자기) 하늘이 열리는 사건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장 완벽한 분, 가장 아름다운 성전이신 분 위에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마태오는 세례 후에 일어난 특별한 계시의 순간을 묘사합니다. 서로 통할 수 없을 것 같던 하늘과 땅이 갑자기 소통됩니다. 제 3이사야 예언자는 “아,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십시오.”(63:18)라고 호소한 바 있습니다. 이 호소의 응답처럼 하느님께서는 ‘내려오시어’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셨습니다. 그 존귀한 발이 요르단 강의 진흙 속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또 한 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외친 ‘불’이 아니라 ‘비둘기’ 모양, 즉 ‘평화’로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런 다음 ‘천상의 노래’가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마태 3:17b

 

음성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혹시 자녀가 있으십니까? 자녀를 안고서 이렇게 말씀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말씀해 보신 적이 있다면 그 표현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제 경우에는 ‘아들(딸)아, 너는 나다’입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자기 자신’이라고 ‘인준’(認准)하고 계십니다. ‘네 마음이 내 마음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걷고자 하시는 그 연대의 길,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섬김, 죄인과의 동일시가 사실은 하느님이 간직하신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음성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죄인의 세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독생자께서 죄인인 우리와 ‘연대’하시어 ‘하느님의 의(義)’를 이루시려는 세례였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성부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인간과 ‘연대’하시는 세례였습니다(요한 14:10). 그랬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처럼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의 감동’을 하늘에서 표현하셨습니다.

 

독특하게도 마태오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이 ‘천상의 노래’를 ‘객관적으로’ 들었다고 묘사합니다. 이 장면이 평행본문인 《마르코복음》이나 《루가복음》과의 차이점입니다. 마르코나 루가에서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마태오는 거기 있던 다른 사람들 모두가 이 ‘천상의 노래’를 들었다고 선포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는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당신의 아들로 ‘확인’해 주십니다.

더욱이 세례 때 일어난 이 사건은 ‘삼위일체’의 친교를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세례를 전하는 <공관복음> 기자들은 동일하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강림하시며, 하늘에서 음성이 드렸다”고 보도함으로써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인준’과 ‘성령의 능력으로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셨다’고 서술합니다. 한마디로 ‘주의 세례축일’은 예수님이 하느님 아들로서의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은 날이 아니라 그 ‘기원’과 ‘본질’에서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난 또 하나의 ‘공현일’입니다. 앞으로 펼쳐 가실 공생애의 목적 역시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느님의 의’(義)를 이루기 위한 ‘구원의 일’(하느님 나라)이 될 것임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공현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세례’에 담긴 의미입니다.

 

물론 《신약성경》에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지명)되어가는 다양한 전승변화의 시점들이 공존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예수님이 부활한 때’라는 시점을 갖고 있습니다(로마 1:4). 마르코는 ‘예수님이 세례 받은 때’라는 ‘공생애 초기’ 시점을 갖고 있습니다(마르 1:11). 마태오와 루가는 ‘예수님이 잉태된 순간’이라는 ‘태중의 시점’을 갖고 있습니다(마태 1:18,20; 루가 1:32). 여기서 그친다고 생각한다면 상상력이 부족합니다. 사도 요한은 마태나 루가 정도가 아니라 ‘세상이 시작된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선재’(先在, pre-existence)의 시점을 갖고 있습니다(요한 1:1).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셨던 때가 없습니다. 공교롭게도 지금 예로 든 이 다양한 전승변화의 시점들은 《신약성경》이 기록된 연대순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맨 나중에 기록된 《요한복음》처럼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셨는데 나중에 다양한 전승변화 과정을 거쳐 비로소 하느님의 아들로 인준된 것일까요? 꼭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쓰기 전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 필립 2:5~8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구절들은 초대교회에서 고백되던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명백히 ‘선재’(先在, pre-existence) 시점이 드러나 있습니다. 바울로는 이 찬가를 인용하여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비천한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시어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언제부터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셨는가와 같은 논쟁으로 시간을 보내기보다 삼위일체 신앙을 굳게 간직하십시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의 세례’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주의 세례’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이 밝히 드러난 사건입니다(에페 3:6).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와 ‘의’(義)를 성취하는 것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사명임을 ‘세례’로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 사명을 완수해 내셨습니다. 사도 바울로도 우리가 받은 ‘세례성사’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교훈합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 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 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 로마 6:3~5

 

이 같은 세례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도 깨우침 받습니다. 그 ‘사명’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와 ‘의’(義)입니다. 다시 말해 인류에게 ‘새로운 삶’, 즉 ‘구원’을 선물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인종과 민족, 성별과 세대, 계층과 정치적 성향, 기타 삶의 처지가 서로 다르더라도 ‘세례’를 통해 온 인류가 ‘하느님의 한 가족’,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부름 받았음을 드러내는 일입니다(에페 2:14~19). 한마디로 ‘세례’를 통해 인류를 ‘구원의 새 삶’, ‘하느님 나라’로 계속해서 ‘초대’하는 일이 ‘교회의 사명’(使命)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러 오시는 그 날까지 이 영광스러운 ‘구원의 사명’을 계속 수행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의 공현’이 되기 위해 ‘세례’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오늘을 기념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구원과 세상을 정화시키는 ‘사명’을 감당하도록 ‘성령의 생수’를 오늘도 공급받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의’(義)를 향한 예수님의 공생애는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거룩한 사명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다시 말해 ‘세례 성사’로 그리스도의 몸이 된 우리를 통하여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이야기에서 들은 하늘이 열리는 일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성령의 강림하심도 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들려 온 아버지의 음성도 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복음이야기는 우리가 세례 받았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닫게 해 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세례가 베풀어질 때마다 어떤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따라서 이 시간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탄생시킨 그 ‘세례 서약’을 다시금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교우들 앞에서 ‘버릴 것’과 ‘믿을 것’과 ‘지킬 것’, 이렇게 세 가지를 ‘서약’하였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모든 일과 세상의 악한 권세와 죄의 욕망을 ‘버리겠다’고 서약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과 <신경들>이 증언하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온전히 ‘믿겠다’고 서약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계명과 감사성찬례와 기도생활을 ‘지키겠다’고 서약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세례 서약’을 지금도 충실히 지키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 마음이 사탄과 죄의 욕망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돈이나, 물질이나, 권력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이 온다고 믿으며 예수님과 연합된 새로운 존재로 살고 있습니까? 내 뜻, 내 주장을 중심에 둔 채 고집스럽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정의와 평화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고 있습니까? 말과 행실로 복음을 전파하며 겸손히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감사성찬례를 통해 영혼의 양식을 얻으며, 기도가 우리 영혼의 호흡임을 믿고 기도의 힘으로 오늘을 살고 있습니까?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세례 언약’과 우리 삶에서 ‘하느님 나라와 의’(義)라는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사명’을 잊고 지냅니다. 그저 교회 안에서 ‘성찬례’를 바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는 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부러진 갈대처럼 활력을 잃었고, 깜박이는 심지처럼 세상의 희망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공현대축일’과 ‘주의 세례축일’이 갖는 ‘발현과 계시’의 그 ‘숭고한 의미’를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삶으로 가져가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다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들과 맺으신 그 무조건적인 영원한 계약(새 계약, 평화의 계약)에 우리 자신을 의탁하며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세례 서약은 율법준수의 조건처럼 우리가 강제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선물 받은 은총의 가치를 참으로 깨닫고 감사하는 교회는 어제까지의 삶과는 분명 다르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와 인간성을 공유하시고, 연대하신 예수께서는 요르단 강으로 들어가심으로써 그 강물을 치유와 자비의 은총을 갖는 살아있는 물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간직하신 그 ‘영원한 생명’은 이제 자신의 몸인 교회에서 행해지는 ‘성사’를 통하여 계속해서 중재됩니다. 성찬례 때마다 말씀은 우리 가운 데 오시며, 오늘날도 말씀은 우주를 ‘재창조’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이루어질 역사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 성사’한 우리는 지금도 진행 중인 이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와 의’(義)를 우리 모두가 이루어야할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사명’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디 이 영광스럽고 복된 사명에 올해도 잘 응답하는 우리 교회이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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