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5. 대림3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대림 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복되어라. 오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기다림의 시간을 사랑(정의, 평화, 진실)으로 채워가는 사람들!’입니다. 전례독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말에 오시어 이루실 ‘완전한 평화’와 ‘구원의 세상’을 들려줍니다. 우리는 그 하느님 나라를 가져오실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오늘의 시련을 참고 견딥니다. 우리가 사랑(정의, 평화)의 실천을 통해 오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건 복된 기다림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주 하느님, 우리를 사랑으로 지켜 주시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게 하시나이다. 비오니, 연약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닫힌 눈을 열어주시어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35:1-10
  • 시편 – 146:5-10
  • 2독서 – 야고 5:7-10
  • 복음서 – 마태 11:2-11

대림 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복되어라. 오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기다림의 시간을 사랑(정의, 평화, 진실)으로 채워가는 사람들!’입니다.

1독서는 ‘장차 도래할 이스라엘(시온산)의 회복과 구원이라는 빛나는 미래상’을 보여주는 《이사야》입니다. 한마디로 미래에 일어날 이스라엘 민족과 땅의 회복입니다.

우리는 1독서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이사야》의 역사적 배경을 먼저 살펴봅니다. 솔로몬 왕의 사후 통일왕조는 둘로 분열됩니다(기원전 931년).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입니다. 제 1이사야 예언자(기원전 742-701/700)는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 불리는 고대근동의 패권은 ‘아시리아 제국’이 쥐고 있었습니다. ‘아시리아’는 적극적으로 ‘서진’(西進) 정책을 펼쳤습니다. 서쪽으로는 지중해, 남쪽으로는 이집트까지 이르렀습니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이주민 정책을 펼쳤습니다(열왕하 17:1~6, 24~41). 이름 하여 ‘사마리아인’들의 시작입니다. ‘남왕국 유다’도 이 서진(西進) 정책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비록 원수로 지냈어도 북왕국 이스라엘이 남왕국 유다의 방패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는 아시리아와 직접 국경을 마주해야 하는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남왕국 유다의 왕 ‘아하즈’는 아시리아에 막대한 조공(朝貢)을 바치는 조건으로 왕조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열왕하 16:7-8).

아시리아가 서진(西進) 정책을 펼 때 이집트에서는 제 25왕조가 일어납니다(기원전 716/5-663년). 25왕조는 에토피안 왕조(Ethopian Kush)로서, 영향력을 ‘시리아-팔레스틴’(Syria-Palestine) 지역으로 확장시키려 했습니다. 따라서 남왕국 유다는 두 거대한 제국 사이에 낀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 1이사야’ 예언자[구약학계에서는 《이사야》를 제 1이사야(1~39장), 제 2이사야(40~55장), 제 3이사야(56~66장)로 구분합니다]가 활동했던 시기는 남왕국 유다가 아시리아와 이집트 제국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못 잡던 혼란시기였습니다. 마치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꿈꾸는 우리 민족의 현재 처지와 비슷합니다.

‘제 1이사야’는 이 혼란의 시기에 초지일관 유다와 예루살렘(시온산)이 구원 받는 길은 ‘하느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데 달려있다’고 선포한 예언자였습니다(이사 7:1~9; 28:16; 30:15; 31:4~5). 사회적 약자들(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인)을 향한 사회적인 의무를 다하지 않고 형식적인 제사만 드리는 것을 책망했습니다(이사 1:10~17). 하느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당시 사회상을 꾸짖었습니다(이사 3:13~15; 5:8~24; 10:1~2). 그의 이러한 책망은 빛과 소금이어야 할 오늘의 ‘교회’와 빈부 양극화로 심각한 갈등을 겪는 오늘의 ‘사회’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놀랍게도 제 1이사야는 하느님이 아시리아를 채찍으로 사용하시어 북왕국 이스라엘을 치셨다는 ‘통찰’(洞察)을 전했습니다. 아시리아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 쓰신 ‘심판의 도구’라는 통찰입니다(이사 10:5~6). 유다는 외세에 의지해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동맹 정책’을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이 몸소 돌보신다는 약속을 ‘신뢰’하면서 하느님이 행동하시게 ‘의탁’해야 했습니다. 예언자의 책망을 귀담아 듣지 않으면 유다는 망하고 그 백성은 포로로 끌려갈 것입니다. 제 1이사야는 자신의 ‘벌거벗은 차림’으로써 이것을 예고해 주기까지 했습니다(이사 20:1~6).

유다의 왕과 귀족들이 예언자의 말을 귀담아 들었습니까? 유다의 왕 ‘아하즈’는 제 1이사야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아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이사 7~8장). 그는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고, 아시리아의 패권을 인정함으로써 살아남으려 했습니다(열왕하 16:5~9). 그 시기 제 1이사야 예언자는 아시리아가 유다를 도와주러 오는 것이 아님을 이미 예견했습니다. 아하즈의 뒤를 이은 ‘히즈키야’ 왕은 어땠습니까? 그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많이 한 ‘선한 왕’으로 평가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외세’를 의지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이집트를 믿고, 반(反) 아시리아 동맹에 가담했습니다(이사 30:1~7). 결국 이 일로 유다는 침공을 당합니다(이사 36장).

제 1이사야의 활동이 끝나갈 무렵인 기원전 701년, 유다는 아시리아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이사야》 36장에 따르면, 아시리아는 18만 5천이라는 대군을 동원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그 당시 왕은 ‘히즈키야’였습니다. 그에게는 하느님의 도우심 외에 길이 없었습니다. 그는 제 1이사야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합니다. 그 기도에 하느님은 응답하십니다. 단 하룻밤 사이 아시리아 군대는 몰살당하고 예루살렘(시온산)은 구원을 받습니다(이사 36~37장, 열왕하 18~20장 참고). 학자들은 쥐가 옮기는 ‘흑사병’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열왕하 19:35). 또 하느님은 중병에 걸린 히즈키야를 ‘치유’하시고,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주셨습니다(이사 38장).

병에서 회복한 히즈키야는 바빌론 사신들에게 ‘경솔함’을 보입니다(이사 39장). 제 1이사야는 히즈키야의 그 ‘경솔한 행동’ 때문에 하느님이 심판하실 것이란 예언으로 끝이 납니다(이사 39장). 이처럼 히즈키야가 유다 멸망의 속도를 늦추긴 했지만 돌이킬 순 없었습니다. 실제로 예언자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돌아설 줄 모르던 유다는 불과 1세기만에 ‘바빌론 제국’에 멸망당합니다. 제 1이사야를 통해 히즈키야에게 하신 예언대로 유다인들은 바빌론 제국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느님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선조들을 기억하신 것처럼, 그 가련하고 불쌍한 포로들, 즉 당신의 백성을 돌아보시고 그들을 ‘귀향’시켜주실 것이라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1독서 본문입니다(이사 35:1~10). 제 1이사야는 포로생활을 끝내고 ‘시온산’(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구원받은(야훼께서 되찾으신) 자들의 기쁨의 행렬’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 유다가 지은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귀향’시킬 것이라는 빛나는 미래상입니다. 메마른 땅과 사막, 황무지는 물이 풍부하고 초목이 무성한 땅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특히 ‘시온산’(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거룩한 길’이 그 땅을 통과할 것입니다. 야훼께서 되찾으신 구원받은 자들은 흥겨운 노래를 부르며 그 길을 걸어 ‘시온산’(예루살렘)으로 귀향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포로생활 하던 유다인들이 이 예언의 말씀을 듣고 있는 장면에 초점을 맞추어 1독서 묵상을 진행 하겠습니다. 유다인들은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와 살고 있습니다. 어느덧 포로로 끌려온 지 70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들은 70년에 이르는 포로생활 동안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기(氣)가 죽어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습니다. 그 때 그들에게 약 2세기 전에 살았던 제 1이사야의 ‘희망의 외침’을 누군가 상기시켜 줍니다.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러 오신다. 하느님께서 오시어 보복하시고 너희를 구원하신다. – 이사 35:4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행동’하십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편’이신 정의의 하느님께서 ‘새로운 살 길’을 열어주러 ‘오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좋아하는 표현대로 하자면 ‘메시아’(구세주)가 오시어 불의를 몰아내시고 이루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입니다. ‘이집트’(세상을 상징)에서 종살이하던 선조들의 경우처럼, 하느님은 ‘바빌론’(세상을 상징)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에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오시어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참된 임금이시자 모든 민족들의 ‘주인’이심을 결정적으로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2의 출애굽이 예고된 셈입니다.

하느님께서 ‘오시어 행동’하시면 상상도 못했던 ‘시온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마치 겨울 들판에 봄꽃이 피어오르듯, 흑백 세상이 천연색으로 빛나며 온 세상은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1~2절). 만물이 새롭게 되는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到來)입니다. 그러니 그 영광을 보러가기 위해 포로로 살고 있는 노인들은 다시 ‘힘’을 내고, 겁먹은 젊은이들은 ‘용기’를 내야 합니다(3~4절). 그들이 ‘힘’을 내고, ‘용기’를 내야할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꿈에 그리던 고국, 즉 ‘시온산’(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10절).

더욱이 하느님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몸소 오시는 날 ‘몸의 장애’를 겪고 있는 이들 조차도 온전하게 ‘치유’될 것입니다(5~6a절). 이 치유는 ‘메시아가 오시어 이루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실질적인 표징입니다(루가 7:22). 그러나 ‘몸의 장애’를 신체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포로는 ‘행동의 제약’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보는 것’, ‘듣는 것’, ‘걷는 것’, ‘말하는 것’이 ‘부자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몸의 장애가 온전히 치유되는 일은 ‘사회적 약자들’이 그들을 억압해 온 모든 세력들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얻는다고 이해하여도 좋겠습니다. 이렇게 온전히 치유되고 해방된 그들은 ‘시온 산’(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들이 ‘시온산’(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그 길의 주변 환경마저도 원래부터 그래야 하는 것처럼 새로워집니다(6b~9절). 메마른 땅(광야), 사막, 황무지라는 ‘죽음의 땅’에 ‘샘’이 터지고, ‘죽음의 땅’에 ‘냇물’이 흐르는 ‘생명의 땅’으로 변합니다. 광야를 가로지르는 ‘크고 정결한 길’이 훤하게 트입니다. 더 이상 포로로 끌려올 때의 고달프고 좁다란 길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시온산)까지 ‘대로’가 훤하게 트인 ‘안전한 길’입니다. 순례자들이 걷는 길처럼, 그 길은 ‘거룩한 길’로 불립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마련하신 그 길은 아무나 걸을 수 없습니다. 오직 ‘건짐(구속함) 받은 사람’,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만이 걸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되찾으신 사람’이 그 길을 걸어 ‘시온산’(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며, ‘귀향의 감격’을 노래할 것입니다. 아픔과 한숨은 가시고, 끝없는 행복과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위로’와 ‘희망’이라는 제 2이사야서의(40-55장)의 주제가 ‘미리’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 1이사야는 그 옛날 ‘출애굽’에 상응하는 ‘새 출애굽’(하느님 나라)을 기대했습니다. 새 출애굽, 즉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인간의 노력이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또한 그는 ‘다윗의 자손’(이새의 그루터기)에서 ‘메시아가 탄생’하심으로써 다윗 왕권이 마지막 때에 새로워지고 완전해질 것을 기대했습니다(이사 9:2~7; 11:1~10). 더욱이 하느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백성’이라고 예언했습니다(이사 2:2~4; 11:6~9; 19:19~25). 제 3이사야(56~66장)의 ‘범세계적인 구원’(universalism)이라는 주제도 이미 제 1이사야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본문이 중요한 이유는 하느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그 ‘시온산’(예루살렘)이 장차 완성될 종말의 ‘하느님 나라’(새 예루살렘)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묵시 7:17,21:4). 또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실 ‘이스라엘 민족’은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 2:9a). 또 ‘시온산’(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거룩한 길’은 ‘하느님 나라’라는 ‘새 예루살렘’(하늘의 본향)으로 우리를 인도하러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1독서는 ‘장차 도래할 메시아 왕국의 영광과 구원의 기쁨으로 빛나는 미래상’을 그리고 있는 셈입니다. 하느님께서 종말에 오시어 이루실 ‘완전한 샬롬’과 ‘구원의 세상’을 그려주고 있는 셈입니다(참고 이사 11장, 61장).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평화’, ‘정의’, ‘사랑’이 가득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특히 회복된 ‘시온의 영광’(1~2절)과 하느님 백성들이 얻는 ‘위로와 격려’는(3~4절) ‘만물이 새롭게 되는 때’인 ‘우주적인 회복’(구원)으로써 ‘종말론적인 내용’을 나타냅니다(사도 3:21). 더욱이 이 ‘회복’은 오늘 ‘복음이야기’에서 말씀하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연관됩니다(마태 11:5; 로마 9~11장). 복음이야기에 보면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던진 “당신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입니까?”라는 질문에 ‘몸의 장애’를 가진 이들이 ‘회복’되는 제 1이사야 말씀을 가지고 대답하십니다(마태 11:5). 제 1이사야는 장차 올 ‘야훼의 구원의 날’에 있게 될 ‘하느님 백성의 회복’과 그 ‘땅의 회복’을 예언했기 때문입니다(이사 35:5~7).

예수께서는 메시아에 관한 이 예언이 자신의 행동을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요한에게 전해주게 하십니다. 자신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시고 사람들이 고대하던 ‘메시아’이심을 밝히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보내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마저도 ‘다른 메시아 상(像)’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역시 다른 민중들처럼 다윗과 같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자신이 증언한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능력은 로마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정치적 구원’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온유와 겸손, 친교와 가르침, 치유를 소원하는 개인적 요구들에 대한 응답으로 그 능력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기대’와 다르게 행동하시는 예수님께 ‘조바심’이 났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내가 네 기대와 다르게 행동하고 있다고 해서 나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나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하나씩 성취해 가고 있는 중이다.”라고 전해주게 하십니다. 자세한 것은 복음이야기에서 좀 더 다루겠습니다.

제 1이사야가 예언한 ‘시온의 대로’를 향한 ‘땅의 회복’도 ‘말씀의 밭’인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땅의 완전한 갱신’(회복)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 ‘마지막 날’ 실제로 일어날 것입니다. 그 때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위에 세워진 ‘교회’는 2독서 《야고보서》의 교훈처럼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무엇을 품고 참고 기다려야 합니까? 그 가르침을 위해 《시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시편》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임을 찬미하는 <146편>입니다. 시인은 한평생 하느님만을 섬기며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시인은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자고 초대합니다(1~2절). 그가 살면서 깨달은 바에 따르면 인간은 아무리 위세를 부려도 숨 한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는 허망한 존재일 뿐입니다(3~4절; 참고 전도 12:7; 창세 2:7; 3:19). 따라서 권력가들과 눈에 보이는 그런 인간들을 신뢰하는 이들은 불행합니다. 그러나 ‘야곱(계약)의 하느님’께 도움을 받는 사람, 자기(인격적으로 만난) 하느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됩니다(5절). ‘야곱의 하느님’은 도망자 야곱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와 계약을 맺으신 ‘베델의 하느님’(창세 28:10~22; 35:7), ‘이스라엘의 하느님’(창세 32:23~33; 35:10~12), 이스라엘 선조들을 불러 약속을 주신 ‘계약의 하느님’(창세 15장; 48:15~16), 자기 백성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시는 하느님’입니다(출애 24:1~11; 레위 26:42; 시편 105:8,9; 루가 1:79).

그 하느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이 복된 이유는 하느님은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언제나 ‘신의’(信義)를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6절). ‘신의’를 지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세계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특히 하느님은 ‘사회적 약자들’을 보살피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시며, ‘불의’를 ‘심판’하시는 분입니다(7~9절). 저 멀리 하늘이 아니라 지금 여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현장에 현존’해 계시며, ‘구원’을 일으키시는 참된 임금이십니다.

시인이 찬미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하느님의 ‘신의’(信義)와 ‘회복’은 오늘 복음서에서 듣듯이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마태 11:5; 참고 이사 61:1~2).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시고, 사람들이 대망하던 참된 ‘구세주’이십니다. 다시 말해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이 ‘신의’(信義) 가득한 ‘하느님의 통치’(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된 것을 발견하였다고 증언합니다(루가 4:17~19).

그렇습니다. 역사에서 ‘권력가들’(특히 정치인들은 선거철이 아니면)은 ‘사회적 약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무시하지만 하느님은 ‘보잘 것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이들을 언제나 지독히도 ‘편드시는’(편애하시는) 자비하신 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은 ‘사회적 약자들’(가난한 이들)을 ‘편애하시는’ 영원히 찬미 받으실 ‘신의’(信義) 가득한 온 세상의 통치자이십니다. 우리는 그런 하느님께 ‘희망’을 거는 ‘교회’입니다. 우리 이 희망을 품고 참고 기다리고 있습니까?

2독서는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이 왔으니 참고 기다리라’고 교훈하는 《야고보서》입니다. “가까이 왔다”, “이미 문 앞에 서 계신다”는 말씀을 통해 ‘성탄절’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예고합니다.

《신약성경》 서신들에 등장하는 주요한 주제들 중 하나는 ‘곧 다시 오실 주님을 충실히 기다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처음 믿을 때처럼 그렇게 ‘임박’하지 않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 새 교회 안에도 주님의 재림을 ‘부인’하는 이들까지 생겨났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면서 ‘기다림의 빛이 희미’해져 가는 이들이 등장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신자들은 주님께서 이미 재림하셨다는 풍문에 속아 넘어가기도 했습니다(2데살 2:2).

이렇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고 기다려야 할 교회의 ‘충실함’이 시험되던 시대에 《야고보서》 기자는 ‘새 계약의 백성인 교회’를 향해 편지를 썼습니다. 1세기 말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은 이방인 사이에 흩어져 살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여러 가지 시련’을 당했습니다(야고 1:2~3). 《야고보서》 기자는 ‘시련’ 속에 있는 형제자매들(교회)을 향해 ‘인내력’을 발휘하라고 격려합니다(야고 1:4). 듣고 배운 말씀대로 ‘실천’하는 믿음, 즉 ‘행동’하는 믿음으로(야고 1:22,25; 2:14~26) 시련을 견딘 사람은 행복하고, 마침내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월계관’을 받을 것이라 격려합니다(야고 1:12; 야고 5:11).

언제 그런 월계관을 쓰는 ‘승리의 일’이 일어납니까? 주님이 다시 오시어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 날입니다(야고 5:9; 2:12). 그 날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승리의 날’, ‘기쁨의 날’, ‘구원의 날’이지만 ‘부자들’에게는 ‘비극의 날’, ‘슬픔의 날’, ‘도살당할 날’이 될 것입니다(야고 5:1~5). 그들의 ‘재물’이 그들을 ‘단죄’하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심판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실함(충성됨)을 입증해 줄 것을 믿고 ‘인내하라’는 격려는 ‘지혜’와 ‘부’와 함께 이 서신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다. 그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 형제자매(신자)들은 하루하루를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야고 3:13). 올바르고 평화로운 생활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야고 3:17~18).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심판하러 곧 오신다는 믿음 속에서 ‘시련을 참아내며 기다려야’ 합니다. 어떤 태도로 참고 기다려야 하는지를 이렇게 교훈합니다.

농부는 땅이 귀한 소출을 낼 때까지 끈기 있게 가을비와 봄비를 기다립니다. – 야고 5:7b

‘인내와 기다림’의 대명사인 ‘농부’로부터 배우며 “마음을 굳게 하라”고 형제자매들(교회)에게 권면합니다(야고 5:8). 사실 그렇습니다. 농부는 곧바로 소출을 얻지 못하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언뜻 보기에 씨앗이 뿌려진 땅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싹이 틀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씨를 뿌린 농부는 자신이 열매를 거두리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일합니다. 당장은 변화가 보이지 않더라도 분명 변화는 일어나고 있고, ‘추수 때’는 반드시 닥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형제자매들도 ‘재림의 날’이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착한생활’을 해야 합니다(야고 3:13). “마음을 굳게 하여” 오늘을 ‘참고 견디어내야’ 합니다.

게다가 ‘심판’(정죄)을 받지 않으려면 서로 남을 탓(원망)해서도 안 됩니다(야고 5:9). 자칫 우리는 ‘고난의 터널’을 지날 때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사랑하는 일’을 멀리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 모든 일의 바탕에는 다른 사람을 향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과 연결시켜 말씀드리면 흙으로 돌아갈 연약한 사람에게 ‘희망’을 두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한 사람이기에 이웃에게 ‘기대’고 싶겠지만 다시 마음을 올곧게 세웁시다. 굳건한 반석이신 하느님께로 ‘희망의 닻’을 내립시다. 인간은 기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이 제가 지금까지 공부하면서 얻은 배움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우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고난 속에 있다 하더라도 결코 남을 원망하거나 불평해서는 안 된다고 상기시켜 줍니다. 더욱이 오셔서 심판하실 분이 이미 문 앞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주’로 오십니다.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충성심도 심판하실 것입니다(2고린 5:10). 이 점을 기억하는 우리는 고난 속에 있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일’을 결코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끝으로 야고보서 기자가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보기로서 ‘예언자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2독서는 마무리됩니다.

우리는 2독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발견합니까? 오늘의 우리도 《이사야》 35장의 예언이 완전히 성취되기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어서 오시어 ‘완전한 샬롬’(평화)의 왕국을 이루어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안의 ‘기다림의 빛’은 어떻습니까? 예언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하느님이 말씀을 받아 전한 이들입니다. 또 1세기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분명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시련’은 면제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지만 고난을 겪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난을 겪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오늘의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든 박해시절을 살아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신앙의 빛’, ‘희망이 빛’, ‘사랑의 빛’을 결코 끄지 않았습니다. 시련의 ‘바람’ 때문에 잠시 흔들렸을지는 몰라도 결코 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난과 박해는 그들의 ‘신앙의 빛’, ‘희망의 빛’, ‘사랑의 빛’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 파멸이 아니라 ‘성장’과 ‘성숙’입니다. ‘참 빛’이신 주님과 ‘하나’ 되는 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보다 ‘순전한’ 우리 자신으로의 ‘통합’입니다.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은 고난 속에 있는 우리와 지금도 함께 하십니다. ‘곧 오실 주님’께만 ‘희망’을 두고, ‘기다림의 등불’을 더욱 높이 밝히도록 우리 모두를 ‘거룩한 교회’로 불러주셨습니다.

복음이야기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자기 증언과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을 전하는 《마태오복음》입니다. 전반부(마태 11:2~6)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아직 갈릴래아 ‘나자렛’에 계실 때입니다. 어느 날 ‘세례자’라는 별칭이 붙은 ‘요한’이라는 사람이 ‘유다 광야’에 나타났습니다(마태 3:1). 그는 거기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라고 선포하며 ‘세례’를 주었습니다(마태 3:2). 그의 출현은 순식간에 유다 전체로 퍼져 갔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광야’는 특별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하느님이 계신 곳’, ‘하느님의 위대한 역사를 떠올려주는 곳’, ‘메시아가 출현하는 곳’이라 믿어졌기 때문입니다(마태 24:26).

그는 정말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습니다(마태 3:4). 그의 차림새는 대담했던 ‘엘리야’ 예언자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메뚜기’(곤충이 아니라 쥐엄나무 열매, 자세한 설명은 대림 2주일 복음서 설명을 참고하세요)와 ‘들꿀’(대추야자 열매)을 먹으며 살았습니다(마태 3:4). 둘 다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입니다. 천연 그대로의 식단은 그가 하느님 체험 속으로 자신을 투신하며 지속적으로 수행해 왔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그는 당대 기득권이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을 향해 ‘독사의 족속들!’이라며 거침없이 욕을 퍼부었습니다(마태 3:7).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마태 3:8). 하느님의 심판이 임박했기에 좋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진다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진다고 외치고 다녔습니다(마태 3:10,12).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의원이든 군인이든, 사무직원이든 노동자든, 결혼을 앞둔 청년이든 공부하는 학생이든, 가정주부든 노인이든 꾸물거리지 말고 당장,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바꿔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언했고 예수님께서도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그림: 세례자 성 요한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James Tissot,

세례자 성 요한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449

하지만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삶이 여러 모로 달랐다고 증언합니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었던 반면 예수님은 겉옷은 물론 위에서 아래까지 혼솔 없이 통으로 짠 ‘속옷’까지 입으셨습니다(요한 19:23~24). 요한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은 반면 예수님께서는 돌 항아리에 들어있던 물을 전부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요한 2:1~11). 요한은 금욕적이었던 반면 예수님은 빵을 쪼개고 나누셨습니다(요한 6:5~13). 심지어 예수님은 ‘먹보’에 ‘술꾼’이라는 별명도 있었습니다(루가 7:34). 요한은 암울하게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간 반면 예수님은 기뻐하며 사셨습니다. 요한은 불에 타버리는 심판을 선포한 반면 예수님은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요한은 불친절한 반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친절하셨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징벌을 경고한 반면 예수님은 사람들 한 가운데 살면서 그들을 은혜의 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이처럼 서로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로 증언한 예수님에 대해 ‘의문’이 가기 시작 했습니다. 더욱이 자신은 불의한 정권 때문에 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며 창녀로 하여금 자신의 발을 씻게 하고, 머리카락에는 향유를 발라 주게 했다는 소문도 전해 들었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갖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갈등이 시작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방식은 자신이 기대하던 메시아의 삶의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메시아가 오심으로 뭔가 세상이 극적으로 돌변하리라 기대했습니다. 메시아가 오셨기에 여러 민족과 나라에서 엄청나게 많은 민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올 것을 기대했습니다. 최소한 예수께서 금욕적으로, 구별되게 살면서 기도를 중요하게 여길 줄 알았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사람들을 모아 관상기도나 묵주기도를 바치고, 찬양집회를 열거나, 사람들 앞에서 《시편》을 노래해 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라고 묻게 했습니다. 한마디로 당신은 메시아이십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그렇게 물어오는 요한에게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들은 ‘이사야 35장’의 말씀을 통해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라고 들려주십니다.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 마태 11:5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을 통해 ‘메마른 땅’, ‘사막’, ‘황무지’ 같이 힘겨운 인생길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영광’이 임했다는 뜻입니다. 사막에서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듯 이 세상 한 가운데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성전 안에서만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한 가운데서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 한 가운데서 ‘기쁜 소식’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신앙 좋은 신자는 누구입니까? 주일이면 성당이나 교회에 열심히 나오는 신자입니까? 주일이면 하루 종일 성당이나 교회에서 살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신자입니까?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묵주기도를 연거푸 바치는 신자입니까? 온갖 종류의 중보기도 모임이나 수도원이나 수녀원에서 열리는 관상기도 모임에 열심히 참여하는 신자입니까? 성당 건축을 위해 큰 봉헌을 하는 신자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성직자나 신자들이 그런 것에만 골몰하기에, 이 세상의 변화를 고대하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 수군대며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시켜 묻게 했던 것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이 정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예수께서 파송한 제자들이란 말인가? 아니면 우리는, 우리와 함께 이 세상 한 가운데 살면서 이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변화시킬 다른 사람들, 다른 정치인이나, 다른 종교인들을 기다려야 할까?

교우 여러분, 성당도 많고 교회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 숫자들이 말해주는 만큼 이 세상에 하느님이 원하시는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가 존재합니까? 여전히 세상은 미움과 거짓, 부정과 불화로 얼룩져 있습니다. 권모와 술수, 상대방을 향한 험담과 비난은 끊이질 않습니다. 내 편 네 편이라는 편 가름과 증오는 여전합니다. 심지어 신자들도 이런 것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대중매체를 통해 유명 목사나 신부들의 설교나 강론, 감동을 주는 ‘책’들은 넘쳐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정말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까? ‘진실’과 ‘정의’에 눈먼 사람들, ‘이웃사랑’에 절름발이인 사람들,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나병환자들, ‘평화’를 향한 외침에 귀머거리인 사람들, ‘양심’이 죽어있는 사람들을 치유하면서 다시 살아나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 사회의 약자들, 소외와 가난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정말로 ‘복음’이 전하여지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물질과 권력과 출세로부터 더 자유로워지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까?

만일 나의 삶에서, 우리 삶의 현장에서 그런 사랑(진실, 정의, 공감, 평화, 양심, 자유)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과연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습니까? 매주일이면 사람들이 성당(교회)으로 천만 명이 넘게 몰려들고, 더 큰 건물을 짓고, 더 많은 해외 선교기지를 갖는 것이 하느님께는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 세상을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살만한 곳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정말 누구십니까? 신앙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교우 여러분 ‘성육신’은 하느님이 사람들 가운데 오신 ‘사랑의 사건’입니다.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사시러 오신 날이 ‘성탄절’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새로운 시대인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도래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느님의 나라로, 새 시대의 나라로 들어오라는 초대를 받고 응답했습니다. 그 은총의 나라에서 도움을 얻고, ‘이 세상에’ 그 나라를 퍼뜨리고 일구는 일을 하겠다고 파송되는 시간이 성찬례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의 일에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저들이 과연 그리스도인일까?”라는 의심을 품게 해서도 안 됩니다.

이제 후반부(마태 11:7~11)인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 부분을 살필 차례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언자들의 삶은 어떤 특징들을 보입니까? 그들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삶을 백성들에게 전달했고, 그 삶에 순종할 것을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하느님과 연결시키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특히 그들은 장차 세상에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사회적 정의’에 관심했습니다. 정의는 하느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죽음에 굴하지 않는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된 이들과 연대하는 ‘측은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목소리 없는 이들을 위한 ‘목소리’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소리 없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무시당하는 세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금도 이 시대의 예언자로 부름 받은 우리를 상기시킵니다. 사실 ‘대림절기’는 사회적 약자들, 목소리 없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소리 없이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할 시기입니다. 모두가 기뻐할 수 있는 평화 세상을 꿈꾸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이러한 예언자의 특징들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 대해 어느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송하십니다. 그는 메시아를 보지 못하고 예언한 다른 예언자들과는 다른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메시아를 직접보고 예언하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기쁘게 하거나 인간을 기쁘게 하려고 온 ‘특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메시아의 길’을 닦도록 보냄 받은 ‘하느님의 특사’였습니다(마태 11:10; 이사 40:3; 말라 3:1). 예수님은 이 점을 분명히 상기시키십니다. 오직 그 만이 메시아 바로 앞에서 그의 오실 길을 미리 준비하도록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가장 위대한 예언자였고,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그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라고 예수님은 칭송하십니다(마태 11:11a). 하지만 반전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보다는 크다. – 마태 11:11b

분명 세례자 요한은 자연적인 출생을 통해 태어난 사람 중에서는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죽음과 고통 아래에 있는 인류 중에서는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를 차지한 그리스도인과 비교할 때 그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분명 그는 ‘혈통’과 ‘율법’에 근거한 위대한 유대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칭송하실 만큼 여느 예언자보다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옛 계약’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저 멀리 겨우 동터오기 시작한 ‘구원의 빛’을 바라보며 구약의 마지막 언덕에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새 계약’, 즉 ‘십자가와 부활’로 예수님의 구원사업이 완성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그는 ‘하늘나라 밖에’ 있었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새 계약’,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가져다 준 ‘구원의 은총’ 아래 있습니다(1고린 11:25, 2고린 3:6, 히브 8:6~13).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하늘나라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태양’이 온 누리에 가득한 하늘나라 안에 살고 있습니다. 비록 바깥세상은 아직 아니더라도 그리스도인의 마음만은 ‘사랑’과 ‘평화’라는 ‘하느님의 통치’(다스리심)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시련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하더라도 그가 살고 있는 가장 어두운 낮이 세례자 요한이 살았던 가장 밝은 밤보다 밝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새 계약의 유익’을 누리지 못했으나 그리스도인은 ‘새 계약의 유익’을 은총 속에서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보다 큰 그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이야기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가 얼마나 ‘복된 인생들’인지를 드러내주는 독서 배정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이사야》는 ‘장차 도래할 메시아 왕국의 영광과 구원의 기쁨으로 빛나는 미래상’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말에 오시어 이루실 ‘완전한 샬롬’과 ‘구원의 세상’입니다. 《시편》은 그 나라, 그 왕국에서는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억눌리지 않는다고 찬미합니다. 하느님이 영원히 다스리시는 ‘사랑’과 ‘자유’와 ‘평화’가 가득한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 ‘하느님 나라’를 가져오실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야고보서》가 격려하는 것처럼, 오늘의 시련을 참고 견딥니다. 나 자신의 시련에만 매몰되지 않고, 시련 속에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며 ‘사랑’으로 연대합니다. 가끔은 세례자 요한처럼 ‘바람’(기대 또는 시련의 바람) 때문에 흔들리기도 하지만 오실 주님을 향한 기다림의 등불을 결코 끄지 않습니다.

분명 세례자 요한은 주님 오실 길을 준비한 구약에서 가장 큰 인물입니다. 그러나 ‘새 계약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보다는 큽니다. 우리가 그런 축복의 그리스도인입니다. 물론 우리가 정말 그런 축복의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성당(교회) 안에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축복된 그리스도이라는 진실은 성당 밖 세상 속에서 ‘사랑’(정의, 평화)의 삶을 통해 증명됩니다. 메마른 땅, 사막, 황무지 같은 세상을 ‘살맛나는 정의와 평화의 세상으로 하느님과 함께 변화시켜 가는 우리의 작은 실천을 통해서 말입니다. 대림 3주간, 우리가 그런 사랑(정의, 평화)의 실천을 통해 오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건 복된 기다림의 사람들임을 증명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주 예수님, 저희는 사랑의 등불을 밝히고
오시는 당신을 기다립니다.
바람 때문에 흔들릴지라도 결코 꺼지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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