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8.6. 주의 변모 축일 / 연중18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오늘은 주의 변모 축일입니다. 전례색은 백색입니다. 예수님이 신성의 빛을 발하시며 영광스러운 본래의 모습으로 변모하신 사건을 기념합니다. 예수님의 변모만이 아니라 빛의 자녀로 부름 받은 우리 자신의 본 모습으로 변화되는 일 역시 소중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에서 이 변모 사건의 목격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똑똑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영광의 주님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자신이 빛의 자녀로 거듭났음을 명확히 알아차린 후, 이 세상에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을 이루는 일에 모두가 쓰임받기를 소망하여 이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또한 스텔라 데이지호 수색에 정부가 적극 나서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5명의 세월호 미수습자들이 가족 품으로 돌아오도록 기도합시다. 故최종식님의 안식을 위해 기도합시다.

본기도

영광의 하느님,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놀라운 변화를 나타내 보이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들이 이 세상의 근심과 불안에서 벗어나,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다니 7:9-10,13-14
  • 시편 – 97
  • 독서 – 2베드 1:16-19
  • 복음서 – 루가 9:28-36

<성공회 기도서>는 교회력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전례 안에서 기억하며 경축한다. 하느님의 구원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났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은 시간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삶에 새로운 기준이다. 이 기준에 따라 교회는 교회력(전례력)을 마련하여 그리스도의 시간을 다시 설정하여 지킨다. 또한 성서와 교회 역사의 성인과 사건을 기념하여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계시를 깨달아 살아간다. – 24 페이지

이에 따라 교회력은 크게 ‘주일’(主日)과 ‘절기’(節氣)로 나뉘고, ‘부활’과 ‘성탄’이라는 두 ‘대축일’(大祝日)을 기준으로 정해집니다. 해마다 날자가 바뀌는 ‘부활주일’을 기준으로 ‘사순절기’와 ‘부활절기’가 정해지고, 12월 25일로 고정된 ‘성탄일’을 기준으로 ‘대림절기’, ‘성탄절기’, ‘공현 후 연중시기’가 정해집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대축일’(大祝日)은 이름에서 보여주듯이 교회력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절기로서 모든 축일과 주일에 우선하여 지킵니다. 성공회 신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지키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성탄일, 공현일, 부활주일, 승천일, 성령강림주일, 삼위일체주일, 모든 성인의 날”이 ‘대축일’입니다. 대축일은 정한 날에 지키며 공현일이나 승천일, 모든 성인의 날 이외에는 다른 날로 옮길 수 없습니다.

‘대축일’ 바로 아래의 중요도를 가지는 축일은 ‘주요축일’이라고 합니다. 주요축일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관련된 축일, 신약성서의 성인들과 초대교회의 중요한 사건들을 기리는 축일, 그리고 대한성공회 관구가 설정한 축일로 구성됩니다. 주요축일에도 지키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거룩한 이름 예수, 주의 세례, 주의 봉헌, 성모 수태고지, 성모 방문, 성 세례요한, 주의 변모, 그리스도의 성체, 왕이신 그리스도, 성모 안식,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들”은 다른 주요축일보다 우선하여 지킵니다. 여기 나열한 주요 축일은 연중주일(連中主日)보다 우선하지만 절기주일에는 이동하고 이동시에는 주일 다음날로 지키지만, “거룩한 이름 예수, 주의 봉헌, 주의 변모 축일”은 모든 주일보다 우선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주의변모 축일’(The Feast of the Transfiguration)은 ‘주요축일’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연중 18주일보다 우선하여 지킵니다. 연중 18주일 해당 성서정과와 본기도가 있지만, 별도로 주의변모 축일 성서정과를 읽고 본기도도 그것으로 바치며 축일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교회는 “주의 세례, 주의 변모, 십자가 수난, 부활, 승천”을 예수님의 ‘5대 공생애 사건’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중에서 ‘주의 변모’는 예수님이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앞에서 신성의 빛을 발하시며 영광스러운 본래의 모습으로 변모하신 사건을 기념합니다.

그 변모의 이유는 첫 번 수난 예고를 듣고 낙심한 제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서입니다. 즉, 영광스러운 부활도 분명히 언급하셨지만, 제자들은 거기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 수난과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고 낙심해 버립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드러날 당신의 위대하신 참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어 그들이 용기를 갖도록 “변모의 표징”을 보여주셨다는 뜻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일상에서 “변모”(變貌)라는 말을 잘 안 씁니다. 오히려 “변화”(變化)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하기에 좀 낯설 수 있습니다. 어째서 변화라는 말이 있는 데도 굳이 ‘변모’라는 말을 고수할까요? ‘변화’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포함합니다. 상대적으로 ‘변모’라는 말은 눈에 보이는 겉모습에 좀 더 초점을 맞춥니다. 이런 의미에서 ‘변용’(變容, transformation)이라는 말로도 바꿔 쓸 수 있겠습니다.

1독서 다니엘서는 예언자 다니엘이 본 환상(幻想)입니다. 그는 영광스러운 심판의 법정과 재판관으로서 조용히 판결을 내리는 유일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봅니다. 그 재판관은 ‘사람의 모습을 한 이’에게 자신의 신적 주권을 맡겨 ‘왕’으로 세웁니다. 주목할 점은 사람의 모습을 한 이가 스스로 주권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주권을 허락받았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대관(戴冠)의 장면 속에서 오늘 복음이야기가 전하는 변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옥좌가 놓이고 태곳적부터 계신 이가 그 위에 앉으셨는데,
옷은 눈같이 희고
머리털은 양털같이 윤이 났다

사람 모습을 한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태곳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나아갔다. 주권과 영화와 나라가 그에게 맡겨지고 인종과 말이 다른 뭇 백성들의 섬김을 받게 되었다. 그의 주권은 스러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갈 것이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하리라.
다니 7:9-14

오늘 시편은 다니엘서와 연결됩니다. 소위 대관식 시(戴冠詩)들 중 하나입니다(참고: 시편 47, 93, 96, 98편). 세상의 ‘창조주’이시고 ‘통치자’이시며 ‘재판장’이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함께 이런 하느님을 찬미하자고 요청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특히 중요한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안개에, 구름에 둘러싸이고, 정의와 공정이 그 옥좌의 바탕이요, 불길이 그를 앞서가며 에워싼 원수들을 살라버린다.
시편 97:2-3

이 구절은 구약 안에서도 특별한 중요성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현현(顯現)에 대한 묘사’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구약에서 하느님의 나타나심의 전형은 ‘시나이 산’에서입니다. 하느님은 그 모습이 결코 뚫을 수 없는 짙은 안개나 구름에 감싸인 분으로 나타나십니다(출애 19:14-20).

우리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을 환히 보여주시지 않는 하느님이 답답합니다. 다른 종교 전통들에서는 신의 형상을 가리고 있는 ‘베일’(veil)을 벗기고(형상을 만듬), 신을 똑똑히 보는 것을 제의(祭儀) 의식의 엄숙한 절정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결코 베일을 벗기려 하지 않습니다. 부정한 인간 누구도 하느님 본질의 신비를 볼 수 없다는 강조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십계명에 기록된 것처럼, 하느님을 형상으로 나타내려는 시도를 극도로 혐오했습니다. 하느님을 나타내는 방법을 오직 율법으로만 대신해 온 이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짙은 안개나 구름처럼 베일에 감싸여 나타나신다는 사실은 ‘조심하라’는 경고입니다. 즉 하느님의 나타나심이 동반하는 경외감을 베일을 통해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베일에 싸인 분으로 나타나신다는 묘사를 읽으며 옷깃을 여미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재발견합니다.

이 구절이 갖는 또 하나의 중요성은 ‘하느님의 진정한 본질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의 ‘창조주’이시고 ‘통치자’이시며 ‘재판장’이십니다. 그 통치의 기초는 ‘정의’와 ‘공정’(공평)입니다. 하느님은 자연 속에서만 현현(顯現)하시는 것이 아닙니다(시편 97:4-5). 하느님은 역사에도 나타나시어 원수들을 살라버리시는 분입니다(시편 97:3). 하느님은 ‘악’(惡)을 미워하시고 ‘의’(義)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은 선한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2독서(사도서) 베드로후서는 오늘 복음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산상에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영예와 영광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목격한 사도 베드로의 증언입니다.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직접 목격한 것임을 힘주어 강조합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 공통으로 전해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느님을 만나기를 희망하면서 그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의 ‘위엄’과 ‘통치’의 동의어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리야 산’으로 가서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 명령하셨습니다(창세 22장).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내려주셨습니다(출애 19-20장). 예언자 엘리야는 ‘가르멜 산’에서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결하여 누가 참 하느님인지를 드러냈습니다(1열왕 18:20-40). 예루살렘 성전은 ‘시온 산’ 위에 세워졌습니다(시편 50:2). 예수님은 ‘해골 산’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마르 15:22). 예수님은 ‘올리브 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루가 24:50-51; 사도 1:12). 오늘날도 하느님과 가까이 접촉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산상에서 하느님의 임재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며 기도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제자들을 이끌어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하느님이 현존해 계신 곳임을 예수님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재밌게도 공관복음서 중에서 루가복음서만 주님의 변모가 ‘기도하시는 동안’ 일어났다고 전합니다. 그만큼 루가복음서 기자는 ‘기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
루가 9:29

그 날, 4사람이 기도하러 갔습니다. 3사람이 잠들어 버린 사이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제자들은 자신들이 따르던 예수님에게서 한 번도 이런 광채를 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난데없이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그들이 모세와 엘리야였다고 공통으로 전해줍니다.

다만 루가복음서만이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의 대화 내용을 ‘명확하게’ 전해 줍니다. 그 대화 내용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수행하시려는 ‘삶의 마지막’, 즉 ‘죽음’입니다. 본문에 ‘죽음’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기본형은 ‘엑소도스’(exodos)입니다. 이 말은 ‘나가기, 탈출, 출입구, 출애굽’의 의미도 갖습니다. 무엇에서의 탈출이고, 무엇으로부터의 출애굽입니까?

그것은 지금 등장하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드러납니다. 우선 모세는 출애굽의 주인공입니다. 또 그는 율법의 대표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아가지고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은 너무 밝아서 이스라엘 백성은 눈을 가려야 했습니다(출애 34:29-35).

엘리야는 예언자의 대표입니다.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예언자입니다. 이 둘이 나타나 예수님과 ‘삶의 마지막’을 이야기 나누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말하려는 바는 모세처럼 예수님이 모든 인류를 ‘죄와 죽음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킬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야처럼 예수님이 이 ‘지상에서 하늘로’ 오르실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루가복음서 기자가 전하는 변모 사건의 의미는 십자가 죽음만이 아니라 이후의 부활과 승천까지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대화가 진행 중인 동안 베드로와 동료들은 선잠을 깹니다. 그들은 깜짝 놀랍니다. 베드로는 어떻게든 의식을 차려보려고 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소리를 칩니다.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 루가 9:33

베드로는 평소처럼 갈팡질팡합니다. 성경은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른 채 말을 내 뱉었다고 전해줍니다(루가 9:33). 다른 말로 하면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그는 그곳에 초막을 지어서 영광스러운 임재를 영원히 누리고 싶어 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경험을 구체화하고 그 경험을 영원히 보존하고 싶어 했습니다. 더 깊은 차원에서 해석하자면, 아래쪽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아마 우리라도 그랬겠지요.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교훈이 이야기 속에 녹아져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초막’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3대 명절인 ‘초막절’을 떠올리게 합니다(출애 34:22; 신명 16:16). 초막절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생활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매년 가을, 수확이 완료 될 때 1주간 지켰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추수 감사절’입니다. 이 초막절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을 새롭게 하는 절기’라는 점입니다.

비록 베드로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지만, 주의 변모 이야기의 의미를 밝혀주는 대단히 중요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눈을 통해 이 ‘주의 변모’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립 된 ‘새 언약의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물론 그 새 언약은 초막이 아니라 ‘골고타 산의 십자가’로 상징됩니다. 그렇기에 루가복음서 기자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셨다고 명백히 밝힌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사이 구름이 일어나 그들을 뒤덮었습니다.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아니, 겁이 났습니다. 베드로는 세 개의 ‘초막’을 만들고 싶었지만 예수님은 굳이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대답은 “안 돼!”였습니다. 구름 속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
루가 9:36

갑자기 사건이 끝나버렸습니다. 구름도 사라지고 모세와 엘리야도 사라졌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제자들과 함께 홀로 남았습니다.

하늘의 음성 뒤에 오로지 예수님만 남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율법이나 예언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의 예비적 존재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자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오신 지금은 그들의 역할이 모두 끝났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주의 변모를 기념하면서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실제로 변화된 사람은 누구인가?”

흔히 우리는 제자들처럼 변모되신 예수님의 모습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복음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더 깊은 진실은 산상에서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눈이 열려서 신성의 빛을 발하고 계신 예수님, 즉 하느님의 아들로 드러나신 진짜 예수님의 모습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 한 후 그들의 삶은 변화되었고 가장 위대한 사도들로 쓰임 받았습니다.

이전에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주목할 만한 선생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에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움직여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시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옷감(교회)으로 짜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이야말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변화된 눈으로 그들은 세상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진정 변화되었습니까? 누구나 느끼는 일이지만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대부분의 방식을 결정합니다. 가령, 아무도 자신이 태어나고 싶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자신이 태어나고 싶은 나라를 정할 수도 없습니다. 또 특정 언어를 쓰는 문화권에 태어나기를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방식)을 결정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일종의 조감도(鳥瞰圖)처럼, 즉 새로운 빛 속에서 새로운 시각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명확한 ‘은총의 순간’을 갖기도 합니다. 사실, 신앙 안에서 ‘변화된 삶, 변화된 시각’을 갖는 일은 하느님의 임재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결과여야 합니다.

오늘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성찬례를 통해 당신과 함께 ‘산’에 오르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새로운 변화의 시각을 갖는 산에 오르자고 불러주십니다. 하느님의 임재는 산에서 체험(발견)되었습니다. 산, 특히 산의 정상은 우리의 시야가 분명해 지는 곳이고, 일상의 모든 소음이 잠잠해지는 곳입니다. 특별히 하느님은 자연 속에 있을 때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가령, 밤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별들, 오묘한 색깔로 서산을 물들이는 노을, 숲속의 고요, 해안으로 밀려드는 파도들… 시인들은 이것들이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라고 노래해 왔습니다.

여러분이 인생길을 걷다 어느 순간 지치거나 외로울 때, 또는 삶에 의문이 들거나 길을 잃어버렸을 때, 이전에 하느님의 임재를 느꼈던 곳,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던 곳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위해 다시 그곳을 방문해 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비록 산이나 자연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 더 쉬울지라도 산이나 자연만이 하느님을 체험할(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아닙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이 성찬례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기(만나기)를 바라면서 ‘교회’라는 산에 왔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마음을 열면 ‘지금 여기’에 임재하신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하게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요한 4:23-24

오늘 복음이야기를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가 경계해야할 유혹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산상에 계속 머물고 싶어 했던 베드로처럼, 우리 역시 어떤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면 그 곳에 계속 머물고픈 유혹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산상은 우리를 시달리게 하는 세상살이 문제로부터 달아나 숨어있을 수 있는 신성한 피난처(장소)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산상에서의 체험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진리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영적 체험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그리스도의 빛으로 눈이 멀게 되었던 사도 바울로처럼 대단한 것이라고 내세우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사도 9:3-8). 그런 황홀한 신앙 체험을 계속 자랑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를 그리스도로 따르는 진정한 신자인가 아닌가의 ‘시험’은 산상에서의 황홀한 체험을 했느냐가 아닙니다. 오히려 산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우리의 ‘연민’과 ‘동정심’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산에서 내려가, 우리가 체험한 하느님의 그 변화시키는 사랑을 세상 속으로 가져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주의변모의 핵심입니다.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서에는 산상에서의 이 체험을 비밀로 하라는 예수님의 함구령이 내려집니다. 루가복음에는 그런 언급조차 없습니다. 다만 루가복음에 보면 예수님 일행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악령에 시달리는 아이를 가진 한 아버지를 만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루가 9:37-38). 아이의 아버지는 자비와 치유를 간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산상에서의 영광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정말 수명이 짧았습니다. 우리도 다시 현실을 살아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주의변모 축일을 기념하는 이유는 사실, ‘초막’이라는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에 대한 헌신(계약, 약속)을 오늘 새롭게 하도록 인도합니다. 그 헌신의 내용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삶의 주인, 구세주로 믿고 따르기로 한 세례의 언약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디에서 그 세례 언약을 지켜내야 하는 것입니까? 어디서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까?

세상 한 가운데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체험할(만날) 수 있는 곳은 어떤 아름다운 장소나 특별한 곳에서만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에게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우리는 온 세상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시편과 관련해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장소는 산상이나 성전이 아닙니다. 주님의 음성은 ‘가난한 사람들의 외침과 억울한 이들의 외침’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주님이 ‘정의와 공정(공평)’을 위한 투쟁 속에 항상 살아 계신 분임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주님께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 변두리 사람들 사이에 살아계신 분임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주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싸우시고 소외된 사람들을 지지하시는 분임을 발견합니다.

그렇습니다. 고아와 과부로 대변되는 가난하고 사회적 약자들이 있는 곳이야말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할(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변화산입니다. 그들의 외침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성소입니다. 우리의 세례 언약이 실천되어져야 할 가장 중요한 대상이자 갱신의 장소입니다.

지구상에 하느님의 사랑이 닿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성령을 향해 마음을 열고 하느님을 찾는다면, 우리는 주변의 모든 곳에서 하느님의 임재를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진정한 변모(변화)는 우리의 눈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변화함에 따라 일어납니다.

우리의 눈이 진정으로 열린다면, 전에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없어 보이던 이들, 즉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이 더 이상 남처럼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것처럼 그들 역시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신 것처럼, 그들을 위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바치신 형제요 자매임을 우리는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주의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이 신성의 빛을 발하시며 영광스러운 본래의 모습으로 변모하신 사건을 기념합니다. 예수님의 변모만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 빛의 자녀로 부름 받은 우리 자신의 본 모습으로 변화되는 일 역시 소중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에서 이 변모 사건의 목격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똑똑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영광의 주님을 체험하기 위해 교회라는 산에 왔습니다. 우리 자신이 세례를 통해 빛의 자녀로 거듭났음을 확인하기 위해 오늘 교우들과 함께 성찬례에 왔습니다. 이 성찬례가 바로 우리의 본질을 드러내주는 변화산이기를 기도합니다.

이 시간 하느님의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키도록 내어 드리십시오. 이 거룩한 산(교회)에서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저 소란스러운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퍼 나르십시오.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일에 우리 자신이 도구로 쓰임받기를 축원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스텔라 데이지호 수색에 정부가 적극 나서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2. 5명의 세월호 미수습자들이 가족 품으로 돌아오도록 기도합시다.
  3. 남북 대화와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기도합시다.
  4. 실직자들과 청년 구직자들, 폭염에 시달리는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5. 이 땅의 교회들이 사회적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6. 오종민(어거스틴) 교우와 모든 군복무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기도합시다.
  7. 故최종식님의 안식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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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2.11. 주의변모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

    […]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전해주지 않습니다(루가복음의 내용을 보시려면 2017. 8. 6. 주의변모(연중 18주일) 축일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다만 우리는 모세와 엘리야가 구약성경에서 갖는 위상을 통해 그들 […]

    2 년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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