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9. 성탄1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성탄 1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임마누엘, 우리의 고난에 실천적으로 연대하심으로 구원을 성취하신 하느님’입니다. 다사다난했던 2019년 한해를 마감하는 주일입니다. 올해도 우리나라와 민족을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신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에 감사를 바쳐 올립시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이 땅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들풀처럼 피어나며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떠오르기를 기도합시다. 아울러 고난 속에 있는 교우들의 삶이 평화를 되찾으며, 새해에는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아 있는 자리마다에서 평화를 가져오는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주 하느님, 인간을 주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으며, 죄에 빠진 인간을 주님의 은총으로 회복시켜주시나이다. 비오니, 성자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거룩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63:7-9
  • 시편 – 148
  • 2독서 – 히브 2:10-18
  • 복음서 – 마태 2:13-23

성탄 1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임마누엘, 우리의 고난에 실천적으로 연대하심으로 구원을 성취하신 하느님’입니다.

곁에 놓고 사유를 따라가 보는 책 중에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있습니다. 오늘 전례독서들을 묵상하면서 말씀 나눔에 빛을 비추는 것 같은 명문들이 있어서 나눕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라공의 시구를 좋아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 함께 맞는 비(244쪽)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 관계의 최고형태(313쪽)

어느덧 선생님의 4주기를 몇 걸음 앞두고 있습니다. 누군가 선생님이 어떤 분이셨느냐고 물으면 저는 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영성가’였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지만 최근 극우 정치성향을 가진 분들이 선생님을 모독하는 말들을 퍼뜨린다고 합니다. 그런 헛소리들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아직 사람이 덜 된 저는 속에서 불이 납니다. 거기다 성공회대학교는 물론 ‘성공회’까지 ‘좌빨의 교회’라는 입에 담지도 못할 모욕을 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성공회는 도대체 어느 성공회인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은 저 뿐 아니라 많은 성직자들의 좋은 선생님이셨습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다시금 마음을 다잡습니다. 자신을 가둔 미움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사람들과 ‘연대’(連帶, solidarity)하며, 마지막 촛불까지 ‘삶’과 ‘관계’와 ‘희망’을 향해 불태우신 선생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서울대성당에 근무할 때 선생님이 보내주신 격려의 편지입니다.

1독서는 ‘하느님의 한결같은 구원의 역사’를 찬미하는 《이사야》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바빌론에서 귀양살이 하던 유다 백성을 대신하여 ‘이사야’ 예언자가 ‘구원’을 ‘탄원’하는 시(詩 )형식의 ‘중보기도’(이사 63:7~64:11)의 첫머리입니다.

기원전 6세기말 바빌론 제국은 ‘남왕국 유다’를 무너뜨렸습니다. 수많은 유다 백성과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그 때 포로로 끌려와 ‘같이 고난을 겪던’ 사람들 중에 이름 없는 예언자, 즉 훗날 ‘제 2이사야’(40~55장)라 불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조롱’과 ‘멸시’, ‘천대’와 ‘노역’(勞役)에 시달리며 귀양살이하는 자기 민족의 고통스런 처지 때문에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그만큼 그는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하듯이 자기 민족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당하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고통의 속성’을 잘 기억해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탄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틈나는 대로 동족들을 위로하며 자유를 향한 ‘희망의 불씨’를 지피도록 격려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시’(詩)를 잘 짓는 재능이 있었습니다. 한 옛날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며 ‘노역’(勞役)에 시달리던 이집트의 ‘선조들’을 회상했습니다. 그들을 해방하신 구원자 하느님을 기리는 ‘시 형식의 기도’(이사 63:7~64:11)를 지어 퍼뜨렸습니다. 고난의 터널을 살아가는 동족들이 이 ‘노래’(탄원)를 바치며 하느님께 불순종했던 과거를 회개하기를 기대했습니다. 하느님은 진실로 회개하는 이들을 그냥 보아두시지 못하는 자비하신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문은 바빌론에서 종살이 하던 시절, 즉 아직 ‘포로귀환’과 ‘성전재건’이 있기 전 지어진 시(詩) 형식의 ‘중보기도’입니다. 따라서 앞장들보다 훨씬 오래 전에 선포된 예언입니다.

흥미로운 점이 발견됩니다. 본문이 제 2이사야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제 3이사야(56~66장)라 불리는 단락에 속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제 2이사야의 제자 그룹에 속하는 또 다른 예언자, 즉 귀양살이에서 돌아 온 제 3이사야(56~66장)라 불리는 ‘사람’(집단)이 포로기 때의 ‘예언’(기도)들을 한 데 모아서 《이사야》 예언서에 편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욱이 성전재건 후에는 본문의 ‘중보기도’는 성전제사에서도 불렸을 것입니다. 사실 본문은 형식면에서도 《시편》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함께 고난의 터널 한 가운데를 지나던’ 동족들을 위로하며 자유를 향한 희망의 불씨를 지피던 제 2이사야 관점에서 본문을 묵상하면 더 깊은 ‘통찰’(洞察)을 얻을 것입니다.

제 2이사야는 ‘조롱’과 ‘멸시’, ‘천대’와 ‘노역’(勞役)에 시달리는 민족의 비참한 처지를 보고 ‘사명감’(使命感)에 불타오릅니다. 어떤 사명감입니까? 비록 귀양살이 중이지만 여전히 자신들이 ‘하느님의 선민’이라는 ‘희망’을 갖게 하는 ‘사명’(使命)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을 회상하며 ‘중보기도’(이사 63:7~64:11)를 바칩니다. 본문은 그 첫머리입니다. 1독서로 전체를 다 낭독하지는 않았지만 구구절절이 하느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의 증거를 상기시키고, ‘구원’을 간청합니다.

우선 제 2이사야는 하느님이 그들 역사에서 얼마나 ‘사랑’과 ‘자비’가 풍성한 분이었는지를 찬미합니다(7절). 자신들이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임을 상기시킵니다(8절). 이스라엘을 온갖 곤경에서 구해주신 하느님을 회상합니다. 하느님은 누구를 대신 보내시지 않고 고난 속에 있는 그들에게 ‘친히’ 오셨습니다(9절). 친히 오셨다는 말씀은 그들과 ‘고난의 자리를 같이하셨다’, ‘연대(連帶, solidarity)하셨다’는 뜻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 고난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영광’이 아니라 ‘고난의 임마누엘’을 고백합니다. 세상에! 전능하신 ‘신’(神)이 자기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으시다니요!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위에서 말씀 드린 ‘고통의 속성’을 기억하십시오. 가장 큰 고통은 내가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당하는 고통입니다. 하느님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민족인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통이 가장 고통스러우셨기에 친히 그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하자면 ‘입장의 동일함’으로 ‘관계의 최고 형태’를 보여주셨습니다.

분명 제 2이사야는 그런 눈을 가진 그 시대의 탁월한 ‘영성가’였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친히 오시어 그들과 함께 고난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구해주시곤 하셨습니다. “기나긴 세월 하루같이 그들을 쳐들어 안아주셨다”고 노래합니다(9절).

그렇습니다.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은 큰 제국의 위협에 시달리며 무수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세계지도를 펼쳐서 비옥한 초승달지대 끝에 위치한 고대근동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한번 찾아보십시오. 세계사에서 그렇게 많은 고난을 겪고, 심지어 나라가 멸망하여 유배로 끌려가기까지 한 민족이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현존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그것은 고난을 겪는 그들 사이에 여전히 하느님께서 고난을 겪으며 현존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비록 그들이 유배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민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들 사이에 여전히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확신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정말이지 하느님은 고난을 겪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주도권을 쥐고 번번이 그들 역사에 ‘개입’하셨습니다. 멀찍이 떨어져 계시지 않고 ‘사랑 때문에’ 그들의 고난의 자리에 동참하셨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연대’하시기까지 하면서 사랑과 은총으로 관계하시는 하느님을 반복해서 거역하고,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기를 기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반복해서 하느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대적’(원수)이 되시어 친히 싸우실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가 예루살렘의 멸망이었고, 바빌론의 포로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포로기 유배생활 중, 고난 중)이라도 돌이킨다면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밖으로 펼쳐진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은 인간들처럼 순간의 감정에 따라 닫히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회개는 항상 희망의 시작이고, 진실로 희망하는 자는 겸손히 회개합니다. 아니 참으로 사랑하는 이만이 회개할 수 있습니다.

1독서 《이사야》가 그리스도인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고난 속에 있는 이스라엘은 인류를 대변합니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나 불순종하고 반역하며 하느님과 원수가 된 인류 말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내치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너무도 친절하시고, 자비와 선함이 끝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제 2이사야는 바로 그런 사랑의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당신의 백성이 겪는 고난의 삶에 ‘동참’하시고, ‘연대’하시어 ‘같이’ 고난을 받으시기까지 할 정도로 사랑과 은총으로 관계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비록 그 고난이 그들의 죄악의 결과였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루가 1:79) 인류에게 친히 ‘참 빛’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비록 인류가 하느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하는 원수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은 ‘최고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2독서 말씀처럼 ‘죄로 고통’당하는 인류를 ‘대속’하시기 위해 하느님은 친히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형상을 훼손하고,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인류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러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연대’(連帶)하셨습니다.

놀랍게도 하느님은 단지 인간의 삶만을 경험하신 것이 아니라 죽음마저도 경험하심으로 인간 전체를 온전히 경험하셨습니다. 그 죽음은 인간을 하느님과 원수되도록 유혹했던 ‘악마’를 멸망시켰습니다. 이렇게 사랑과 자비로 인간 전체를 경험하시고, 연대하시며, 십자가 고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랑의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라 고백합니다. 이 세상에 성육신하시어 고난 속에 있는 이들의 처지에 ‘동참’하시고 친히 ‘고난을 겪으심’(연대)으로 연약한 우리를 구원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라 선포합니다. 이것이 성탄 1주일에 본문을 배정한 이유입니다.

 

《시편》은 ‘하느님을 찬양하라고 모든 피조물을 불러내는’ <148편>입니다. 흔히 《시편》의 마지막 다섯 편(146~150편)은 ‘대송영’(the Great Doxology)이라 불립니다. 이유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용기를 북돋는 ‘할렐루야’(야훼를 찬미하라)로 시작하고 끝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1~150편>은 여러 세기에 걸친 ‘인생살이의 다양한 면들을 공동체의 기도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기쁨, 애가(哀歌), 감사, 희망, 탄원, 확신, 회상, 지혜, 왕의 통치 등 그 상황도 다양합니다. 따라서 《시편》의 히브리어 제목인 ‘테힐림’(Tehillim, 찬가)이라 부르기에 어색한 시(詩)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다섯 편은 그 제목에 가장 잘 어울립니다.

오늘 성시로 노래한 <148편>에는 성경시대 고대인들의 ‘우주관’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의 우리와는 사뭇 다른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창세 1:1~2:4a; 욥기 38:1~6). 물론 《성경》에는 오늘의 과학적 사실과 일치하는 우주관이 등장하기도 합니다(욥기 26:7). 그러나 성경시대 대다수 우주관은 오늘의 과학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단지 신앙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오늘의 과학적 사실을 무시하고 그런 고대인들의 우주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신앙은 위험합니다.

더욱이 성경은 우주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려고 기록된 과학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시대의 우주관을 대할 때 신학적으로 잘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표현들은 하느님이 ‘창조주’이시고, 어느 곳에나 계시며(예레 23:24), 우주의 모든 것은 피조물이고, 하느님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질서를 부여’하여 존재하게 하셨다고 알아들으면 가장 무난합니다(시편 148:6).

 

 

그러면 구체적으로 고대인들의 우주관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세상(우주)이 ‘하늘’, ‘땅’, ‘바다’, ‘땅 아래’로 이루어졌다고 믿었습니다. 우선 ‘하늘’(히브리어로 ‘솨마임’이라 합니다)은 땅과 바다 위에 ‘반구형’으로 펼쳐져 있고(창세 1:6~8. 잠언 8:27), 여러 층의 ‘하늘들’로 되어 있습니다(1열왕 8:27; 2고린 12:2~4). ‘맨 위’의 하늘에는 하느님이 거하시는 ‘궁전’이 있습니다(시편 113:5; 이사 6:1; 57:15). 그 아래에는 ‘많은 물’을 머금고 있는 ‘하늘 바다’가 있습니다(창세 1:6~8; 욥기 38:37a; 시편 65:9). 이 ‘하늘 바다’에 세운 ‘기둥’ 위에 하느님이 거하시는 ‘하늘 궁전’이 있습니다(신명 26:15; 시편 11:4; 29:10; 104:2~3). 당연히 ‘하늘 바다’에서 ‘비구름’(눈과 우박)과 ‘바람’이 생겨 ‘하늘의 창’(수문)을 통해 땅에 내립니다.(창세 7:11~12, 8:2, 2열왕 7:2,19; 욥기 38:22; 시편 135:7; 이사 24:18, 예레 10:13; 말라 3:10).

‘하늘 바다’ 아래에는 ‘얇은 금속판 같은 편평한 하늘’(창공, 궁창)이 있습니다. 이 ‘편평한 하늘’(창공, 궁창, 히브리어로 ‘라키아’라고 합니다)이 ‘하늘 바다’의 많은 물과 눈과 우박을 ‘창고’처럼 보관하며(욥기 38:22) 해, 달, 별들도 거기에 매달려 있습니다(창세 1:6~8; 시편 8:3; 19:2). 땅에서 보았을 때 ‘천정’ 역할을 하는 것이 ‘편평한 하늘’인데, 이 하늘도 높은 산 같은 기둥으로 지탱됩니다(욥기 26:11).

하늘이 이렇게 반구형인데 반해 식물과 인간과 숨 쉬는 모든 것들이 살아가는 ‘땅’은 편평합니다(이사 42:5; 44:24). 더욱이 땅은 바다 위에 ‘기둥’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1사무 2:8; 욥기 9:6; 38:1~6; 시편 24:2; 75:3; 104:5; 136:6). ‘땅 아래’에도 물을 저장해 놓은 창고가 있습니다(창세 7:11; 신명 33:13). 죽은 자들이 가는 ‘스올’도 땅 아래 기둥 사이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고대인들의 우주관은 초월적이고 거룩하신 창조주와 물질적이고 부정한 피조물 사이를 중재하는 중간존재, 즉 천사들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상정(想定)하게 만들었습니다(2절). 그래서 고대인들은 가장 높은 ‘하늘 궁전’의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천군 천사들’이 지상에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심부름)하거나 거룩하신 하느님의 명령으로 전투를 수행하러 내려온다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 아래 ‘허공’ 같은 특정 영역을 악마와 그 세력들이 차지하고서 하느님과 사람들을 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에페 2:2; 6:12).

《성경》에 기록된 고대인들의 우주관은 여전히 우리시대의 신앙언어와 전례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특히 중간존재인 ‘천사들’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더 이상 문자적으로 보지 말고 은유적으로 볼 것을 주문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인 천사와 천군들은 있는 것일까요? 없는 것일까요? 그들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대답은 각자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심부름꾼인 천사들과 우리를 위해 거룩한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천군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시인은 모든 피조물과 민족들을 하느님께 찬양을 바치도록 차례로 불러냅니다(3~4,7~12절). 그들을 어디로 ‘소환’(召喚)할까요? 우주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우주의 중심’이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믿었습니다. 바로 그 성전에서 “그 이름 홀로 한없이 높으시고, 그 위엄 땅 하늘에 가득하신 하느님”을 찬양하자고 모든 백성을 소환합니다(13절).

 

그러면 하늘, 땅, 바다, 즉 우주 안의 모든 피조물들이 거룩하신 하느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고난에 ‘동참’하시고, ‘연대’(連帶)하시는 하느님께서 사실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5절). 고난을 겪는 이스라엘에게 친히 찾아오신 하느님께서 사실은 천지 만물을 보존하시는 ‘보호자’이시기 때문입니다(6절). 창조주와 보호자로 고백되는 바로 이 구절이 오늘 2독서와 연결됩니다. 하지만 <148편>은 단지 이스라엘만을 ‘선민’으로 보는 관점입니다(14절). 아직 세계 만민이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 된다는 ‘보편주의’(universalism)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민족으로까지 구원이 확장됨을 예언하는 구약 신학의 최고봉 중의 하나인 ‘보편주의’는 보다 후대에 나타날 것입니다(이사 2:2~4; 11:6~9; 19:19~25; 56:1~7; 66:18~21). 우리는 ‘성육신’하시고, 인간의 고난에 ‘연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보편주의’를 실현하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2독서는 구원의 보편성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히브리서》입니다. 특히 오늘 《시편》과 연결하여 하느님께 찬미를 바쳐야할 이유가 명백해집니다. 하느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만물은 하느님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10절a).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는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주시어 우리의 삶에 ‘연대’하게 하시고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10절b).

엄밀히 말해서 오늘 2독서로 낭독한 《히브리서》서는 편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구약성서>를 폭넓게 인용하여 해석한 알려지지 않은 초대교회 지도자의 ‘신학적 논문’입니다. 당시 교회 안에는 박해를 못 견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의심하고 다시 예전의 유대교로 돌아가고픈 ‘유혹’을 느끼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전통에 기대어 답변합니다. 어째서 ‘옛 계약의 유대교’가 아니라 ‘새 계약의 그리스도교’여야 하는지 <구약성서>를 인용하여 신학적으로 서술합니다.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고난의 이유’에 대한 신학적 해석입니다. 어째서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시어 인간의 삶을 경험하시고 ‘연대’하셨는지를 대답합니다. 그것은 ‘천사들’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을 위해서’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구원, 즉 당신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외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성육신’하시고 인간의 삶에 ‘연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완전한 ‘희생제물’로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 그 십자가 수난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이렇게 ‘고난’과 ‘죽음’은 예수께서 참으로 ‘성육신’하시어 인간의 삶에 ‘연대’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고난’과 ‘죽음’은 하느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거룩한 ‘사명의 성취’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성서>의 원래 문맥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인용하여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설득합니다. 이런 인용과 해석은 복음이야기 《마태오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이 같은 성서인용은 초대교회가 널린 사용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종국에는 이런 인용을 통해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제사법에 따른 ‘위대한 대사제’이시며, ‘대속 제물’이라는 주요 주제를 펼쳐나갈 준비를 합니다. 이 주요 주제를 알아들어야 할 최종 수신자는 우리 자신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성가정의 이집트 피신, 베들레헴 일대의 무고한 아이들에 대한 헤로데의 학살, 성가족의 이집트 탈출과 나자렛으로 귀환을 들려주는 《마태오복음》입니다. 마태오는 연이어 일어난 이 사건들이 ‘구약 예언의 성취’였다고 설명합니다(15, 18, 23절). 어떤 예언의 성취냐면 그가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인 ‘메시아’ 예언입니다. 다시 말해 마태오는 그리스도(메시아)께서 왔다고 확고히 믿은 독실한 유대인의 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얽힌 사건을 해석했습니다. 다른 전례독서들과 연결해서 살피면, ‘인성’(성육신)을 취하신 우리 ‘구원의 창시자’께서 유아 시절부터 ‘고난의 삶’을 겪으심으로 우리와 ‘연대’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듣기에는 어떻습니까? ‘메시아 예언의 성취’라는 마태오의 이런 주장에 순순히 동의할 수 있습니까? 제 경우는 아닙니다. 좀 더 세밀히 살피면 각각의 사건과 마태오가 메시아 예언의 성취로 인용한 구약 말씀들 사이의 ‘맥락’이 어딘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그 구약 말씀들은 ‘메시아 예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십자가에 수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는 구약의 대표적인 메시아 예언은 《이사야》에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 이사 53:2~6

그러나 마태오가 성취된 것으로 첫 번째로 인용한 《호세아》 예언자의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15절)는 어떻습니까? 이 예언의 말씀(호세 11:1)이 위치한 문맥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들립니다. 사실 그 말씀은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내 아들)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져갔을 뿐 아니라 바알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고 향을 피워 올렸다고 책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호세 11:2).

또 마태오가 성취된 것으로 두 번째로 인용한 《예레미야》 예언자의 “자식 잃고 우는 ‘라헬’”(18절)은 어떻습니까? 이 예언의 말씀(예레 31:15)이 위치한 문맥도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들립니다. 사실 그 말씀은 ‘베들레헴’이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빌론까지 포로로 데려가기 위한 집결지로 이용되었던 귀양살이에 대한 언급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마태오가 구약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인용한 “그를 나자렛 사람이라 부르리라”(23절)는 어떻습니까? 실망스러우실지 모르지만 <구약성경> 어디에도 그런 예언의 말씀은 없습니다. 이렇게 마태오는 ‘연이어 일어난 사건들’이 구약에 기록된 메시아 예언의 성취였다고 설명(15, 18, 23절)하지만 뭔가 치밀하지 못합니다.

어째서 마태오는 이토록 허술해 보이는 인용을 했을까요? 정말로 독자들이 <구약성경>을 찾아서 읽어보리라 예상하지 않아서일까요? 그 정도로도 예수님 탄생을 둘러싸고 제기될 수 있는 여러 질문들에 능히 대답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일까요? 실제로 오늘 복음이야기를 읽다 보면 많은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어째서 하느님은 성가정을 헤로데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면서도 정작 베들레헴의 무고한 아이들은 죽게 하셨을까요? 그들 모두의 부모들의 꿈에 알려주실 수는 없으셨을까요? 차라리 동방박사들이 경배하러 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사악한 헤로데를 좀 더 일찍 죽게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전능하신 하느님이신데 그 정도는 하실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정말이지 별의 별 생각들이 떠오르는 유아학살입니다.

경배하러 온 박사들이 물러간 뒤에 요셉은 ‘꿈’에 또 다시 인도를 받습니다. 《마태오복음》에는 총 ‘다섯 번’의 꿈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기 예수님 탄생 전 한 번, 본문에 세 번, 나머지 한 번은 빌라도의 아내가 꾼 꿈 이야기입니다. 사실 마태오는 ‘다섯’이라는 단위를 의도적으로 자신의 <복음서>에 자주 사용합니다. 족보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여인들, 성탄 이야기에 등장하는 다섯 번의 구약 인용문, 다섯 번의 꿈 이야기, 다섯 번의 구약 예언의 성취, 다섯 번에 걸친 ‘메시아’ 단어의 사용입니다.

요셉은 꿈에 주의 천사로부터 이집트로 피신하라는 인도를 받습니다. 이 꿈의 인도가 예언의 성취임을 마태오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누구도 <구약>의 그 말씀(호세 11:1)이 ‘메시아 예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자렛으로 가라는 꿈의 인도는 어떻습니까? 마태오는 예수께서 나자렛에 사시게 된 경위도 <구약> 예언의 성취라고 설명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구약>에 그런 예언은 없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성서학자들은 마태오의 설명이 너무 인위적이고 허술하다고 결론내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보다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합니다. 어째서 마태오가 이렇게 허술하게 보이는 인용을 했는지 말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마태오가 <구약>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인용한 말씀들에는 분명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15절)하신 《호세아》 예언자 말씀을 보십시오. 어떤 문맥과 상황입니까?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배신하고 ‘바알숭배’에 빠진 것을 책망하며 돌아올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를 과거의 위대한 사건을 통해 상기시킵니다. 바로 ‘출애굽’입니다.

여기서 ‘내 아들’은 세계 최대 강대국인 이집트 파라오 밑에서 ‘종살이’하며 고생하던 ‘야곱의 후예들’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 권력’이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곳의 상징이 이집트입니다. ‘고난’이라는 ‘죽음의 그늘’이 하느님 백성을 휘감은 곳이 ‘이집트’입니다. ‘우상숭배의 죄악’이 하느님의 백성을 유혹하던 곳이 ‘이집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더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이집트는 ‘하느님께서 고난 받는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계신 곳’, ‘그들과 연대(連帶, solidarity)하신 곳’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정하신 때가 이르자 광야에 있던 ‘모세’를 불타는 ‘가시나무 떨기’ 속에서 부르셨습니다. 그에게 ‘사명’(使命)을 주시어 죽음의 세상 이집트로 보내셨습니다. 모세를 통해 ‘고난’ 속에 있던 당신의 백성들을 ‘해방’시키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자식 잃고 우는 ‘라헬’”(18절)은 어떤 문맥과 상황입니까? ‘바빌론 유배’(流配)입니다. 출애굽 이후 수백 년이 지난 상황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절 통일왕조였던 이스라엘은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사후 왕국은 둘로 갈라졌습니다. 하느님을 배신하고 악행을 저지른 왕들과 귀족들 때문에 이스라엘과 유다는 차례로 ‘귀양살이’를 가야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 ‘추방’하셨습니다.

그들은 ‘바빌론 유배지’(流配地)에서 이집트에서 종살이했던 선조들처럼 ‘조롱’과 ‘멸시’, ‘천대’와 ‘노역’에 시달리며 ‘고난’을 겪었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 권력으로부터 ‘억압’을 당해야 했습니다. ‘바빌론 귀양살이’는 그야말로 ‘고난’이라는 ‘죽음의 그림자’만이 그들의 동반자였던 곳입니다. ‘우상숭배의 죄악’이 하느님의 백성을 둘러싸고 있는 곳이 ‘바빌론 유배지’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더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바빌론 유배지’는 ‘하느님께서 고난 받는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계신 곳’, ‘그들과 연대(連帶, solidarity)하신 곳’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정하신 때가 이르자 ‘페르시아’의 ‘고레스’를 통해 ‘고난’ 속에 있던 당신의 백성들을 ‘해방’시키시고, ‘안식의 땅’으로 ‘귀향’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를 나자렛 사람이라 부르리라”(23절)는 어떤 문맥과 상황입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알 수 없습니다. <구약> 어디에도 그런 예언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구약>에는 ‘나자렛’이라는 지명(地名)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서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 이론을 주장합니다. 하나는 ‘봉헌된 자’라는 뜻인 히브리어 ‘나지르’(나지르인)에서 왔다는 주장입니다(판관 13:5, 민수 6장). 다른 하나는 《이사야》 말씀처럼 ‘햇순’(가지, 메시아의 상징)을 뜻하는 히브리어 ‘내체르’에서 왔다는 주장입니다(이사 11:1). 둘 다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나자렛’은 이런 주장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차라리 ‘나타나엘의 말’을 참고하는 것이 마태오가 그 말씀을 인용해 표현하고자 했던 문맥과 상황을 파악하는 데 유익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된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찾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 분을 만났소. 그분은 요셉의 아들 예수인데 나자렛 사람이오. – 요한 1:45

그러자 나타나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 요한 1:46a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나자렛’은 근처의 로마식 도시 ‘가파르나움’(나중에 이곳은 예수님의 제 2의 고향이기도 합니다)과 비교할 때 ‘하찮은(버림받은) 곳’이었습니다. 그 동네는 ‘가파르나움’ 뿐 아니라 ‘가나’(나타나엘이 이 마을 출신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던 ‘고난의 동네’입니다. 세상의 권력으로부터 ‘억압’을 당하는 곳이었습니다. ‘멸시’와 ‘천대’로 인한 죽음만이 하느님 백성의 변함없는 동반자였던 곳입니다. 우상숭배의 도시 가파르나움이 하느님의 백성을 둘러싸고 있는 곳의 상징이 ‘나자렛’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나자렛은 ‘하느님께서 고난 받는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계신 곳’, ‘그들과 연대(連帶, solidarity)하신 곳’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하찮은(버림받은) 동네 나자렛’ 출신이셨습니다. 하느님은 정하신 때에 ‘성령’을 가득히 부어 ‘메시아’(그리스도)를 그 ‘하찮은’(버림받은) 동네에서 불러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마침내 이루어진 오랜 ‘예언의 성취’입니다. 바로 여기에 마태오가 인용한 그 말씀의 문맥과 상황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처럼(이사 53:2~6), 예수 그리스도는 당대의 권력가들(정치, 종교)로부터 ‘거부’를 당하셨고, ‘멸시’를 받으셨으며, ‘존중’받지 못하셨습니다. 심지어 ‘메시아’는 자기 고향인 나자렛 사람들로부터도 ‘거부’당하셨고 ‘하찮게’ 여겨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가깝다고 여긴 사람들로부터도 ‘거부’와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고난 받는’ 하찮은(버림받은, 무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을(루가 1:79) 살면서도 당신을 ‘참 빛’으로,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고백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언젠가 하느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다시 오시어 ‘오늘의 고난’을 참고 견디는 가련한 우리를 ‘영원한 하느님 나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그것이 마태오가 “그를 나자렛 사람이라 부르리라”(23절)는 말씀에 담고자 했던 문맥과 상황입니다.

그러니 제 말씀을 마음에 새겨두십시오. 내가 겪는 ‘고난’이 너무나 힘겨워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을 때 기억하십시오. 인간적 견지에서 보자면 어느 누구도 그분만큼 불행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을 예수님 또한 겪으셨습니다. 《루가복음》과 《마태오복음》의 성탄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예수님은 성모의 ‘태중’에 계실 때부터 ‘고난 받는 종’이셨습니다. 비록 어머니의 친척 ‘엘리사벳’으로부터 찬미를 받으셨고, 양부인 ‘요셉’이 고통스럽던 번민의 밤을 지나 하느님의 뜻에 따르기로 ‘믿음의 순종’을 감행했어도 말입니다. 그러니 혹시 자신의 출생의 비밀로 가슴아파하는 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탄생’을 앞두고는 어땠습니까? 성가정은 베들레헴에 도착하지만 그곳에 살던 요셉의 일가친척들로부터 거절당했습니다. 그것이 ‘여관’으로 향해야 했던 이유였습니다. 비통한 성모의 심정이 느껴지십니까? 심지어 성가정(예수님)은 그 흔한 여관에서도 ‘방’(가족용 객실)을 구하지 못하고 거절당했습니다. 완전한 ‘타자’(他者, the other)로 취급받는 절망적 상황입니다. 성가정은 동굴에 있는 ‘마굿간’으로 향했고 산통 끝에 구세주를 낳아 누인 곳은 마소의 밥통인 ‘구유’였습니다. ‘구유’는 예수님이 낮고 천한 곳에 ‘생명의 양식’으로 오셨다는 상징 외에도 인간들로부터 ‘타자’(他者)로 거절당했다(사람 취급받지 못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요한 1:11)라고 기록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고난 받는 종’이셨습니다.

더욱이 예수께서 태어나신 후 ‘베들레헴’에서 시작된 일은 또 어떻습니까? 성가정은 헤로데의 박해로 급히 ‘이집트’로 피신하여야 했습니다. 종살이의 설움을 몸소 겪도록 하느님께서 내리신 처분이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성가정은 ‘난민’의 설움을 몸소 겪어야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난민의 삶은 ‘멸시’와 ‘천대’, ‘고난’ 그 자체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당신 때문에 두 살 이하의 ‘무고한 유아들’이 ‘국가권력’으로부터 무참히 ‘살해’당하는 ‘마음의 빚’까지 있으셨습니다. 물론 성서학자들은 이 일의 ‘역사성’을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헤로데의 권한 밖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태오가 예수님의 생애를 《출애굽기》의 모세와 연결시킨 것이라 해석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런 역사성과 사실 여부보다 ‘마태오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해석하는 관점에 주목’합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하시기 전에 무고한 유아들이 자신을 대신해 죽어가는 참상을 몸소 겪으셨다고 기록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기록했을까요? 이 소식을 성가정이 듣게 되었을 때 어떤 감정이 마음에 자리하게 되었을까요? 혹 ‘죄책감’이 자리하게 되었을까요? 이해가 안 간다면 세월호 참사 생존자들의 ‘트라우마’를 떠올려보십시오.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는 어떻습니까? 머리 둘 곳조차 없이 떠돌아 다녀야했습니다. 이해와 공감보다는 오해와 미움, 누명과 모욕, 핍박과 조롱의 연속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일보다 ‘나자렛 출신’이라는 ‘출신지’를 문제 삼곤 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과 어울리는 과정에서 ‘먹보’에 ‘술꾼’이라는 ‘모욕’을 받으셨습니다. 고향인 나자렛을 방문하셨을 때는 ‘건축노동자’(목수)라는 자신의 ‘출신 성분’ 때문에 ‘거부’당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옳은 일을 위해 살더라도 사회적 힘을 갖지 못하면 공감 받지 못하고, ‘타자’(他者)로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을 몸소 겪으신 일이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도 ‘배신’당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위한다는 예루살렘 성전체제 기득권자들로부터는 ‘반역자’란 누명을 쓰고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인간적 견지에서 보자면 그는 실패자였고, 어느 누구의 인생도 예수님만큼 기구망측(崎嶇罔測)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서조차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이들을 ‘수용’하시면서 자신을 ‘재구성’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가 그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들로부터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 와 보라”(마태 27:40~43)는 ‘최후의 유혹’과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당신을 파송한 하느님으로부터도 거부당하는 것 같은 ‘하느님 부재’(不在)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절규가 그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두려움과 공포와 혼돈으로 가득 찬 ‘고난의 바다’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당신의 생명을 완전히 하느님께 의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신앙 덕택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우리는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악마는 더 이상 우리에게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종살이하던 우리는 ‘생명의 세계’로, ‘빛의 세계’로 옮겨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겪으며 견디는 모든 ‘고난’을 직접 경험하심으로써, 다시 말해 우리와 ‘연대’(連帶, solidarity)하심으로써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탄생, 성장, 공생애와 십자가를 살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습니다. 이 모든 ‘고난의 배후’에는 우리의 구원을 목적하신 하느님이 계셨다는 것이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증언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늘은 성탄 1주일이며 한 해를 마감하는 주일입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비록 올 한 해의 삶이 기쁨보다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더라도 아기예수의 탄생을 기뻐해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종살이 고난’ 뒤에는 분명 ‘출애굽의 기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광야의 고난’ 뒤에는 분명 ‘약속의 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난의 귀양살이’ 후에는 분명 ‘안식의 땅’으로의 ‘귀향’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매달리신 ‘십자가’ 뒤에는 분명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기쁨, 약속의 땅, 안식의 땅, 부활이 있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모든 것이 충족되고 성취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겪는 고난의 진정한 이유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해 몸소 인간으로 오셨고 고난을 당신의 몸에 채우셨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왔는지를 《이사야》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야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 – 이사 53:4~10a

그렇습니다. 《성경》의 예언은 성취되었고, 앞으로도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결코 아무렇게나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성경》을 변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삶을 ‘조명’하십니다. 우리 눈물의 의미를, 우리 아픔의 의미를, 우리 고난의 의미를 말입니다. 또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을, 아픔을, 고난을 증언합니다. 그 모든 여정은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몸소 참고 견디며 겪으신 ‘연대’의 일입니다. 무고한 아이들의 학살처럼 우리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조차도 사실은 우리가 더 이상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도록 당신이 몸소 다 짊어지고 겪으셨습니다. 정말이지 예수께서 아직 고난을 받지 않았거나 죽어주시지 않은 사람이나 영역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감당 못하실 너무 큰 죄악이나 용서하시지 못할 너무 많은 죄악이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고난에 동참’하셨고, ‘견디어’ 내셨으며, 마침내 그 ‘연대의 고난’을 통해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올 한 해를 돌이켜보면 기뻤던 순간도 있었을 것이고, 눈물 나는 고난의 순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 해를 마감하면서 그 모든 일들을 다 주님께 감사의 제목으로 바치십시오. 그리고 지금 고난 속에 있는 이들, 특히 ‘국가권력’에 의해 아이들을 잃고 여전히 진실을 알려달라고 탄원하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우리 고난에 ‘동참’하시고 ‘연대’하신 예수님 때문에라도 “함께 비를 맞듯이” 결코 타인을 타자(the other)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우리의 눈물을 웃음으로, 우리의 괴로움을 노래로, 우리의 좌절을 반드시 희망으로 되돌려 주시려 성탄하신 구세주이십니다. 우리와 삶의 자리를 함께 하시는 “입장의 동일함”을 통해 “관계의 최고 형태”를 보여주신 구세주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이 진실의 증거자가 되도록 성령 하느님께서 날마다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의 삶에 연대하시어 영광으로 이끄시는 성삼위일체 하느님은 이제와 영원토록 찬미를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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