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5. 성탄대축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독생 성자의 탄생으로 영원하신 말씀이 세상에 드러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그리스도를 믿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충만한 은총과 진리를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으로 이제와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52:7-10
  • 시편 – 98
  • 2독서 – 히브 1:1-4
  • 복음서 – 요한 1:1-14

성탄 대축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도다.’입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입니다. ‘영원’하시고 ‘시작도 없으신’ 거룩하신 하느님이 ‘탄생’하신 날입니다. 사실 이 표현은 ‘역설’(逆說, 패러독스)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창조한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시는 영원하신 하느님이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시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류를 창조하신 영원하신 하느님이 친히 인간의 삶을 ‘아기’로부터 ‘시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탄절은 ‘역설’이며, 그것도 우리 인간에게는 가장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여러분, ‘역설’이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겉’으로는 말의 앞뒤가 서로 안 맞고, 논리적이지 않아서 ‘거짓’인 것 같지만 ‘속’으로는 ‘진리’인 것을 가리킵니다. ‘크리스마스’는 정말이지 인간에게 가장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진리’를 말하는 ‘역설’입니다. 2천 년 전 오늘, ‘영원’하신 ‘말씀’이 ‘찰나’의 ‘육신’(살)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느님’(무한)이 ‘피조물’인 ‘사람’(유한)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참 빛’이 세상에 내리시어 죽음의 그늘 속 ‘어둠’ 속을 헤매는 인류에게 비추게 되셨습니다. 알렐루야!

그렇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인간에게 ‘가장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크리스마스’는 예수께서 ‘영원한 상속자’이시면서 동시에 ‘임명된 상속자’가 되실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께서 보이지 않는 ‘창조의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눈에 보이는 ‘하느님의 형상’이 되실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께서 ‘영원히’ 존재하시는 창조의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피조 된’ 천사들보다 우월한 분이 되실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께서 ‘항상’ 하느님이라 불리면서도 여전히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물려받으실’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께서 ‘영원’으로부터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오늘처럼 ‘특정한 날’에도 태어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영원’하시고 ‘시작이 없으신’ 예수님이 친히 우리를 위해, 보다 정확히 말씀 드리면 나를 위해, ‘신’(神)이라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시작’과 ‘마지막’의 ‘제한 속’으로 기꺼이 ‘들어오신 날’이 ‘크리스마스’입니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성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을 당신은 하실 수 있음을 내세우기 위해 탄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하시기 위해 태어나셨습니다. 그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은 무엇입니까? ‘죄의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태어나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는 ‘죄’에 심각하게 ‘감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인간은 살라고 창조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살다가 죽게 될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선포하듯이 우리 자신의 죄가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하느님께 불순종한 큰 죄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하실 수 있는 것보다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죄입니다. 진실을 말하면 우리는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상태는 그것보다 더 나쁩니다.

분명 우리는 창조주 하느님의 상속자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물려받을 그 유산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영혼에서 그것을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했습니다. 우리의 출발은 천사들보다 우월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나락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셔야 했습니다. 죄가 없으면서도 우리의 자리로 내려와 함께 하셨습니다. 죄의 짐에 짓눌려 살아가는 인생들의 어깨에서 그 죄의 짐을 벗겨주셨습니다. 당신 홀로 그 무거운 죄의 짐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은 ‘죄의 용서’라는 일, 즉 아담과 하와 이래로 ‘불가능한 일’을 하시기 위해 그 죄의 짐들을 십자가로 가지고 가셨습니다.

이렇게 죄 없으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죄인의 하나처럼 되셨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말씀, 생겨난 모든 것에게 ‘생명’을 주시는 ‘참 빛’이신 말씀이 그 ‘생명의 빛’을 십자가에서 꺼버리셨습니다. ‘끝’이 없으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끝장’이 나셨습니다. ‘참 생명’이신 분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본래 이 모든 일은 ‘영원하신 하느님’인 ‘예수’께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세상 천지에 ‘신’(神)이 죽을 수 있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신’(神)이 인간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고대로부터 ‘신’(神)과 인간의 관계는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두려움 속에서 ‘신’(神)을 모셔야 했습니다. 《성경》을 제외하고 ‘신’(神)의 존재를 믿었던 고대근동의 창조설화에 따르면 인간은 영예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특히 ‘수메르 창조설화’에 따르면 노역에 시달리던 ‘하급 단계’ 신(神)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급 단계’ 신(神)들이 놀라서 만든 존재가 인간입니다. 말하자면 ‘하급 신’(神)들의 노동을 줄여 줄 목적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인간입니다. 기껏해야 인간은 그런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닙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의 길을 가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지위를 죄와 바꾸었고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그 죽음의 길에서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은 영원히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불가능한 일’을 하시기 위해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불가능한 일을 하시기 위해서는 ‘신’(神) 스스로가 자신의 불가능을 극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영원’하시고 ‘시작이 없으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친히 우리를 위해 ‘신’(神)이라면 불가능할 것 같은 ‘시작’과 ‘마지막’의 제한 속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께서는 기꺼이 ‘신’(神)이 할 수 없는 그 ‘불가능의 차원’에 자신을 던지셨습니다. ‘시작’과 ‘마지막’의 ‘제한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성육신’(성탄)이라는 ‘시작’과 ‘십자가 죽음’이라는 ‘마지막’ 말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 ‘현실’로 일어났습니다. ‘신’(神)은 죽고 인간은 오히려 살아났습니다.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가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았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더욱이 그렇게 ‘신’(神)의 불가능인 ‘시작’과 ‘마지막’이라는 ‘제한’ 속에 자신을 내던진 예수님을 하느님은 ‘다시 살리’셨습니다. 게다가 하느님은 그 불가능에 자신을 내던지신 분, 즉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던 본래의 바로 그 ‘생명의 존재’가 되도록 말입니다. 우리가 내팽개쳤던 본래의 바로 그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도록 말입니다. 참으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축복’을 모두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가 모든 절망한 인생들에게 주시는 참된 ‘위안’입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가 죽음의 그늘 및 어둠 속에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가 자신 안의 죄의 욕망과 싸우며 ‘고행의 길’을 가고 있는 모든 인생들에게 주시는 참된 ‘평화’입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가 슬퍼하며 살아가는 ‘세상’에게 주시는 ‘가장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 이름 ‘예수’처럼,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신 분”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원’하신 분입니다. 우리를 불가능의 어둠으로부터 건져내신 ‘구세주’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러 오신 ‘참 빛의 날’이 오늘 ‘크리스마스’입니다.

성탄 대축일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오늘 ‘크리스마스’를 예언했습니다.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전령(傳令)”을 미리 봅니다. “평화가 왔다고, 구원이 이르렀다고 외치는 전령의 희소식”을 미리 듣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주님께서 ‘예루살렘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도로 찾으러 오시리라 당당히 예언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예루살렘’은 자신들의 영혼에서 ‘하느님의 형상’을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하고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만국 앞에서 그 무서운 팔을 걷어붙이시고, 세상 구석구석이 하느님의 승리를 보게 해 주실 것이라 예언자는 힘차게 선포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하실 것이라 선포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날이 오늘 ‘크리스마스’입니다.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예언이 성취된 날이 오늘 ‘크리스마스’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시편》처럼 목청껏 큰 소리로, 새 노래로 하느님을 찬양합시다. 모든 악기를 다 동원하여 찬양하고 기쁨의 환호성(歡呼聲)을 지릅시다. 그 오른손과 거룩하신 팔로 하느님이 ‘영원히 승리’하신 날이 오늘 ‘크리스마스’입니다. ‘거두신 승리’를 알려주시고 당신의 ‘정의’를 만백성 앞에 드러내신 날이 오늘 ‘크리스마스’입니다. 땅 끝까지 모든 사람이 우리 ‘하느님의 승리’를 보게 된 날이 오늘 ‘크리스마스’입니다. 우리 하느님께서 ‘세계의 통치자’로 세상을 ‘평화’로 다스리러 오신 날이 오늘 ‘크리스마스’입니다. 온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시고, 만백성을 ‘공정’하게 다스리러 오신 날이 오늘 ‘크리스마스’입니다.

그러므로 한 장의 ‘성탄’ 그림을 볼 때 기억하십시오. 목자와 천사들이 한 데 어울려 있는 ‘크리스마스’ 그림을 볼 때 기억하십시오. 동방박사들이 별 빛을 보고 찾아오는 ‘크리스마스’ 그림을 볼 때 기억하십시오. ‘시므온’과 ‘안나’가 성전에서 아기를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그림을 볼 때 기억하십시오. 마리아와 요셉이 구유에 누운 아기를 둘러싸고 있는 ‘크리스마스’ 그림을 볼 때 기억하십시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잠들어 있는 아기 예수의 그림을 볼 때 기억하십시오. 참 빛이 이 세상에 오셨을 뿐 아니라 실제로 우리 자신을 위해 행하신 ‘불가능한 일’, 즉 ‘죄의 용서’를 꼭 기억하십시오. 그 기억들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가득히 받았다는 ‘감사’로 이끌 것입니다. 그 기억들은 우리가 ‘가장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역설의 진리’인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임을 ‘감사’하도록 이끌 것입니다. 우리 ‘성탄대축일 성찬례’가 그런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시간이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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