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유 경배 예식을 준비하며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사목실 앞에 크리스마스트리로 장식한 ‘마구간’을 마련했습니다. ‘마구간’은 해마다 교회가 구세주 강생의 신비를 나타내려고 설치하는 거룩한 표징입니다. 올해는 이다니엘 회장님과 김모니카님이 만드느라 수고하셨고, 청년들이 늦게까지 장식에 참여했습니다. 아직 성탄절이 아니기에 임마누엘 아기예수 상(像)을 모시지는 않았습니다. ‘주인공’이 부재한 공간이지만 그렇더라도 마구간 내부 전경이 주는 평화로움은 길을 지나다 잠시 마음을 멈추는 이들의 차지입니다.

사목실에 앉아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을 붙들고 “어머, 예쁘다.”라며 그 앞에 멈추어 선 ‘모자’(母子)를 봅니다. ‘부디 더 많이 행복하기를…’ 축복의 마음을 보냅니다. 이제 몇 걸음 지나 성탄 이브가 오면, ‘임마누엘’ 아기예수 상을 ‘구유’에 모시고 축복식을 합니다. 그 후 신자들은 차례로 ‘구유 경배예식’을 갖습니다.

시간의 전례를 지키는 우리교회는 대림 2주일이 지나면 마구간을 마련하고 내부에 크게 다섯 부류의 상을 배치합니다. 가장 먼저는 주님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 성인의 ‘상’(像)입니다. 두 번째는 이곳이 마구간임을 나타내는 ‘소’와 ‘나귀’와 ‘양들’의 ‘상’(像)입니다. 세 번째는 그 거룩한 밤에 목자들에게 ‘구세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알린 천사의 ‘상’(像)입니다. 보통 마구간 좌우 높이 배치합니다. 이것은 그 천사와 함께 하느님을 찬미한 수많은 하늘의 군대를 약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들의 손에 이런 ‘찬미가’가 들려져 있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 루가 2:14

네 번째는 성가정을 방문 해 ‘구유’에 누인 아기에 관해 사람들에게 증언한 ‘목자들’입니다. 그들이 목자들임을 나타내기 위해 곁에 ‘어린 양들’을 배치하기도 합니다. 더욱이 이 어린 양들은 ‘나귀’와도 깊은 연관이 있고, 특히 우리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과도 연관됩니다. 어째서 그런지는 아래에서 ‘대속’을 말씀 드릴 때 밝힐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성탄절기 마구간에 배치하는 ‘상’(像)들입니다. 끝으로 ‘공현대축일’(1월 6일)에는 ‘동방박사들’을 배치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부분의 성탄절 성가가 그렇듯이 마구간 내부에 이 모든 ‘상’(像)들을 다 배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급적 절기의 의미를 되살려 배치하는 것이 거룩한 시간의 전례와 어울립니다.

며칠 전, 성탄 장식을 위해 물건들을 창고에서 내리다 마구간에 놓을 ‘상’(像)들도 함께 꺼냈습니다. 이번에 만든 마구간은 가장 많은 ‘공’(功)이 들어갔습니다. 내부에 배치할 ‘상’(像)들을 차례로 꺼내다 “신부님, 소와 나귀는 빼고, 양들만 배치하면 안 되나요?”라고 모니카님이 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성탄 구유’를 장식하는 마구간에 소와 나귀가 배치되는 이유를 한 번도 설명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입니다. 안 될 것까진 없지만 《성경》에서 두 가축이 갖는 상징을 안다면 ‘마구간’과 ‘성탄 구유’의 의미가 더 살아나겠지요.

대림절기와 성탄절기 동안 우리가 1독서로 낭독하는 《이사야》 예언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만들어준 구유를 아는데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철없이 구는구나.” – 이사 1:3

‘임자’(owner)와 ‘주인’(master)은 같은 뜻으로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본문에서 ‘소’와 ‘나귀’는 ‘임자’와 ‘주인’을 압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임자’와 ‘주인’이신 하느님도 몰라보고 철없이 구는 당시의 불순종한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초대교회는 이 구절에 나오는 ‘임자’와 ‘주인’을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하였습니다. 따라서 ‘소’와 ‘나귀’는 흔히 생각하듯이 ‘평화로움’을 드러내는 ‘상’(像)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만물의 창조주’이시자 ‘영원한 진리’이신 하느님을 외면하고 물질만능에 빠져 살아가는 인간들의 ‘무지’와 ‘철없음’을 엄중히 경고하는 ‘상’(像)들입니다. 특히 중세 이래로 ‘성탄 구유’를 모실 마구간 내부에는 ‘임자’와 ‘주인’을 알아보는 ‘소’와 ‘나귀’를 배치해 왔습니다. 이런 전통이 형성되는 데 두 사람의 해석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한 사람은 ‘오리겐’이고 다른 사람은 ‘어거스틴’입니다.

초대교회 교부인 ‘오리겐’(Origen, AD 185~254)은 ‘알레고리적 성경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 영적인, 신비적인 의미 찾기)으로 그의 금욕적인 삶만큼이나 교회사에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알레고리’(Allegory; 다르게 말하다)라는 다소 낯선 단어 때문에 쫄 필요는 없습니다. 쉽게 말해 《이솝우화》처럼 이야기에 등장하는 ‘동물들’을 매개체로 감추어진 어떤 생각을 ‘비유’로 제시하는 표현 양식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오리겐’도 《성경》이 겉으로 드러난 문자적(표면적)인 의미 말고도 그것을 넘어선(혹은 감추어진) 더 깊은 차원의 의미를 간직한 ‘경전’으로 대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해석할 때 ‘문자’ 너머의 ‘영적인’ 의미를 넣어 해석하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레위기》는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을 수 없는 동물’, ‘하느님께 제물로 드릴 수 있는 동물’과 ‘제물로 드릴 수 없는 동물’로 구별합니다(레위 11장). 물론 <신약성경>이 교훈하는 바에 따르면 이러한 음식규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습니다(마르 7:1~23. 사도 10:12~15; 골로 2:16; 1디모 4:3~4 참조).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마음의 정결’을 근본적으로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해 나가겠습니다.

《레위기》의 ‘율법’에 따르면 ‘정결한(먹을 수 있는, 제물로 드릴 수 있는) 동물’은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것들”입니다(레위 11:3). 대표적으로 ‘소’와 ‘양’과 ‘염소’입니다. 부정한(먹을 수 없는, 제물로 드릴 수 없는) 동물은 이 조건을 만족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오리겐’은 이런 <율법> 규정, 즉 문자 너머의 감추어진 의미를 추구했습니다. 그는 ‘정결한 동물’로 구별되는 ‘소’는 하느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유대인)을 비유하고, ‘부정한 동물’로 구별되는 ‘나귀’는 ‘이방인’을 비유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이런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은 문자적 의미 너머의 감추어진(영적인, 신비적인) 의미 찾기에 몰두하다보니 해석학적으로 보편적인 정당성을 지지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더 깊은 깨달음의 차원을 열어주는 경우도 있기에 참고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면 ‘오리겐’의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을 ‘성탄 구유’를 모시는 마구간에 배치하는 ‘소’와 ‘나귀’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는 《루가복음》의 성탄이야기(루가 2:7~18)를 《이사야》 예언(이사 1:3)과 연결하여 비유로 해석했습니다. 자신들을 ‘정결한 사람’으로 구별하던 ‘유대인들’은 주인, 즉 하느님이신 구세주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철없이’ 굴었습니다. 반면에 그들로부터 ‘부정한 사람’ 취급을 받던 ‘이방인들’은 자신들에게 구유를 만들어 ‘생명의 빵’을 주신 주인, 즉 하느님이신 구세주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더욱이 그의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성 어거스틴’은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 ‘같은 구유’로부터 ‘생명의 빵’을 먹었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사실 ‘구유’는 마소(馬牛)의 ‘밥통’입니다. 그 밥통 안에 “아기예수께서 포대기에 싸여 누워계셨다”(루가 2:7,12,16)는 ‘문자적’ 표현은 분명 전체 이야기 속에서 ‘문자적’(표면적) 의미 그 이상입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영광을 버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낮고 천한 곳에 임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보여주는 심층적 의미를 갖는 단어가 ‘구유’입니다. 둘째 구유 안의 아기예수는 하느님이 이 세상에 제공해 주신 ‘생명의 빵’이라는 심층적 상징입니다. 정말이지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밥’이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먹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합니다. 은유로 말하면, 마소(馬牛) 같은 존재로 전락한 인간이 ‘진정한 밥’이신 예수를 먹고 ‘구원의 인간’으로 완성되어 가는 길이 ‘신앙’(信仰)입니다. ‘사람의 아들’(딸)로 태어나 ‘진정한 사람’(하느님의 자녀)이 되어 가는 길이 ‘신앙’(信仰)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양육하시는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심층적 상징’이 ‘구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갈망들(갈증)과 내면의 외침들이 향하고 있는 ‘그 궁극적 갈망’, 즉 ‘최고의 영적 갈망’(배고픔)을 채우러 오신 ‘생명의 빵’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허무한 ‘수명’(壽命)이 ‘궁극적(窮極的) 생명의 충만함’으로 건너가도록 하늘에서 내려오신 ‘영적인 빵’이십니다(요한 6:35). 예수 그리스도는 ‘영’(靈)이신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의 ‘영적인’ 배고픔(목마름)을 채워주시는 ‘원천’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 놓이든지 우리의 진정한 기쁨과 만족의 ‘근원’이십니다. 풍요로울 때든지, 편안할 때든지, 궁핍할 때든지, 고난 속에 있을 때든지,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런 의미가 성탄 구유를 모시는 마구간에 담겨 있습니다. 전체 유대인을 비유하는 ‘소’와 이방인을 비유하는 ‘나귀’를 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심지어 부정한 동물로 구별되는 ‘나귀’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주님을 모시고 가는 영광을 누립니다. 그 나귀는 부정한 동물이었기에 태어나자마자 주인이 ‘어린 양’을 대신 바쳐서 ‘대속’한 가축입니다(출애 13:13,34:20). 마찬가지로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었던 우리도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덕택에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영광의 길’을 갑니다. 이렇게 보면 ‘오리겐’이 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모든 인류’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오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겸손히 나오라는 초대가 ‘구유 경배 예식’에 담겨 있습니다.

처음에는 짧게 쓰려고 했는데 글이 좀 길어졌습니다. 아무튼 이런 의미를 되새기고 성탄 구유 앞에 선다면 분명 이전과 다른 ‘성탄 메시지’를 들으실 겁니다. 정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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