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5. 공현대축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새해 첫 주일이자 공현대축일입니다. 새 믿음으로 새해의 첫 주일을 봉헌하는 교우들을 주님께서 어여삐 여기시고 빛나는 얼굴로 올 한해를 인도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세상에 드러난 구원의 입니다. 공현일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인류를 한 가족으로 불러주신 그 큰 사랑이 온 세상에 드러났음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이 은총을 받은 우리도 세상에 평화와 정의를 가져오는 빛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동방박사를 별빛으로 인도하시어 아기 예수를 경배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이 세상 모든 나라를 참 빛으로 인도하시어 온 인류가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60:1-6
  • 시편 – 72:1~7,10~14
  • 2독서 – 에페 3:5-12
  • 복음서 – 마태 2:1-12

공현대축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세상에 드러난 구원의 입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성탄이야기’(마태 1:18~25; 루가 1:26~39)를 찬찬히 비교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아기 예수의 탄생지가 ‘베들레헴’(히브리어로 ‘빵 집’이라는 뜻, 다윗 왕의 고향이자 메시아가 나실 마을로 알려져 있던 곳, 사무상 16:1; 17:12,15; 미가 5:1)이었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세부적인 면에서 많은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구유’나 ‘목동들’에 대한 언급도 《마태오복음》에는 없습니다. 아기 예수의 신분은 《루가복음》처럼 뉘일 곳이 없어서 ‘구유’에 뉘어야 할 만큼 ‘천한 몸’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기 예수의 신분이 ‘귀하신 몸’임을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경배를 통해 《마태오복음》은 들려줍니다. 《루가복음》이 ‘천사’의 인도와 찬미를 통해 성탄의 분위기를 강조한 반면 《마태오복음》은 ‘별’과 ‘꿈’의 인도가 더 도드라집니다. 중요한 것은 이 거룩한 이야기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하여 기록되었다는 진실입니다.

오늘은 ‘성탄대축일’ 후 12일 만에 오는 ‘공현대축일’입니다. 같은 그리스도교에 속하지만 동서방교회의 성탄대축일은 서로 다릅니다(관련 글은 여기를 보십시오). 하지만 ‘공현대축일’을 정하는 기준만큼은 성탄대축일 후 12일 만에 오는 날로 모두 동일합니다. 따라서 서방교회는 오늘이 공현대축일이지만 1월 7일을 성탄대축일로 지키는 동방교회는 1월 19일이 공현대축일입니다. 물론 콘스탄티노플 좌(座) 아래에 있는 동방교회들 중에는 서방교회처럼 ‘그레고리력’을 따라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키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성탄일’이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공현일’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빛’, 즉 공공연하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을 인도하시어 아기 예수님이 신성한 분임을 공공연히 드러내십니다. 흔히 우리는 이 놀라운 경험의 주인공인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무엇을 바쳤는지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공현’(公顯, Epiphany) 이야기를 좀 더 깊이 묵상해 보면 그들이 예물을 바치기에 앞서 하느님께 믿음과 용기와 지혜를 선물 받은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런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참고로 ‘공현’(公顯, Epiphany)은 그리스어 ‘에피파네이아’(ἐπιϕάνεια)를 번역한 말입니다. ‘에피파네이아’(ἐπιϕάνεια)는 ‘접촉’(on)과 뒷말을 ‘강조’(fitting)하는 전치사 ‘에피’(ἐπι)와 ‘밝게 하다’(lighten), ‘빛나다’(shine), ‘보여주다’(show), ‘나타나다’(appear)란 뜻의 동사 ‘파이네인’(φαίνειν)의 합성어입니다. 고대에는 ‘새벽이 옴’(동이 틈), 전쟁 중 ‘적의 ‘출현’, 도시를 방문하여 위세를 과시하는 ‘왕의 출현’, 특히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신들의 영광스런 출현’에 사용하던 말이었습니다. ‘빛’이 있어야 모습을 볼 수 있기에 ‘빛’과 관련되며, “빛 속에서 확실히 눈에 보이게 나타남”(conspicuous appearing, appearance)을 뜻합니다. 교부들은 이 말을 가져다가성육신’과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이제 《마태오복음》 이야기에 집중해 봅니다. 《마태오복음》은 아기 예수의 방문객으로 《루가복음》처럼 ‘천한 신분의 목동들’이 아니라 ‘동방에서 온 박사들’을 등장시킵니다. ‘박사’로 번역한 그리스어 ‘마고스’는 오늘날로 말하면 ‘천문학자’(점성가, 賢者)라는 뜻인데, 문맥에 맞추어 번역하면 ‘구도자들’(求道者)입니다. 교회는 그들이 <구약>에 예언된(이사 2:2~3; 미가 4:1~2) ‘이방 민족들을 대표하는 이들’이라고 말합니다. 언뜻 드는 생각으로도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의 품위에는 ‘박사들’이 더 어울려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도자들’(求道者)이 누군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흔히 오늘 1독서 《이사야》 때문에 그들이 ‘낙타’를 타고 왔을 것으로 상상합니다(이사 60:6). 《마태오복음》은 실제로 그들이 무엇을 타고 왔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마태오는 그 ‘구도자들’(求道者)이 이스라엘 오른쪽인 ‘동방’(the east)에서 왔다고 밝힙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그 ‘동방’이 어디인지 가르쳐주진 않습니다. 지난 번 성지 순례 때 예수님이 탄생하신 동굴 위에 세워진 ‘예수 탄생 기념성당’을 방문했습니다. 현재 베들레헴에 있는 이 ‘예수탄생 기념성당’은 서기 565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때 재건된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서기 614년 ‘페르시아’ 군대가 베들레헴을 점령할 때 ‘예수 탄생 기념성당’은 파괴를 면했습니다. 이유는 성당 안에 그려진 동방박사들이 페르시아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동방’은 ‘페르시아’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더 우세합니다.

어떤 이들은 학살 된 2살 이하의 유아들에서 암시를 얻어 ‘동방’에 대한 흥미로운 주장을 합니다. 헤로데가 2살 이하로 특정했으니 그 정도의 시간이 걸려서 도착할 수 있는 거리라면 ‘고대근동’(古代近東, Ancient Near East, 오늘날의 터키, 이란(고대 페르시아),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집트) 보다 먼 지역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이 특정 하는 곳은 흥미롭게도 ‘고대 신라’(新羅)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삼국시대의 신라’ 말입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 중에는 기원전 722년에 멸망한 북이스라엘의 후예들이 한반도까지 이주하여 정착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과월절 희생양 전통이 동짓날 팥죽을 쑤어먹는 전통과 연결된다고 비교하면서 말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동방’에 대한 상상력이 좀 지나쳤습니다.

페르시아 복장을 한 동방박사들, 발타사르, 멜기오르, 카스파르

<구약>의 예언자들은 유다의 멸망과 포로생활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 예언대로 유다는 멸망했고, 본토에서 추방당하여 ‘바빌론’에서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유배생활 중에도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위로’, 즉 유대 민족을 해방시킬 ‘메시아의 도래’를 선포했습니다. 그 예언대로 바빌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 칙령 때문에 유대인들은 고레스를 ‘메시아’로 고백할 정도로 높이 평가했습니다(이사 44:28~45:8). 하지만 그는 예언자들이 예언한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 칙령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때 그 땅에 남기로 선택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5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유대인들은 ‘고대근동’(古代近東) 각지에 흩어졌습니다. 어느 도시인지 특정할 순 없지만 ‘동방’에서(아마도 페르시아 지역) 온 그 ‘구도자들’(求道者)이 살던 땅에도 ‘흩어진 유대인의 후예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그 ‘구도자들’(求道者)은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고 사람들에게 미래를 대비하게 하는 ‘점성가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특별한 별의 약속’을 유대인들로부터 들어 익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민수 24:17).

그 ‘구도자들’(求道者)은 ‘수십 년 동안’ 하늘을 관측해 왔습니다. 세상에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려주는 ‘징조’를 찾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만큼 그들은 새로운 통찰, 즉 지혜와 진리에 개방적이었고, 그것들을 지속적으로 진지하게 추구해 왔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자료를 탐독했고, 어떤 표징과 경이로움을 찾아 밤하늘을 계속해서 관측해 왔습니다. 이렇게 진지한 구도자로 살아왔기에 그들의 노력은 마침내 빛을 보았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밤하늘을 우러르다 ‘신비한 천문현상’을 목격합니다. 한 사람이 먼저 관측하고서 다른 사람에게 알렸는지, 아니면 모두가 동시에 관측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특별한 신호’로 알아차렸습니다. ‘왕의 탄생’입니다. 자신들이 오래도록 ‘고대’하던 순간입니다. 그들은 무수한 ‘별들’의 축복아래 있던 ‘아브라함’처럼 그 순간에 자신들이 부름 받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어둠 속을 살던 다른 이들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들만은 그 ‘특별한 징조’를 분명히 알아차렸습니다. 그들 사이에 살던 ‘유대인들’과 심지어 ‘유다 땅에 살던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 ‘특별한 사건’을 그들은 알아차렸습니다.

다른 차원에서 그 특별한 알아차림을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진지한 ‘추구’와 ‘탐색’, ‘기다림’ 속에서 그들의 내면이 ‘더 높은 관점’으로 성숙했다는 상징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마침내 그들이 ‘인생의 어두운 밤’ 속에서 ‘하느님의 관점’(빛의 관점)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구도자’(求道者, 도를 추구하는 자)에서 ‘도’(道, 복음)를 획득한 ‘현자’(賢者)와 ‘전도자’(傳道者, 도를 전하는 자)로 바뀌어가는 거룩한 이야기를 마태오는 시작하는 중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실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고대’하며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런 우리는 ‘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보다 ‘더 높은 관점’을 자신의 것으로 성취했습니까? 미움이 아니라 ‘사랑’의 관점을, 다툼이 아니라 ‘용서’의 관점을 성취했습니까? 분열이 아니라 ‘일치’의 관점을, 움켜쥠이 아니라 ‘나눔’의 관점을 성취했습니까? 독불장군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감’을, 닫힌 마음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이웃을 만나는 진정한 ‘평화’의 관점을 성취했습니까? 제가 성직자로 살아가는 동네를 보면, 언제부터인지 마치 ‘듣는 귀’는 없고, ‘열린 입’으로 가르치려드는 사람만 많아져가는 것 같아 불편할 정도입니다. 정말이지 귀가 두 개인 이유를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 구도자들은 길을 떠날 준비를 합니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그럭저럭 살아가는 일에 결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밤하늘에 탄생한 ‘새 별’을 관측했을 때 그들은 그것이 자신들이 끈질기게 추구해 온 일에 대한 ‘신의 계시’라고 확신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기존의 지식과 정보에 만족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도 상황도 달라졌는데 아무런 만족이나 기쁨도 줄 수 없는 옛 가치관을 고집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눈과 귀를 닫고 지금까지 살아 온 안일한 방식(자기 고집)으로 인생길을 계속 걸어가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여행 준비를 마친 그들은 고향과 이웃을 버리고 아브라함처럼 길을 떠났습니다. 자신들이 오래도록 추구해 온 그 한 가지 ‘메시아 진실’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별을 따라가는 여정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그 별’이 가리키는 것을 찾기 위한 특별한 뭔가가 필요했습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것을 그들에게 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사실 ‘믿음’은 아브라함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성격상 언제나 ‘새로운 도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온갖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입니다. 그 여정이 자신을 위협에 빠뜨린다 할지라도 기꺼이 감내하는 도전과 용기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메시아’는 누가 나를 대신해서 찾아 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에도 이 진실에 실패한 헤로데와 그 주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언제나 ‘믿음’(신앙)은 나와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물론 건강한 ‘전례 공동체’는 중요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성경》에 대해, 전례에 대해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갖는 일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신앙’(믿음)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진실을 《성경》은 곳곳에서 들려줍니다. 정말이지 ‘믿음’은 부모의 유산처럼 저절로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에 대해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했는지를 아는 지식과 정보의 차원도 아닙니다. 믿음은 내가 직접 음식을 만드는 일과 같습니다. 냉장고에 음식 재료가 쌓여 있어도 실제로 자신이 그것들을 꺼내고 다듬어서 요리하기까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더욱이 특정 음식에 대한 ‘요리법’[요즘은 레시피(Recipe)라고 더 많이 하지요]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막상 자신이 요리해 보면 많은 차이가 있음을 체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여정은 언제나 나 자신의 인격적인 추구와 만남이어야 합니다. 누구도 ‘나’의 신앙 여정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따르기로 결정하고 그렇게 행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공현’(公顯, Epiphany) 이야기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 하느님이 주신 그 ‘특별한 신호’는 삶의 다른 모든 기쁨과 안전을 뛰어넘는 힘이 있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진지한 추구’와 ‘기대’가 다른 모든 ‘가치’를 줄 세웠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다시 말해 ‘삶의 보물’로 발견하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예수 없이 살아가는 세상의 어떤 기쁨으로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맹세가 담긴 성사가 ‘세례’였습니다. 어쩌면 세상이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사람들은 결코 그리스도를 찾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과 세상의 그 ‘불만족스러운 본질’을 확인 할 때까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찾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서로에게 반복해서 실망하고 세상에 절망한 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 사람에는 ‘나 자신’도 포함된다는 이 진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출발한 그 ‘구도자들’(求道者)은 마침내 머나먼 여정을 거쳐 ‘예루살렘’에 당도합니다. 우리 <성가>에서는 그들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별 따라 왔다”고 노래합니다. 성가야 낭만적이지만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요? 위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성탄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서>에 그 단서가 있습니다. 《루가복음》에 쓰인 ‘아기’(그리스어로는 브레포스)라는 단어는 ‘젖먹이’(baby)를 뜻합니다. 《마태오복음》에 쓰인 ‘아기’(그리스어로는 파이디온)라는 단어는 ‘유아’(child)를 뜻합니다. 이렇게 두 <복음서>에 등장하는 ‘아기’는 명백히 차이가 있습니다. 세월이 흘렀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왕의 탄생을 계시한 그 별의 출현이 있고서 거의 2년여 가 지난 후 ‘예루살렘’(평화의 도시)에 당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7절). 더욱이 이후에 벌어지는 사악한 ‘헤로데’의 ‘학살 명령’에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는 충분한 단서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당도한 그 구도자들은 거기서 ‘별의 주인’을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들은 새로 나신 ‘유대인의 왕’, 즉 ‘메시아’(그리스도)라면 당연히 ‘예루살렘’에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사실 그 왕은 ‘왕 중의 왕’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경건하게’ 새로 나신 별의 주인을 찾아 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루살렘에 당도했을 때 더 이상 ‘그 별’을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분명 그들은 올바른 지역에 들어섰지만 정말 있어야 할 장소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목적지 근처까지 인도한 네비게이션이 갑자기 통신 장애를 일으킨 격입니다. 그 때 그들은 스스로 모든 일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 마태 2:2

우리는 어떻습니까? 현대인들은 점점 ‘관계 맺기’를 ‘힘들어’합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관계 맺기를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약점’이 내보여져서 그것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상처 받게’ 될까봐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불편한 진실’이 내보여져서 결과적으로 ‘외톨이’가 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자신이 겪은 ‘과거의 어떤 사건’에 대한 ‘해석’(믿음, 제한적 신념)이 근본적 원인입니다. 지금은 ‘마음공부’하는 시간이 아니니 그런 이야기는 마음공부 시간에 따로 나누겠습니다. 좋은 의미로 해석하면 현대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짐을 주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요청도 하지 않고 혼자서 인생을 우뚝 설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사람 ‘인’(人) 자(字)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살아가는 모습의 형상입니다.

그 구도자들은 서로를 의지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새로 나신 ‘유대인의 왕’이 ‘헤로데의 왕궁’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헤로데는 유다인이 아닌 ‘에돔’(그리스어로는 이두매)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으로는 어떻습니까? 그들의 방법이 옳았습니까? 그들은 이 탐구에서 만큼은 ‘현명’하지 못했습니다. ‘유다인의 왕’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술렁댔고, 사악한 헤로데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유다를 다스리던 왕 헤로데는 몹시 당황했습니다. 왜 안 그랬겠습니까? 비극의 시작입니다. 그 비극과 관련된 글은 지난주일 설교 또는 2017 성탄절기죄없는 아기들의 순교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서 탐색하던 그들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어째서 구도자들이 그런 식으로 찾아다녔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지혜로 그 거룩한 일들을 다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뒷일은 당신이 책임지시겠다는 듯 이 경건한 ‘구도자들’(추구자들)이 ‘메시아’를 찾을 수 있도록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통해 도와주셨습니다(4~6절). 그 종교인들은 메시아 탄생에 대한 예언과 그 예언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오늘날도 ‘진지한 구도자들’을 인도할 다양한 방법들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을 도와줄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속해 있습니다. 대부 대모, 보증인, 교회의 원로나 사제가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물론 사제 역시 도움을 받아야 할 연약한 존재입니다.

문제는 도움이 필요할 때 스스로가 용기 있게 공동체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그 구도자들처럼 고집부리지 않고 멈추어 서서 어디로 가야할지 물어볼 만큼 현명한가 하는 점입니다. 용기 있게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다 알아서 해주는 공동체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공동체는 결코 ‘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를 살필 뿐입니다. 우리의 인사는 많이 부족합니다. 아프면 남이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아프다고 소리치십시오. 한 사회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가도 결국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제 때에 도움을 받는 사회일 것입니다.

그 구도자들의 질문을 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답변합니다(4~6절). 그 종교인들이 지명한 곳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 구도자들이 떠나기 전 사악한 헤로데는 부탁합니다. 이 점이 헤로데의 가장 큰 실수였습니다. 그는 동방에서 온 박사들(구도자들)이 자신을 대신해 새로 나신 ‘유대인의 왕’을 찾아주기 원했습니다. 찾은 다음 자신에게 알려주면 그때 가서 새로 나신 왕을 경배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나의 ‘메시아’는 누가 나를 대신해서 찾아 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언제나 ‘믿음’(신앙)은 나와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어땠습니까? 그는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별’이 가리키는 것을 직접 찾아 나설 만큼 ‘용기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동방에서 온 구도자들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지혜와 진리를 찾아 ‘몸소’ 먼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들은 마치 ‘아브라함’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그 별이 자신들을 어디로 이끌지, 그 여정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 그들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으리라는 보장마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단지 그 ‘특별한 신호’에 모든 것을 걸고 ‘위대한 도전’, 즉 믿음이라는 존재의 용기를 감행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거룩한 의무’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출발한 그 여정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리스도로 탄생하신 새 왕에 대한 경배였습니다.

그들은 사악한 헤로데의 부탁을 받고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 분명 ‘베들레헴’은 그들이 유대 땅에서 처음부터 ‘기대’했던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그 ‘베들레헴’은 먼 여정에 ‘굶주렸던’ 그들의 ‘영혼’이 ‘배부를’ 수 있는 ‘생명의 빵 집’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때 동방에서 본 그 별이 그들을 앞서” 인도해 갑니다(9절). 그 별이 안 보였다가 다시 보이게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마침내 앞서 가던 그 별이 ‘그 소박한 집’ 위에 멈추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기’(파이디온)가 있는 곳 위에 멈추었습니다(9절). ‘그 집’ 역시 그들이 ‘베들레헴’ 동네에서 기대했던 곳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진리에 목말라’ 하는 그들의 ‘영혼’이 ‘만족’할 수 있는 ‘생수’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집’이란 말을 통해 우리는 그 곳이 이전부터 ‘요셉 소유의 가정집’이라는 ‘인상’(印象)을 받습니다.

그들은 밖에서 ‘집 안’을 둘러봅니다. 안에는 값비싼 살림살이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위대한 왕이 되실 분 앞에 있다는 것을 보여줄 만한 어떤 ‘표지’도 그 집에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분명 눈에 보이는 다른 많은 ‘표지들’은 그들이 잘못된 곳에 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안에서 “어머니와 함께 있는 아기”를 발견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멈추어 선 ‘그 별’만은 ‘그 집’에 그들이 찾아 온 특별한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알리고 있었습니다. ‘생명’으로 가는 진리, ‘생명’을 주는 ‘지혜’가 거기 그렇게 있다고 조요히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하나의 표지’를 하느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유일한 계시로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무시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현자’였습니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의 진리는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지혜는 간결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문제 상황 속에 놓일 때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며 기도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표지’를 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느님은 분명 응답하시고 ‘하나의 표지’를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그 하나의 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기도 응답의 선물’이나 ‘표지’라면 다른 것과 달리 뭔가 더 ‘특별하고’, ‘풍요로워야 한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미 받은 표지’를 버리고 ‘다른 더 많은(복잡한) 표지들’을 요청합니다. 착각입니다.

더욱이 제 경험에 따르면, 우리가 매일 읽어나가는 《성경》의 한 말씀을 통해서, 가족과 식탁에서 나누던 대화를 통해서, 설거지를 하다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 ‘성가’나 ‘복음성가’의 한 소절을 통해서, 드라마 속 한 장면이나 지난 밤 꾸었던 ‘꿈’을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가 고심해 온 일들에 대한 응답으로서 ‘메시지’를 주실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정말이지 특별한 시간, 특별한 장소, 특별한 사람들과의 만남 같은 특별한 방법만이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순간은 아닙니다. 그러니 ‘그 집’ 앞에 서 있는 구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너무나 빈약해 보이는 단지 하나의 표지였습니다. 그 하나의 표지를 통해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알아차린다면 우리도 ‘현자’(賢者)입니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와 함께 있는 아기”를 마주합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그들은 기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11절). “저분이 틀림없이 왕이시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그들은 “어머니와 함께 있는 아기께” 무릎부터 꿇습니다. 아기께 그들 자신을 바칩니다. 정말이지 이 아기는 새로운 시대의 창시자가 될 것입니다. 새로운 왕국의 설립자가 될 것입니다. 그의 탄생에서처럼 그는 십자가에서도 똑같이 왕으로 불릴 것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양부이신 ‘요셉’ 성인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이 좀 이상합니다. 요셉은 어디에 간 것일까요? 오늘날처럼 돈 벌러 일터에 출근했을까요? 다음에 주님께 여쭈어보시기 바랍니다. 어째서 요셉이 부재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이제야 밝히는 바이지만 그들 일행이 3명이었는지 아니면 30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태어나신 왕께 빈손으로 오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온 ‘보물 상자’를 열어 ‘예물들’을 바칩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고대로부터 위대한 인물에게 바치는 예물의 전형입니다(이사 60:6). 그들을 3명이라고 말하는 전통도 이 예물들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심지어 교회사는 그들의 이름도 알려줍니다. 멜기오르, 카스파르, 발타사르입니다. 예전에는 ‘삼왕도래’(三王到來)라 말하면서 그들을 ‘왕’으로 칭송했습니다. 오늘날은 그들을 ‘왕’이라기보다는 ‘천문학’(솔직히 말하면 점성술)에 조예가 깊은 ‘구도자들’(求道者, 賢者)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이들의 행동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천문현상을 관측하던 그들이니 당대로 말하면 그들은 최고의 엘리트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과학을 맹신하는 현대인들을 경고하는 ‘현자들’입니다. 과학이 차지한 그 모든 왕관을 구세주의 발 앞에 어서 내려놓으라고 말입니다. 마침내 그들의 여정은 끝이 났습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래도록 인생의 지혜와 진리를 추구하던 ‘구도자들’(求道者)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하늘을 ‘관측’하다 자신들의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특별한 신호’를 향해 ‘믿음’의 도전을 감행했습니다. 그들은 그 ‘특별한 신호’가 별들의 주관자이신 창조주께서 일으키신 일임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창조주께서 계획하신 그 ‘위대한 사건’을 ‘직접’ 경험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지혜만으로 되지 않을 때 기꺼이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들이 긴 여정 끝에 찾아낸 곳이 자신들의 생각과 달리 평범했어도 그들은 게의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겸손히 그 표지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참으로 믿음과 용기와 지혜를 선물 받은 이들임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오늘 2독서 《에페소서》의 사도 바울로처럼 자신들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을 드러냈습니다(에페 3:3). 이방인이었지만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의 ‘신성’을 드러내는 거룩한 도구들이 되었습니다(에페 3:6). 그렇게 해서 ‘구도자’(求道者)에서 ‘전도자’(傳道者)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그런 믿음과 용기와 지혜를 이미 선물로 주시어 당신께로 이끄셨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치기 전에, 아니 우리 마음을 바치기도 전에 주님이 이미 그 선물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사도 바울로처럼, 주님이 이미 주신 선물로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신 구세주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구도자’(求道者)였던 그대는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도자’(傳道者)로 파송되었습니다.

댓글 남기기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