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8. 대림2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대림 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완전한 샬롬을 주러 오실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소명(희망, 평화) 사람이 되시오입니다. 대림 2주일과 3주일 복음서는 주님 오실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두 주간에 걸쳐서 그의 삶을 묵상하는 이유는 그가 ‘소명을 발견한 사람의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의 소명과 삶이 그리스도(메시아)이신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완전한 샬롬’을 주러 오실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소명의 사람’이 되는 ‘준비’를 잘 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아울러 오늘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전을 봉헌한 축성 6주년을 맞는 성당축성기념일입니다. 우리교회 머릿돌에는 주님, 사람들이 평화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라는 축복의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평화의 일꾼이 되도록 부름 받은 우리 소명을 잘 이루어가는 교회가 되도록 삼위일체 하느님께 우리를 의탁합시다. 감동이 있는 예배와 성령의 친교와 봉사를 나누며 우리교회가 이 지역에 꼭 있어야 할 존재의 이유를 사랑의 삶을 통해 밝히 드러내도록 합시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중에 우리교회를 섬기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별세한 이들과 착한 목자로 섬겼던 성직자들(정연우 안토니오, 안귀섭 애단, 이현우 바우로, 이철우 안드레, 고영돈 베네딕트, 고석영 바우로, 이수상 베드로, 이경래 베드로, 이호평 요한, 김기리 미리암, 민숙희 마가렛, 한상돈 마틴, 김기석 아모스, 나성권 시몬 사제)과 우리교회 출신의 성직자(오정열 애단, 오태민  아브라함, 오재민 다윗 사제)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기도

평화의 하느님,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어 회개의 세례를 베풀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광야의 외침을 귀 기울여 듣고, 주님께서 평화의 왕으로 다시 오실 때 부끄러움 없이 주님을 맞이하게 하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성전을 봉헌한 날을 기념하며 감사하나이다. 비오니, 이곳에서 예배드리는 모든 이들이 주님을 만나게 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친교와 봉사를 나누게 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11:1-10
  • 시편 – 72:1-7,18-19
  • 2독서 – 로마 15:4-13
  • 복음서 – 마태 3:1-12

대림 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완전한 샬롬을 주러 오실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소명(희망, 평화) 사람이 되시오입니다.

1독서는 ‘메시아가 오시어 성취하실 평화의 새 세상’을 예언하는 《이사야》입니다(참고 이사 35장, 61장). 이사야 예언자는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태어날 ‘메시아’를 상상합니다(1절). 하느님께서 이새의 보잘 것 없는 막내 ‘다윗’을 가장 높은 지위에 올리신 것처럼(사무 16:11~13), 제 2의 다윗이 그 가문에서 등장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윗 가문에 세워주실 평화의 임금, 즉 ‘메시아를 보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동시에 이 예언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날 한 ‘위대한 왕’(메시아)에 대한 이스라엘(인류)의 오래된 희망을 보여줍니다(참고 에제 37:15~28). ‘다윗의 그루터기’라고 하지 않고 ‘이새의 그루터기’라고 한 것은 메시아가 ‘겸손한’ 분임을 드러내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이새는 다윗 왕의 아버지이지만 다윗보다는 덜 유명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구약> 즉, <히브리 성경> 중에서 오늘 본문을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을 예언한 대표적인 구절로 재해석해 왔습니다(루가 1:69). 히브리어 ‘메시아’(מָשִׁיחַ)를 그리스어로 옮긴 말이 ‘그리스도’(Χριστός)입니다. ‘메시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구원자’(다윗 같은 통치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오셨습니다. 다윗 가문의 왕권은 아기 예수께서 ‘왕’과 ‘메시아’로 오시기까지 600여 년 동안 휴면(休眠) 상태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기 예수의 탄생은 마치 죽은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 것과 같았습니다.

이어서 《이사야》 예언자는 오실 메시아(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영의 권능들’을 받았는지를 묘사합니다(2절). 탄생하실 메시아 위에 ‘야훼의 영’이 머뭅니다. 악령이나 인간의 영이 아닙니다. 그런 영들로는 메시아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지혜의 영’, ‘슬기의 영’, ‘경륜의 영’, ‘용기의 영’, ‘지식의 영’, ‘경외의 영’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7가지 영의 권능(속성)들은 ‘성령’을 묘사합니다. 물론 성령은 이런 권능들 말고도 다른 속성이 더 있습니다. 단지 이사야는 ‘7’이라는 ‘완전수의 상징’을 가지고 ‘메시아’(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임을 보여줍니다.

The Tree of Jesse

사실 성령의 이러한 속성은 예수님의 본성에 대한 묘사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신 성자의 본성과 성령의 본성에는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기에 처음부터 성령의 모든 속성을 영원토록 간직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자기를 비워 ‘성육신’하셨을 때는 ‘성령의 권능’으로 채워지셔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하는 우리의 ‘영원한 모범’이 되셨고, 우리와 삶의 자리를 같이하시는 ‘지지자’가 되셨습니다.

다음으로 《이사야》 예언자는 오실 메시아가 ‘어떤 성품들’의 소유자시고, 어떤 통치자가 될 것인지를 묘사합니다(3~5절). “그는 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을 기쁨을 삼습니다.” 한마디로 ‘야훼를 사랑하는 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메시아(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따르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되 아버지의 일을 완전하게 하는 것을 음식으로 삼으실 정도였습니다(요한 4:34). 또 메시아는 오늘 시편에서 노래하는 것처럼(시편 72:2) ‘공정한 분’입니다. 다시 말해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한 ‘공정한 재판’을 하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왕들처럼 공의를 행한다면서 실상은 가난한 사람들을 속이는 그런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부자들, 가진 자들을 위한 공의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들이 갈망하는 공의가 주어지면 그런 사회야말로 가장 좋은 사회입니다. 우리시대의 정치인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더욱이 오실 메시아는 자신의 직무를 신실하게 수행하심으로써 메시아 왕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범죄자들을 처단하고 징계하는 분입니다. 이처럼 메시아는 정의로 허리를 동이고 성실로 띠를 띤 분입니다. 한마디로 메시아는 하느님과 사람들이 기뻐하는 통치자가 되실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사야》 예언자는 타락이전의 에덴동산의 모습이(창세 2:19~20) 메시아를 통해 성취될 것을 보여줍니다. 그가 써 내려간 다양한 묘사는 한 편의 판타지(fantasy)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메시아가 통치할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놀라운 비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 비전은 지상에 성취될 완전한 ‘샬롬’(שָׁלוֹם, 평화)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세상은 평화가 깨지고 교란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오시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 인간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들 사이에도 ‘샬롬’이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교는 초대교회 때부터 그 ‘완전한 샬롬’을 성취하러 오신(오실) 메시아(그리스도)가 예수님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완전한 샬롬’이 대림절기와 성탄절기 동안 말씀 나눔을 통해 우리가 듣게 될 중요한 ‘주제’들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가져오실 ‘완전한 샬롬’에 대해 좀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난 성지순례 때 일상에서 가장 많이 했던 인사가 “샬롬, 샬롬”입니다. 유대인들은 만나고 헤어질 때 최고의 ‘인사’와 ‘기원’으로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샬롬은 축복의 언어이기에 인색하게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샬롬, 샬롬” 이렇게 반복해서 인사합니다. ‘평안’, ‘평화’라고 주로 번역하기에 단지 개인이 불완전한 역사 속에서 순간순간 경험하는 ‘심리적 차원’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물론 그런 차원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종잡을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이 질서 속에서 다스려지기를 원합니다. 순간순간 제 멋대로 손님처럼(결코 주인은 아닙니다) 일어나는 ‘생각’에 시달리지 않고, ‘감정’도 혼란스럽지 않은 그런 조화로운 상태(고요, 안식, 안정, 믿음직함, 걱정 없음)를 원합니다. 실제로 명상이나 마음수련을 통해 이런 차원을 경험할 수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빠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샬롬’은 순간순간 경험하는 개인의 내면의 상태(평안, 고요, 안식) 그 이상입니다. 구약성경은 ‘샬롬’을 ‘온전함’(부분이 아닌 전체성, 조화, 질서), 건강의 결핍이 없는 ‘안녕’과 ‘치유’, ‘번영’(축복, 풍요, 부(富), 복지, 형통, 성공), ‘전쟁’(갈등, 폭력)이 없고 평화로운 상태(안전, 우호적인 관계, 우정, 언약, 화목, 화해, 화합, 공감), ‘기쁨’(만족, 행복), ‘정의’, ‘선’(善), ‘사랑’, ‘구원’(해방, 구속), ‘새로운 창조’ 등 개인의 심리적 차원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상황’에 사용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성경》은 불완전한 역사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내적 고요의 상태만을 진정한 의미의 ‘샬롬’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샬롬’은 불완전한 역사의 시련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이 던진 ‘삶의 의미 물음’에 대한 ‘공동체적인’ 대답입니다. 그들이 희망하던 ‘하느님의 구원의 상징’이 ‘샬롬’입니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이스라엘이 충실히 지킬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 즉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종말’에 ‘샬롬’(평화)이 완전히 실현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렇듯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이해할 수 없으며, 종말론적인 희망을 담은 총체적인 말이 ‘샬롬’입니다. 개인의 실존을 넘어 개인과 공동체, 인간과 자연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구원의 상태’입니다. 창조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을 포괄하는 완벽히 ‘관계적인 용어’입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생명력’이 넘치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말로 바꾸면 ‘생태계의 평화’인데(이사 11:6-16), 인간과 동물과 모든 피조물이 타락 이전 에덴동산에서처럼, 해함과 위험과 착취와 다툼 없이 ‘자신의 생명력’대로 온전히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모든 창조 세계를 포괄하는 ‘하나인 공동체’, 즉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 바로 ‘샬롬’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샬롬’을 선물 받고 싶어 합니다. 사실 “인간 실존에게는 평화가 없다”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것을 철저히 ‘인정’해야 합니다. ‘평화’(구원)는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진정한 ‘샬롬’(치유)을 우리에게 줍니다. 주님이 주시는 ‘샬롬’을 통해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본래의 모습’을 ‘회복’합니다. 우리 본래의 모습은 ‘빛이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또 우리는 공동체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진정한 가족, 즉 몸의 모습을 회복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한마디로 ‘샬롬’은 “한 생명이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존귀함’을 ‘회복’하고 ‘온전한 삶의 길’을 걷는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삶’(생명과 조화)인 ‘샬롬’을 선물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샬롬’은 우리가 성찬례를 봉헌하기 위해 모일 때마다 주님의 선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이 식탁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의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우리의 영혼은 치유되고, 새 힘을 얻습니다. 우리는 ‘샬롬’을 얻기 위해 더 이상 다른 곳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 이 모습 이대로 나오면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우리를 위한 더 나은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뭐라고 평가하든 상관없이 우리의 고통스럽고,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 그대로를 하느님께 믿음을 담아 기도로, 찬미로 내어드리면 됩니다. 참으로 주님은 우리의 슬픔을, 우리의 고통을, 우리의 억눌림을, 우리의 죽음을, 기쁨과 치유와 자유와 생명으로 바꾸어 춤추게 해 주시는 ‘샬롬’의 근원이십니다.

부디 이 성찬례를 통해 빛의 자녀이자 교회 공동체인 우리가 생명과 평화와 자유와 사랑을 가득히 선물 받아 이 세상에 ‘샬롬’을 가져오는 거룩한 도구로 파송받기를 축복합니다.

《시편》은 ‘솔로몬의 노래’라고 제목이 붙은 <72>입니다. 그 제목은 이 노래가 ‘솔로몬을 위한 기도’라는 뜻입니다. 왕의 ‘대관식’이나 해마다 있던 ‘신년축제’ 때 왕실 행사를 위해 사용된 경축의 노래입니다(참고 시편 2편). 오늘은 1독서 《이사야》와 상응하는 부분만 발췌한 배정입니다(1~7,18~19).

기도 첫머리의 ‘임금’이나 ‘임금의 아들’은 ‘왕’ 자신을 뜻합니다(1절). 전통적으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이 ‘왕’이 ‘메시아’를 암시한다고 재해석해 왔습니다. 따라서 이 노래는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서 한 이상적인 왕, 즉 ‘메시아’를 세워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로써 ‘이스라엘’이 현실에서 어떤 ‘왕’을 기대하고 있었는지가 명백해 집니다(1절). ‘약자들’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간직한 ‘왕’입니다(2절). 왕이 ‘올바른 통치력’을 행사하여 ‘공의’(공정과 정의, 인권존중)를 실현하고(2,4,12~14절), 자연을 포함하여 ‘온 세상’에 참된 ‘샬롬’(평화)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3절). 세상 나라는 흥망성쇠를 반복하더라도 그의 왕조는 성공을 거두어 영원하기를 기도합니다(5~7,15,17절).

왕이 올바르게 통치력을 행사하면 그 ‘명성’(名聲)이 땅 끝까지 이를 것입니다(8~11,15,17절). ‘세상의 왕들’도 찾아와 경배할 것이며 ‘모든 민족들’이 섬기게 될 것입니다. 오늘 시편으로는 노래하지 않았지만 《마태오복음》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들의 방문’ 예언도 찾을 수 있습니다(10~11,15절). 1독서 《이사야》가 예언한 모든 민족들로 이루어진 ‘메시아 왕국’이 그 왕을 통해 성취될 것입니다. 마지막 두 절은(18~19절) 본래 이 시편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42편>에서 시작한 《시편 2권》을 마감 짓는 일종의 ‘작은 찬미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공정’과 ‘완전한 샬롬’을 실현하여 모든 민족이 섬기게 될 그 이상적인 왕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기, 완전한 ‘샬롬’(샬롬)을 성취하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대림절기에 《시편》으로 배정된 이유입니다.

2독서는 ‘메시아 왕국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사도 바울로의 서신인 《로마서》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쁜 소식’(복음)에 비추어 《성경》을 해석한 탁월한 교사요,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당시는 <신약>이 있기 전이니 그 《성경》은 당연히 <히브리 성경>, 즉 <구약>을 가리킵니다. 분명 바울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라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히브리 성경>을 해석했습니다. 주의할 점은 이것입니다. 바울로가 복음 전파의 목적을 위해 그렇게 했다고 해서 우리들마저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성경》을 자기 목적에 맞게 해석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늘날 이단들이 하는 짓거리가 그런 것입니다.

그가 선교하던 시절 로마에 있는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 출신의 신자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로는 자신의 탁월한 성경해석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이 조화를 이루어 ‘복음의 증인’이 되도록 그들을 ‘격려’할 필요가 있었습니다(4~6절).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받아들이신 것처럼, 그들도 서로를 받아들여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면합니다(7절).

그런 다음 <구약>을 인용함으로써(차례대로 시편 18:49; 신명 32:43; 시편 117:1; 이사 11:10)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향한 하느님의 위대하신 ‘구원 계획’을 주장합니다(9절b~12절). 정말이지 그는 ‘보편주의적인 관점’에서 <히브리 성경>을 해석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먼저 그는 ‘메시아’가 ‘유대인 출신’이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8절). 다시 말해 예수께서 유대인으로 태어나신 이유를 정당화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방인들’ 역시 하느님의 ‘구원’ 계획(목적)에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전 생애를 헌신했습니다(9~12절; 로마 3:29). 그를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유다인과 이방인 모두의 보편적인 구원, 이것이 그가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로 역시, 《이사야》 예언자나 《시편》 기자처럼, 다가올 세상에 대한 ‘희망찬 비전’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일치’, ‘평화’, ‘정의’가 차고 넘치는 ‘메시아 왕국’(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전 말입니다. 바울로는 그 비전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열성적으로 선교했습니다. 끝으로 그는 기도합니다. ‘희망의 하느님’께서 ‘로마’에 있는 교우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안’에서 오는 ‘온갖 즐거움’과 ‘평화’로 충만하게 해 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희망’이 넘치게 해 주시기를 말입니다. 대림절기를 보내는 저 역시 이런 지향으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제 복음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예수님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의 선포를 전하는 《마태오복음》입니다. 대림 2주일과 3주일 복음서는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한 세례자 요한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무슨 의도로 두 주간에 걸쳐서 세례자 요한의 삶을 묵상하게 하는 전례독서 배정일까요? 그것은 그가 ‘소명을 발견한 사람의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의 소명과 삶이 그리스도(메시아)이신 예수님과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나자렛 사람’ 또는 ‘나자렛 예수’라 강조해서 부릅니다(마태 2:23; 21:11; 26:71; 마르 1:9, 24; 10:47; 14:67; 16:6; 루가 1:26; 2:39,51; 4:16,34; 18:37; 24:19; 요한 1:45~46; 18:5,7; 19:19). 복음서에 여러 번 등장하니까 <구약(히브리 성경)>에도 등장하는 꽤 유명한 동네인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에는 ‘나자렛’이라는 지명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이유는 정말 보잘 것 없는(중요하지 않은) 작은 동네였기 때문입니다(요한 1:46).

‘나자렛’의 어원을 찾을 수 없는 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 이론을 주장합니다. 하나는 ‘봉헌된 자’라는 뜻인 히브리어 ‘나지르’(나지르인)에서 왔다는 주장입니다(판관 13:5, 민수 6장). 다른 하나는 1독서 《이사야》 말씀처럼 ‘햇순’(가지, 메시아의 상징)을 뜻하는 히브리어 ‘내체르’에서 왔다는 주장입니다(이사 11:1). 우리 귀에는 ‘내체르’보다는 ‘나지르’라는 발음이 나자렛과 더 비슷하게 들립니다. 이 단어에 근거해 복음서가 예수님을 ‘나자렛 사람’이라 강조해서 부른 이유를 두 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별’(聖別)되어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으로 예수님을 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 지명을 통해 예수님이 《이사야》에 예언된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나온 ‘햇순’(가지), 즉 ‘메시아’임을 알리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나자렛’에 계실 때,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길을 선구자처럼 준비한 숭고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세례자’라는 별칭과 함께 불리는 ‘요한’입니다. 《루가복음》에 따르면 그는 즈가리야의 아들이자, 하느님의 ‘특사’가 되라는 부름을 받기까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루가 1:80).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살고 있던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루가 3:2). 루가는 그곳이 ‘어느 광야’인지 침묵하지만 마태오는 그곳이 ‘유다 광야’(마태 3:1)라고 ‘특정’합니다. 마태오가 ‘유다인 지역’이라고 특별히 명시하는 것으로 봐서 《마태오복음》에 강하게 흐르는 민족주의적인 색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광야’는 특별한 상징입니다. ‘불붙은 떨기’ 앞에 서 있던 모세처럼(출애 3:1~12), 자유의 땅을 향해 가던 출애굽의 선조들처럼, ‘광야’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만나는 신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출애굽기》 이후에도 <구약>은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만났던 장소를 ‘광야’로 특정합니다(열왕상 19:4~19).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광야’는 ‘하느님이 계신 곳’이자 ‘하느님의 위대한 역사를 떠올려주는 곳’입니다.

물론 이러한 ‘상징’은 위험합니다. 누구에게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사두가이파 사람들 같은 제도권 종교인들’, 즉 ‘예루살렘 성전체제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이 친히 ‘임재’하시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곳’입니다. 다른 곳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기득권자들에게나 좋은 ‘예루살렘 성전’에 갇혀 계실 분이 아닙니다. 팍팍한 삶을 사는 이들, 화려함을 자랑하는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밀려난 이들은 다른 세상으로 눈을 돌립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곳’으로 면면히 전해내려 오는 ‘광야’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수 세기를 이어온 ‘광야의 상징’은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더 공고해집니다. 따라서 자신이 ‘참 예언자’임을 주장할 수 있으려면 그는 반드시 ‘하느님이 계신 곳인 광야로부터’ 와야 합니다. 이것이 공관복음서 모두가 공생애 첫머리에 예수님의 ‘광야 시험’을 배치한 이유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메시아’조차도 ‘광야’에서 온다고 믿을 정도였습니다(마태 24:26).

어느 날 이 조건에 딱 어울리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루가복음》에 따르면 그는 잠깐 동안 ‘광야’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기서’ 살아왔습니다(루가 1:80). 마태오는 세례자 요한이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고 묘사합니다. ‘메뚜기’는 곤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쥐엄나무 열매’를 말합니다. 메뚜기가 히브리어로 ‘하루브’(harub)이지만 쥐엄나무도 ‘하루브’(harub)라 불리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 쥐엄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뜻입니다. ‘들꿀’도 벌이 모아둔 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추야자 열매’가 떨어져 돌 틈에 낀 것을 말합니다. 지난번 제가 성지순례  다녀와서 맛보게 해 드린 대추야자가 바로 그 들꿀입니다. 달착지근한 맛이 정말 꿀맛 같았지요. 아무튼 그의 옷차림에 대담했던 엘리야 예언자의 모습 포개집니다(2열왕 1:8; 말라 4:5; 루가 1:17). 이러한 차림새와 식단은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 체험 속으로 자신을 투신하며 지속적으로 수행해 왔다는 뜻입니다. 다른 한 편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하느님께서 직접 입히고 먹이신 것처럼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께서 직접 입히고 먹이셨다는 뜻입니다.

마침내 거기서 그는 ‘신적 체험’을 통해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자신의 ‘소명’(召命)을 확인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의 ‘소명’(召命)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는 일”입니다(칠십인 역 이사 40:3). <복음서> 모두는 세례자 요한이 《제 2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나타났다고 증언합니다. 구약학계에서는 《이사야》를 제 1이사야(1~39장), 제 2이사야(40~55장), 제 3이사야(56~66장)로 구분합니다. 한마디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입니다. 이것이 그의 정체성입니다.

그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베풉니다. 그가 베푼 ‘세례’는 메시아가 오실 것에 대비한 진심어린 ‘회개’와 ‘도덕적 쇄신’의 상징이었습니다. 그가 외친 선포는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한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메시지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특히 가혹했습니다. 먼저 그가 선포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 – 마태 3:1

아주 구체적이고 명백한 메시지입니다. ‘회개’와 ‘임박한 하늘 나라’가 그가 선포한 메시지입니다. ‘회개’가 필요한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죄’를 가리키는 말이 참 많습니다. 일일이 살필 것 없이 총칭해서 “주어진 길에서 벗어났다”로 새기면 무리가 없습니다. ‘어떤 길’을 말하는 것일까요? 자신이 ‘마땅히 가야할 길’입니다. 흔히 ‘소명’(召命)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소명’을 ‘망각’하고(벗어나서) 살아가는 삶이 ‘죄’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길을 알려하지도 않고, 찾으려 하지도 않는 삶이 ‘죄’입니다. 알았다 하더라도 그 길 위에 있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주님을 망각한 삶’이 ‘죄’입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의미로 연결 되냐면, “본래의 나를 잃어버렸다”와 똑같은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큰 죄는 ‘본래의 나’, ‘소명의 나’를 ‘잃어버리고 사는 삶’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전인 나’를 ‘잃어버린 삶’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나’를 ‘잃어버린 삶’입니다. 그 성전에 하느님이 거하셔야 하는데 ‘하느님이 없는 삶’입니다. 하느님과 하나임을 잊고 ‘분리되어 살아온 삶’입니다.

다음으로 ‘회개’(μετανόια, 메타노이아)란 무엇입니까? 어떤 이들은 ‘회개’를 ‘감정’에 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후회나 유감처럼 말입니다. 물론 회개는 ‘감정’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씀 드리면 회개는 감정을 넘어선 ‘행동’에 관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친 것은 “우리가 소명에서 벗어나 살아 온 일을 후회하라”거나 “유감으로 느껴라”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회개’는 소명(召命)에서 벗어난 길에서 돌아서는 ‘방향의 전환’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당연하게 여기며 안주(安住) 해 온 ‘이기적인 세계관’(신앙관)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온 과거와의 의도적인 ‘단절’입니다. ‘이기적’으로 살아 온 자신의 ‘오래된 자아’를 과감히 버리고(자기를 비우고), 자신을 넘어서는 전혀 ‘새로운 자아’로 ‘대치’하는 일종의 ‘혁신’(革新)입니다. ‘불편한 진실’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편견’과 ‘선입견’과 ‘고집’을 ‘직시’(直視)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원하지도 못할 지식(설명)과 정보를 부여잡고 있던 손을 펴는 것을 말합니다. 좀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자신에 대한 ‘무지’(無知)와 ‘무식’(無識)을 철저히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회개’란 그동안 당연시하며 타성에 젖어 살아온 자기 삶을 깊이 성찰하고, 지금까지의 생각과 말과 행실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을 철저히 바꾸는 일입니다.

자,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우리의 마음을 ‘쇄신’(혁명)해야 합니까? 그 기준이란 ‘임박한 하늘 나라’입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 나라’와 같은 뜻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는 십계명의 3계명 때문에 유대인이었던 마태오가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쇄신의 기준인 하늘 나라를 ‘죄’의 정의와 연결시켜 말씀하면, 하느님이 우리 각자에게 심어주신 ‘소명’(召命, 걸어야할 인생길)입니다. 은유적으로 말씀 드리면 하느님이 우리 마음에 심어놓으신 ‘하느님의 형상’인 ‘거룩한 씨앗’입니다. 시시한 나를 넘어 ‘위대함’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씨앗’입니다. 깊은 성찰을 통해 하느님이 주신, 자기만이 이룰 수 있는 그 ‘소명’(거룩한 씨앗)을 발견(통찰)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다시 일어서 걸어가는 삶이 ‘회개’입니다.

‘순간’(자연적 수명, 크로노스의 시간)을 사는 우리가 자신의 삶을 통해 꼭 실현해야할 하느님의 요구(뜻)가 있음을 자각하고 그것을 향해 돌아서는 삶이 ‘회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살아내야 할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義)가 있음을 자각하고, ‘수명의 시간’(크로노스)을 그 일에 투신하기 위해 돌아서는 삶이 회개입니다. 그렇게 해서 ‘수명의 시간’(자연적 시간)을 ‘생명의 시간’(카이로스, 질적인 시간)으로 만드는 일이 ‘회개’입니다. 익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불편하기까지 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가치’에 스스로의 삶을 비추어보고 세상의 가치를 버리는 일이 ‘회개’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자기 소명’을 찾아 나서라는 ‘거룩한 물음’, ‘영적 깨달음’으로의 초대가 ‘회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시시한 삶을 살아가도 좋은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 일을 위임 받고 살아가는 ‘거룩한 존재’라는 자각 없이는 ‘진정한 회개’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회개’를 몸으로 표현하는 행동이 무엇입니까? ‘세례’입니다. 본래 ‘세례’는 물속에 몸을 완전히 잠기게 합니다. 옛 자아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물’은 전통적으로 ‘정화’(淨化)를 위한 중요한 의식의 도구였습니다. ‘혼돈’을 상징하는 물에 몸을 잠기게 함으로써 그동안 자신이 소중하게 여겨온 이전의 ‘이기적 가치들’을 모두 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렇게 해서 새롭게 출발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물’은 오래된 자아를 새로운 자아로 만드는 일종의 ‘통과의례의 도구’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오늘’ 희망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롭게 ‘출발’한다는 상징입니다(로마 6:3~10). ‘순간’에서 ‘영원’에로 돌아서는 ‘위대한 행동’이 ‘세례’입니다. 자기 파괴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본능과 욕망을 넘어서 우리 안에 심어진 ‘하느님의 형상’, ‘영적 가치를 회복하는 첫 걸음’, 거기에 ‘세례’가 자리합니다. 나 아닌 나로 살아온 우리가 ‘하느님께 소명 받은 나로 태어나는 그 첫 자리’에 ‘세례’가 있습니다. 본능을 따라 살아가는 단지 동물적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형상을 실현할 인간으로 태어나는 첫 자리’가 ‘세례’입니다. 자신이 인생에서 꼭 수행해야할 ‘가장 소중한 일’, 자신이 걸어야할 ‘자기 몫의 길’, 즉 ‘하느님의 소명을 발견한 자의 첫 걸음’이 ‘세례’입니다.

이처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한 세례자 요한에게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습니다(5~6절). 그의 사역은 유대민족들로부터 놀라운 반응을 얻었고, 대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이 장면은 아주 감동적입니다. 왜냐하면 개인이 ‘자발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대속죄일’에는 집단적인 죄의 고백이 있었고, 특수한 경우에 한해 개별적인 죄의 고백이 있었지만(민수 5:7), 각 사람이 자기부담을 덜기위해 누가 강제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임박한 하늘 나라, 즉 오시는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기꺼이 뭔가를 하려는 사람들이 이어졌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의 영향력은 그가 죽은 이후로도 대단했습니다(사도 18:25; 19:3).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예수님보다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 더 많이 썼을 정도입니다.

이어지는 장면은 세례자 요한과 바리사이파 사람과 사두가이파 사람들 사이의 대립입니다(7~12절). 그들은 1세기 유대교의 리더십을 장악하고 있던 거대 경쟁 집단입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광야’에서 세례 운동을 펼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어째서 그가 그런 일을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특히 자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라면서(요한 1:19~21,25) 정작 자신들을 불충실하다고 공공연히 비난하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큰 인기를 끌던 세례자 요한을 회유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려면 우선 세례 운동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들이 오는 속셈을 단박에 알아보았습니다(요한 1:19,24). 하느님의 영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기득권자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다가올 심판과 징벌’을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심판과 징벌이 ‘야훼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이방인들, 즉 자신들의 원수들을 향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하느님의 심판 앞에서 자신 만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신 선민인 그들과는 심판이 상관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그들의 신앙 유산, 즉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민족주의(혈통)를 내세우는 짓을 그만 두라고 경고합니다. 진정으로 뉘우치는 일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은 그들을 향해 자신을 회유하려 들지 말고,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이라’고 불호령을 내립니다. 다시 말해 ‘진정한 회개’는 각자의 ‘삶의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정말이지 그들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서둘러 ‘회개’해야 합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을 정도로 촉박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정체성과 행동의 이유를 다시 한 번 밝힙니다(11~12절). 그가 물로 세례를 베푼 이유는 회개를 위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죄사함’이 아니라 ‘회개’를 위한 것입니다. 반면에 그의 뒤에 오시는 분, 즉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 세례야 말로 ‘죄사함’과 ‘구원’(심판)을 위한 것입니다. 이어서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그리스도’(메시아)이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인식합니다. 자신은 ‘그리스도’(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고 증언합니다. 《마르코복음》과 《루가복음》은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증언합니다. 겸손의 표현입니다. 이것과 비교하면 《마태오복음》은 ‘지극한 겸손’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자신은 ‘그리스도’(메시아)를 위해 가장 낮은 일조차도 행하기에 합당치 않다는 선포입니다. 사실 그의 고백은 지극한 겸손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한마디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초대교회는 세례자 요한을 따르던 공동체와의 관계를 정리했습니다.

끝으로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메시아)가 오실 때를 준비를 하라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심판’하러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추수하는 농부처럼 손에 ‘키’를 들고 계십니다. 농부는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리기 위해 바람을 등지고 ‘키질’을 합니다. ‘키질’을 하면 같이 붙어있던 알곡과 쭉정이가 분리됩니다. ‘알곡’은 안으로 들어오고 알곡이 제거된 ‘쭉정이’는 바람에 날려 ‘키’ 바깥으로 떨어집니다. 농부는 바닥에 떨어진 쭉정이를 불에 사릅니다. 여기서 ‘불로 세례를 베푼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심판’입니다. 사실 불은 그 자체로 심판의 상징입니다(이사 1:25; 4:4; 즈가 13:9; 말라 3:2). 다 태우고 난 순수한 가루가 ‘재’인 것처럼, 불은 순결한 자는 정화시키되 악인은 쭉정이처럼 멸망시킵니다. 따라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회개하지 않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그리스도께는 쓸모없는 쭉정이일 뿐입니다.

오늘날도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사람들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없을까요? 자신들은 하느님의 심판에서 자유롭다고 여기는 독선과 착각에 빠진 그리스도인들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세례자 요한은 꼭 필요합니다. 슬프지만 이것이 진실입니다. 갈수록 그리스도교를 희화화 시키는 몰지각한 일부 신자들이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대적 과제’에 ‘역행’하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꼭 어디에 모인 이들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아도 여러분은 이미 마음속에 짐작하고 계실 것입니다. 정치적 지향은 다르고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자는 세례자 요한처럼 새로운 세상을 가져오는 길을 준비하는 이들입니다. 자신들을 둘러싼 ‘시대적 과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여 새 세상을 가져오는 역사의식이 투철한 이들이어야 합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마태오’가 오늘 인용한 《이사야》 예언서를 어떻게 묵상하셨습니까? 중요한 상징어들이 등장합니다. “광야, 소리, 길”입니다. 도대체 이 상징어들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합니까? 문자적으로만 알아듣고 끝나도 되는 것입니까? 저는 여기 등장하는 상징어들이 ‘마음의 길 고르기’라는 것을 기도 중에 알아차렸습니다. 그 상징어들을 바깥이 아니라 마음 안으로 가져오십시오. 우리 마음에는 주님의 성령께서 현존하시기에 이 모든 상징어들을 통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듣는 일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사실 대림절기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성탄 메시지’를 내면에서 듣기 위함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하느님의 한 말씀을 들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묻고 듣는 기간이 대림절기입니다. “주님, 올해 저희에게 주시는 성탄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주님, 올 해 저희에게 주시는 ‘비전’은 무엇입니까? 한 말씀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기간입니다.

이제부터 여기에 등장하는 중요한 상징어들을 ‘기도’로 가져가 보겠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을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광야’가 유대인들에게 갖는 상징은 위에서 언급했습니다.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가 그 ‘광야’를 기도로 가져가 묻고 들으면 무엇을 상징할까요? 그것은 나의 ‘거친 마음 바닥’을 상징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있었다’는 말도 기도로 가져가면, ‘자신의 거친 마음의 바닥으로 들어가라’는 뜻입니다. 들어가면 무슨 일이 생깁니까?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는 은유를 통해 그 ‘거친 것들’에서 자신에게 하는 ‘소리들’이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내 안에 들어가면 거기서 듣고 보게 되는 ‘내면의 소리들’이 있습니다. 마음을 운행하는 ‘날 것’(the raw) 그대로의 소리들, ‘생짜 감정들’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소리’, ‘감정의 소리’, ‘싫어하는 것들의 소리’, 이런 소리들이 ‘거친 마음 바닥’을 운행하는 중입니다.

수많은 신자들이 ‘세례자 요한’에 익숙하다보니,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하면 다 ‘좋은 소리’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그 ‘소리들’은 자신에게 ‘불편한 진실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붙잡혀 살아 온 ‘기억과 감정들’, ‘기존의 인식’, ‘지식’, ‘관점들’, ‘허상’, ‘망상’, ‘공상’이 내 안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소리들을 그냥 버리면 안 되고,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가 됩니다. 그럴 때 그 내면의 소리들 ‘이면’(裏面)에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절망’이 오히려 ‘희망’임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결국 ‘긍정’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죽고 싶다”는 소리나 감정이 들렸다면, 그것은 “난,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잘 살고 싶어요.”라는 의미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 ‘갈망’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말한 것임을 알아들어야 하는 데, 그만 안타까운 시도를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내면의 소리들’이 들릴 때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물으면, 그 소리들의 이면(裏面)인 ‘참된 갈망’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그 ‘참된 갈망’ 때문에 그런 소리들을 말해 왔음을 기도 속에서 깨닫게 되고, 그 ‘참된 갈망’을 키워가게 됩니다.

이제 《이사야》 예언자는 자신이 들었던 그 모든 소리 이면(裏面)의 참된 갈망의 소리를 전해줍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여기서 말하는 ‘주의 길’은 주님이 오실 ‘마음의 길’입니다. 그 길을 닦고 고르게 하고픈 ‘마음의 소리’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고르게 하고, 어떻게 마음의 길을 닦아야 합니까?

‘고르게’ 해야 할 것은 ‘감정’과 ‘기분’이며 마음의 길을 ‘닦는 일’은 위에서 말씀드린 ‘기도’입니다. 신자들 중에는 ‘감정’과 ‘기분’을 따라 신앙생활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만나면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할 것인지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감정’과 ‘기분’을 ‘기도’로 가져가야 합니다. ‘기도’ 속에서 ‘감정’이 ‘감동’이 될 때까지, ‘기분’이 ‘기쁨’이 될 때까지 주님께 묻고 들으며 마음의 길을 닦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일로 ‘기분’(감정)이 좋다면, 기도 속에서 주님께 그 ‘기분’(감정)을 묻습니다. “주님, 제가 이 일로 왜 ‘기분’이 좋은가요? 이 일로 왜 기뻐하지요? 감정이 왜 이렇지요?” 이렇게 그 기분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들을 주님께 물어가면서 그 원인을, 그 이면(裏面)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 알아가야 합니다.

간혹 대화나 상담을 하다보면, 중요한 순간에 피식 잘 웃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동안의 마음공부를 통해 갖게 된 성찰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자신의 ‘불편한 진실들을 직면’해야 하거나 그것들을 ‘가리고 싶을 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이었습니다. 웃음이 가져다주는 ‘맹점’(모순)인데, 정작 자신은 그 모순을 보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순간들을 잘 알아차림하고 주님께 물어보십시오. “주님, 이 순간 제가 왜 피식 웃지요?… 이 웃음 이면에는 무엇이 자리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묻고 듣는 기도’는 일상에서 ‘감정’을 ‘감동’(감탄)으로, ‘기분’을 ‘기쁨’으로 ‘정돈’시켜 냅니다.

실제로 깊은 기도의 단계로 들어가려다 보면 오만가지 잡생각과 분심들, 잡감정이 갑자기 펼쳐지거나 떠오르는 단계들이 있습니다. 이런 단계들을 거칠 때, 기도 속에서 주님께 묻고 들어야 합니다. 사실 진정으로 ‘신뢰’하는 이가 주님께 묻고 듣는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깊은 신뢰’ 속에서 그 ‘생각’과 ‘감정들’이 ‘기도’ 속에서 ‘정돈’되는 일이 바로 주님 오실 길을 닦음이고, 길을 고르게 하는 일입니다.

이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 시작하는 1독서 《이사야》 본문은 ‘마음’으로 들어가는 ‘길 고르기’입니다. 자기 ‘가슴’으로 들어가는 ‘길 고르기’입니다. ‘감동’과 ‘감탄’과 ‘기쁨’이 있는 ‘가슴’으로 살아가려면 우선 ‘머리’로부터 ‘출애굽’ 해야 합니다. 본래 감정이나 기분은 가슴의 세계에 속합니다. 그렇지만 감정과 기분은 다른 것에 휘둘리기 쉽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것이란 대부분 ‘과거의 기억들’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정’이나 ‘기분’은 대부분 ‘과거의 사건들’(기억)에 휘둘립니다. 그래서 ‘성탄일’이 오기 전에, 다시 말해 이 대림절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호구조사’입니다(루가 2:1). ‘호구조사령’이 내려지자 요셉과 마리아도 그때까지 살던 ‘나자렛’ 동네를 떠나 유다 지방에 있는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루가 2:4). 이것은 자기감정과 기분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그 근원이 어디에서 출발한 것인지 ‘일생 돌아보기’를 하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뿌리’를 다시 한 번 보라는 뜻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자신이 붙잡혀 있는 그 ‘감정’이나 ‘기분’을 가지고 주님께 물어보십시오. “주님, 제 자신을 보여주세요. 이 감정(기분)은 뭡니까?” 그것이 기쁨의 감정이든, 슬픔의 감정이든 주님께 다 물어보십시오. 그렇게 하는 진짜 중요한 이유는 ‘성탄 메시지’를 듣기 위함입니다. 그 메시지를 들어야 대림절기로 시작한 한 해의 농사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메시지를 듣지 못하면, 그 듣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새로 시작한 올 해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을 잃어버린 것 같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한 해 농사를 짓기 위한 이 중대한 준비, 즉 ‘성탄 메시지’를 듣는 일과 관련된 본문이 오늘 복음이야기에 기록된 《이사야》 예언서의 “광야의 소리”인 셈입니다(이사 40:3).

대림절기를 살아가는 동안 틈틈이 주님께 ‘묻고, 들으십시오.’ 순간의 ‘감정’과 ‘기분’ 뿐 아니라 일상의 일들까지도 주님께 묻고 들으십시오. 주님께 물으면 우리는 분명 ‘한 말씀’ 듣고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샬롬’을 선물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도로 마음의 길을 닦고 고르게 하면, 다시 말해 주님이 마음에 오시면, 모든 사람(내 안에 통합되지 못한 채 분열된 자아들)이 ‘하느님의 구원’을 볼 것입니다(루가 2:29~32). 내 안에 통합되지 못한 채 분열된 자아들이 통합되어 한 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로마 15:5~6). 이것이 2독서 《로마서》를 기도로 가져갈 때 우리가 닿게 되는 더 깊은 가르침입니다. 기도로 마음의 길을 닦고 고르게 하면, 희망의 하느님께서 믿음 안에서 오는 온갖 기쁨과 평화를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로 마음의 길을 닦고 고르게 하면 희망의 하느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희망이 넘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자기 소명(召命)의 길’을 잘 걷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날 세례자 요한은 누구여야 합니까? 우리여야 합니다. 그는 ‘자기 소명’을 발견한 준비된 광야의 목소리였습니다. 우리는 회개를 통해 자신을 준비해 가고 있습니까? 대림 2주일과 3주일 복음서는 주님 오실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무슨 의도로 교회는 두 주간에 걸쳐서 세례자 요한을 묵상하게 하는 것입니까? 고행에 가까운 그의 기인다운 남다른 수행 태도 때문입니까? 아니면 기득권에 저항하는 그의 반문화적인 태도를 존경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두 주간에 걸쳐서 그의 삶을 묵상하는 이유는 그가 ‘소명을 발견한 사람의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의 소명과 삶이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삶이, 그의 소명이 의미 있는 이유는 오실 메시아(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대림절기에 예수님과 연결된 나 자신의 삶을 다시금 상기합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고, 자신이 발견한 그 소명을 향해 새로 출발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 오실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을 기억합니다. 우리 역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하는 또 한 사람의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합니다. 대림 2주간 사도 바울로의 기도처럼, 《성경》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격려를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성령의 능력으로 희망이 여러분에게 넘쳐흐르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해서 세례자 요한처럼, 사도 바울로처럼 ‘완전한 샬롬’을 주러 오실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소명의 사람’이 되는 ‘준비’를 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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