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 1. 대림1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교회력으로 가해 첫날을 시작하는 대림 1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이제까지 없었던 평화의 시대를 가져오실 그리스도를 희망하며 맞이할 준비를 하시오.’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 참 빛으로 내리신 임마누엘 예수님의 거룩한 탄생을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준비합니다. 이제까지 없었던 평화의 새 시대를 가져오실 그리스도를 맞이할 날을 희망하며 삶의 자리를 고요히 정렬합니다. 이 일을 위해 사제는 제단에 4개의 대림초를 준비하여 매주일 한 개씩 차례대로 밝히며 거룩한 순례로 초대합니다. 모두가 오시는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이 거룩한 영적 여정을 지금 여기서부터 잘 걸어가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본기도

신실하신 하느님,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시어 구원의 약속을 변함없이 지켜주시나이다. 비오니,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심판과 구원을 위하여 다시 오실 때 우리가 기쁨으로 맞이하도록 항상 깨어 있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2:1-5
  • 시편 – 122
  • 2독서 – 로마 13:11-14
  • 복음서 – 마태 24:36-44

교회력으로 가해 첫날을 시작하는 대림 1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이제까지 없었던 평화의 시대를 가져오실 그리스도를 희망하며 맞이할 준비를 하시오.’입니다.

1독서는 장차 도래할 ‘메시아 통치의 희망’으로 가득 찬 《제 1이사야》입니다. 흔히 《이사야》를 ‘구약의 복음서’라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역과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들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렌즈를 갔다댈 때 《이사야》가 그린 그 연속적인 그림이 아주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계시 받은 말씀입니다(1절). 제 1이사야는 ‘메시아’가 성취할 전혀 ‘새로운 미래’, 즉 ‘평화의 시대’를 봅니다. 쉽게 말해 하느님이 보내신 ‘구세주가 오시어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신다는 희망의 선포’입니다. ‘미가’ 예언서에도 똑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미가 4:1~3). 동시대에 활동한 미가 예언자도 하느님께 똑같은 계시를 받았다는 점은 그 희망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보증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야훼 신앙’에 기초한 ‘평화로운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꿈꾸곤 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하느님의 집’을 모신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새로운 미래’에는 ‘예루살렘’이 ‘정의의 수도(首都)’ 역할을 합니다. 《이사야》도 온 누리에 이루어질 ‘평화의 중심’으로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통해 ‘예루살렘’을 세워주시는 그 ‘결정적인 미래’를 내다봅니다.

장차 어느 날엔가 야훼의 집이 서 있는 산이 모든 멧부리 위에 우뚝 서고 모든 언덕 위에 드높이 솟아 만국이 그리로 물밀 듯이 밀려들리라. – 이사 2:2

‘메시아의 시간’이 오면 ‘하느님의 집’이 서 있는 ‘예루살렘’으로 만국백성이 물밀 듯 모여들 것입니다. 그들은 ‘정의의 수도’, ‘평화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통해 이루신 평화’를 소리 높여 노래할 것입니다(3절). 민족과 나라 사이에 갈등이 있더라도 ‘메시아’가 중재하실 것이기에 다시는 전쟁이 없고 모두가 평화롭게 살게 될 것입니다(4절). 서로의 생명을 파괴하던 도구가 생명을 살리는 도구로 바뀔 것입니다. 어떤 ‘전쟁’과 ‘무력’(군사훈련) 충돌도 용납되지 않는 완벽하게 관리되는 ‘평화의 새 세상’, ‘의로움의 새 시대’가 지상에 출현 할 것입니다. 그 평화는 ‘무력’(군사력)이 아니라 예언자가 선포한 대로 ‘하느님의 말씀’이신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3절).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이 보내시는 ‘메시아가 오시지 않는다면’, ‘메시아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집이 있는 예루살렘이 모든 멧부리 위에 우뚝 서는 일도, 만국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물밀 듯 모여드는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배우고 걷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고 초대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메시아가 오시지 않는다면’, ‘메시아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누구도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민족들과 나라들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모르기에 ‘분쟁’과 ‘분규’로 서로 ‘전쟁’을 계속할 것이며, 무장을 더 강화할 것입니다.

교회는 예언자들의 메시아 출현의 선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장차(미래에, 종말에) 오시어 새 시대의 평화를 이루실 ‘하느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합니다(요한 1:9).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길과 그 길을 가르치러 오신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언합니다(루가 2:32).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둠‘ 속을 헤매는 인생들에게 ‘참 빛’으로 오신 ‘진정한 통치자’라고 선포합니다(루가 1:79). 그리스도(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성육신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인생들은 어둠 속을 걸어가고 있을 것이라 당당히 선포합니다. 이처럼 ‘제 1이사야’는 이미 700여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을 예언한 셈입니다.

‘이사야’가 보았던 ‘메시아 통치의 희망’을 묵상하는 동안 남북분단의 비극을 겪는 우리 민족의 처지가 포개집니다. 우리 사회를 힘겹게 하는 ‘구조적 문제’의 근원에는 청산하지 못한 ‘친일의 잔재’와 ‘남북분단’이 자리합니다. 며칠 전 한미 방위비(주한미군 주둔비) 분담금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뉴스를 듣고서 마음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비단 저만이 느끼는 정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저는 꿈이 있습니다. 국방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날을 꿈꿉니다. 더 이상 미국이나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날을 꿈꿉니다. 우리 민족이 더 이상 원수가 아니라 형제자매처럼 지내는 날을 꿈꿉니다. 무기와 군대를 위해 사용되는 돈이 학교와 병원과 서민 주거와 청년들의 도전과 보다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데 사용될 날을 꿈꿉니다. 정말 이것은 꿈으로만 그쳐야 할까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우리의 노력을 평화의 주님이 과연 외면하실까요?

물론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내리셨다고 해서 《이사야》가 꿈꿨던 ‘완전한 평화’가 이 땅에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의 왕국, 하나의 세계에서만큼은 분명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왕국, 그 세계가 어디입니까? 바로 ‘내 마음의 왕국’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통치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입니다. 사실 내 ‘마음’보다 더 넓고 큰 세계는 없습니다. 내 ‘마음’보다 더 평화가 필요한 왕국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빛’으로 세상에 내리신 ‘평화의 왕’이십니다(요한 1:4,9).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주시는 분”이십니다(루가 1:79; 2:32). 지금도 우리 ‘마음의 왕국’에서 걱정과 불안과 염려의 어둠을 내쫓고 ‘평화’로 빛나고 계십니다. 그 뿐 아니라 ‘언젠가’(장차, 미래에, 종말에) 다시 세상에 오시어 예언자들이 선포한 그 ‘평화의 시대’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친히 제자들에게 약속하신대로 이 땅에 재림하시어 ‘완전한 평화의 왕국’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뿐 아니라 마음 밖의 세상에도 말입니다.

이렇게 ‘이사야’는 메시아가 통치하시는 영광스런 ‘평화의 새 시대’를 두 눈에 생생하게 그려줍니다. 그런 다음 “오, 야곱의 가문이여, 야훼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자”라고 촉구합니다(5절). 본문에는 그런 단어가 없지만 분명 이 촉구의 분위기는 ‘지금 당장’입니다. 나중에, 다음에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사야’의 눈에 계시를 담아 준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야곱의 가문이 야훼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야 할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이사야》 예언자가 줄기차게 외쳤던 대로 ‘불순종’을 버리고 하느님의 말씀(계명, 계약)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거짓예배, 종교적 위선, 우상숭배, 동맹국(同盟國) 의지, 사회적 부정과 부패를 버리고 하느님께로 온전히 돌아오는 삶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예배생활, 사회적 정의의 실천, 가난한 이들과 약자들에게 손을 내밀고 돌보는 삶입니다.

우리의 궁금증은 《이사야》가 호칭한 ‘야곱의 가문’이 오늘날은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아시다시피 야곱은 하느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하신 ‘아브라함의 손자’입니다. ‘야뽁’ 나루에서 있었던 천사와의 씨름을 통해 야곱은 ‘하느님의 복’을 사모하는 ‘이스라엘’로 거듭납니다(창세 32:22~29). 훗날 그의 후손들, 즉 육체적이고 혈통적인 ‘야곱의 가문’은 창성하여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느님을 위한 제사장들의 왕국, 거룩한 나라’가 되는 계약을 맺습니다(출애 19:3~6; 신명 4:37~38; 7:6~8). 이름 하여 ‘시나이산 계약’이고, 그 중심에 ‘모세’가 있습니다(출애 24:1~11; 34:10,27~28). 그 선택은 그들이 잘 나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일방적 사랑’ 때문입니다.

육체적(혈통적)인 그들이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 즉 이스라엘로 계속 남아있기 위해서는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해야 했습니다(신명 4:1,6~8,23a,32~40). 모세는 죽기 전, 그들이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할 때는 선택된 민족, 즉 이스라엘로서 축복을 받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민족이 재앙을 당하고 끊겨나갈 것이라 경고했습니다(신명 4:23b~28; 7:9~13; 31:14~29). 안타깝게도 육체적(혈통적)인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 주신 ‘시나이신 계약’에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하느님의 법과 진리(구원)의 말씀을 전파하기 보다는 ‘불순종’하며 ‘반역’의 길을 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돌이키기 위해 계속해서 고난을 허락하시고,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교훈과 책망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고 오히려 예언자들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느님은 그들을 ‘아시리아’와 ‘바벨론’ 제국의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모세의 ‘경고’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와 잠깐 동안 성전을 재건하고 야훼 신앙을 회복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성전과 제사법은 더 이상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될 수 없을 만큼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은 그들에게 ‘죄사함’(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을 얻는 새로운 ‘구원의 길’(새 계약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은 성전이나 제사법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일숙한 말로 하면 ‘율법’을 지키는 ‘공로’에 근거하지 않습니다(로마 9:30~32). 그 ‘구원의 길’은 하느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어 오시는 ‘성육신’이었습니다(루가 1:76~77). 다시 말해 ‘예수님’을 ‘그리스도’(구세주)로 영접하는 ‘믿음’을 통해 얻는 ‘의’(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새 계약)였습니다(로마 9:30~32). 그러나 목이 굳은 그들은 여전히 하느님이 보내신 ‘구세주’를 거절하고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 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이 예언한 것처럼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유다민족은 세계로 흩어지는 종말의 운명을 맞이했습니다(루가 19:41~44). 그렇게 해서 구약의 육체적(혈통적)인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법과 진리(구원)의 말씀을 세상에 전파할 ‘선민’(選民), ‘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할 자격을 상실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마련하신 ‘새 계약’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한 ‘야곱의 가문’은 더 이상 육체적(혈통적)인 이스라엘을 가리키지 않게 되었습니다(로마 2:28~29). 오히려 ‘새 계약’으로 세워진 ‘하느님 백성’(유다인과 이방인의 구별 없이) 공동체인 ‘교회’야 말로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양자’로 선택되고 입양된 ‘교회’야 말로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며, 하느님이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 2:9a). 교회야 말로 하느님이 세상에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택하신 ‘야곱의 가문’이 되었습니다(1베드 2:9b~10; 로마 8:15; 11:17; 갈라 6:15~16; 히브 8:9~10). 교회야말로 하느님이 사랑하시고 선택하신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이제 야곱의 가문인 지상의 ‘교회’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야훼의 빛’, 즉 ‘참 빛’이시요(요한 1:4,9), 구원의 태양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루가 1:78). 다른 빛이 아닙니다. ‘예수’라는 ‘참 빛’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자신은 이미 ‘참 빛’ 속에 살고 있다고 자신하기보다는 고요히 성찰해 보십시오. ‘참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오시기 전 우리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우리는 “죽음의 그늘 밑 완전한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습니다(루가 1:79).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온통 어둠이었기에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분간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은 완전한 어둠 속을 헤매지 않았다고 항변하고 싶을 것입니다. ‘지식인’으로 ‘교양인’으로 살아왔다고 말씀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상대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박사학위를 받았든, 석좌교수의 명예를 얻었든 그런 상대적 지식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는 어둠일 뿐입니다. 어둠 속이기에 진짜 배워야할 인생의 ‘진리’를, 걸어야 할 ‘구원의 길’을 구별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자신의 ‘불편한 진실’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참 빛’이 없는 어둠 속이기에 눈이 있어도 자신의 죄악을 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둠 속에서는 자신의 진짜 죄악이 보이지 않기에 자신을 문제 삼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참 빛’이 우리에게 내리심으로 우리는 비로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명이신 하느님을 떠나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 빛’이 비쳐옴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낭떠러지 바로 앞에까지 와 있었음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탕자처럼 우리가 도망쳐 나온 ‘아버지의 집’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 빛’이 우리의 ‘무지’를, 우리의 ‘죄악’을,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 자신을, 우리의 ‘불편한 진실’을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크고 무겁고 추한지 ‘참 빛’이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진짜 배워야할 인생의 ‘진리’를, 걸어야 할 ‘구원의 길’을 식별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내면이 수많은 ‘자아’로 분열하여 분쟁과 다툼과 전쟁 속에 살고 있음을 ‘참 빛’을 통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전쟁하고 있는 어리석은 나를 ‘참 빛’이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참 빛’은 어둔 세상이 나로 하여금 볼 수 없게 했던 ‘진짜 진실’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가 ‘봐야만할’ 진실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어둔 세상은 덮으려 했지만 참 빛은 더 많이, 더 깊이 나의 ‘진실’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빛을 사람들은 ‘사랑의 빛’이라 부릅니다. 그 ‘사랑의 빛’은 본래 내가 누구인지, 누구에게서 왔는지 보게 해 주셨습니다. 내가 어둠의 자녀가 아니라 ‘빛의 자녀’라는 진실을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정말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 ‘참 빛’이십니다. 2천 년 전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사랑의 빛’이십니다. 우리를 “죽음의 그늘 및 어둠”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오신 ‘구원의 빛’이십니다.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아니 우리가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죄악들을 다 가져가신 구세주십니다. 감추고 싶었던 우리의 ‘죄악들’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구세주께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공연히 수치와 굴욕과 모욕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이사 52:13~53:12; 사도 3:18). 인류를 위하여 그 모든 죄악들을 당신의 몸에 지니셨음을 볼 수 있도록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가장 높은 산, ‘해골산’에서 인류를 위한 단 한 번의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어 죄사함의 피를 흘리고 죽으셨습니다(루가 23:33; 히브 9:26~28; 10:23~24).

그러나 ‘참 빛’은 다시 솟아올랐습니다(사도 2:23~24,32; 3:15; 필립 2:8~9). ‘부활’하신 예수님의 ‘참 빛’이 우리에게 비쳐올 때에 우리는 그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악을 대신하신 ‘참된 진실’을 보았습니다(이사 53:5~6,8,12; 1고린 15:3).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참된 성전’이심을 보았습니다(요한 2:21~22). 거기서 모든 ‘분쟁’과 ‘분규’와 ‘전쟁’이 끝나고 비로소 하느님과 인간과 만물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졌음을 보았습니다(에페 2:13~19).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과 지옥을 우리를 위해 극복하셨음을 보았습니다(1고린 15:20~28; 골로 2:13~15). 우리가 그분의 몸의 지체임을 보았습니다(1고린 12:12,14,27; 에페 1:23; 골로 1:18,24). 그분 몸인 교회의 지체로 부름 받은 삶, 즉 야곱의 가문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이 진실을 깨달은 교회인 우리는 참 빛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마음에 품고 사셨던 ‘지향’(志向)을 우리 마음에 품고 사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지향’은 무엇이었습니까? 한 마디로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을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정렬’(alignment)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장차 도래할 ‘완전한 평화의 시대’를 고대하며, ‘지금 여기서’부터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2독서 《로마서》의 교훈처럼, ‘교회’는 단정하게 처신하며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올바른 일’을 행하며 깨어 살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야기의 교훈처럼, 전혀 ‘생각지도 않은 때’에 ‘평화의 왕’이신 ‘사람의 아들’이 오실 것이니, 그 ‘사람의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늘 준비하고 살아야 할 ‘교회’가 누구입니까?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마음만은 ‘참 빛’이신 그리스도의 다스림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 다스림 안에 살아가는 삶, 그것이 ‘빛의 갑옷’을 입은 삶이고, 온몸을 무장한 삶이며, 준비된 삶입니다. 이것은 2독서를 다루면서 좀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실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의 궁극적 통치’는 앞으로도 얼마나 더 세월이 흘러야 지상에 성취될지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마태 24:36). 하지만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의 왕국’을 다스리시는 축복은 ‘지금 당장’이라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이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일은 ‘지금 여기서부터’ 가능합니다. 우리가 ‘평화의 왕’께 마음 문을 열어드린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예수님은 그 문으로 들어오셔서 우리를 ‘평화’로 다스려 나가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메시아’(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그 평화의 축복을 ‘종말’(미래) 때까지 미루어 두거나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 덕택에, 부활의 그리스도 덕택에 더 이상 낙심과 절망과 우울의 어둠속에 갇혀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죄의식’이든, ‘죄책감’이든, ‘수치심’이든, ‘불안’이든 세상의 어떤 어둠도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마음의 왕좌’를 예수 그리스도께 내어드리면 지금 여기서부터 ‘평화’의 다스림 속에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시편》은 다윗이 지은 순례자의 노래인 <122>입니다. 순례자는 ‘예루살렘’이 모든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의 도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과월절’ 축제를 지내기 위해 순례자는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나섭니다(1절). 순례자는 지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영적인 곳으로 가는 기쁨에 마음이 설렙니다. 그곳에서 만나게 될 친척과 친구들에 대한 기대감에 마음이 설렙니다(8절).

마침내 그는 하느님의 집이 있는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2b절). 얼마나 그가 예루살렘으로 순례오기를 갈망했는지는 ‘벌써 왔다’라는 표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2a절). 먼 거리를 걸어오느라 발에는 물집이 잡히고 피곤하지만 자신을 예루살렘까지 인도 해 준 튼튼한 발이 너무나 고맙습니다(2b절).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보니 기쁨과 기대감과 설렘이 다시 솟아오릅니다. 발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이미 쉼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성당에 찾아오는 마음이 이 순례자처럼 기쁨과 기대감과 설렘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대림절기를 지나는 동안 진정 그리되기를 축복합니다.

순례자는 웅장하게 지어진 예루살렘 ‘성벽’과 빛나는 ‘돌들’에 감탄합니다(3~5절). ‘과월절’ 축제를 지키러 순례에 오른 수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모든 것이 한 몸같이 잘도 짜인 성벽의 돌들처럼 ‘예루살렘’은 순례자들을 하나로 묶는 특별한 힘이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간 순례자들은 그 곳에서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긍휼(矜恤)의 ‘재판’을 받고 ‘감사’를 바쳐 올렸을 것입니다(5절). 사실 하느님은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는 이들을 언제나 ‘용서’하시고, ‘편애’하시는 ‘재판관’이십니다.

우리도 ‘감사성찬례’를 시작하면서 먼저 죄를 고백했습니다.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는 이들을 언제나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편향된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우리가 인생길을 걸어가는 동안 이 자비의 하느님을 꼭 기억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어떤 죄를 짓더라도 진심으로 뉘우치는 이들을 용서하시고 편애하시는 하느님이 동행하심을 믿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용서하시고 편애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한 이들은 진정으로 ‘감사’를 바칠 수 있습니다. ‘성찬례’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으로까지 ‘감사의 마음’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 ‘감사’는 자신의 미래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강한 신뢰’입니다. 더욱이 감사는 ‘죄의식’, ‘죄책감’, ‘불안’,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내는 힘입니다.

특히 순례자는 예루살렘을 위한 ‘평화의 기도’를 바칩니다(6~9절).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의 복’을 예루살렘이 받을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의 소리 외쳐라. “네 집안에 평화!” “네 성안에 평화!” “궁궐 안에 평화!” “너에게 평화!” – 시편 122:6~8

이 구절만큼 가슴 아프고 꼭 이루어질 필요가 있는 절실한 호소를 세상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오늘날도 ‘예루살렘’은 ‘평화의 동네’라는 뜻이 무안하게 ‘세계 긴장의 진원지’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한 순례자의 기도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나크바의 날을 맞아 서안지구의 분리장벽 위에 올라서 시위하는 모습

저는 얼마 전, ‘성경의 땅’(성지)이라 불리는 이스라엘에 다녀왔습니다. 순례 첫날밤을 보낸 숙소가 예루살렘 바로 밑에 있는 ‘베들레헴’에 있었습니다. 숙소로 가기 위해서는 말로만 듣던 ‘서안지구의 분리 장벽’ 안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늦은 밤이었기에 ‘체크포인트’(검문소)를 지나면서 자세히 볼 수 없었던 광경을 아침에는 볼 수 있었습니다. 높이 10m도 더 되어 보이는 콘크리트 장벽이 714km에 걸쳐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둘러싸고 있다는 설명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담을 허무셨는데, 그 땅은 ‘평화’에 역행하는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분리 장벽은 과거의 ‘게토’처럼, 누가 누구를 가두는 것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땅’이 이처럼 ‘긴장의 진원지’가 될 수밖에 없는 자기 나름의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시온주의’에 동조(同調)를 보냅니다. 그 땅에 평화가 없는 이유를 ‘아랍’(이슬람교)과 ‘팔레스타인’에서 찾는 이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아랍’(이슬람교)이나 ‘팔레스타인’에 동조(同調)를 보냅니다. 그 땅에 평화가 없는 이유를 ‘이스라엘’에서 찾는 이들입니다. 이스라엘이 ‘중동전쟁’을 통해 그 땅을 불법 점령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는 불의의 상징인 것처럼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관점을 갖고 있습니까?

저는 오늘 <122>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잠시라도 자신의 관점을 내려놓고 이 순례자처럼 ‘예루살렘을 위한 평화의 기도’를 바칠 수 있기를 소망해 보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유년 시절의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명절을 맞아 부모님과 함께 성전 순례에 나선 어린 예수님은 분명 조상들의 전통에 따라 <122편>을 노래하며 가셨을 것입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그 도시를 내려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이렇게 한탄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 루가 19:42

우리 그리스도인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이 한탄을 기억해야 합니다. 순례자의 소망처럼, ‘예루살렘을 위한 평화의 기도’가 응답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 예루살렘은 ‘중의적’(重義的)입니다. 예루살렘은 문자적으로 우리 밖에도 있지만, 우리 마음에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지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영적인 곳으로 여기듯이 우리에게는 ‘마음’이라고 하는 ‘예루살렘’이야말로 가장 거룩하고, 영적인 곳입니다. 이렇게 지상과 우리 마음외에 또 하나의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 말입니다(묵시 21:2,10).

하느님은 ‘예루살렘을 위한 평화의 기도’가 응답될 것임을 ‘사도 요한’을 통하여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은 거룩하고 빛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새 예루살렘을 계획하십니다. 그 도성에는 태양이나 달이 비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 도성의 빛이며, 언제나 사랑과 친교로 행복합니다. 우리도 <122편>의 순례자처럼 하느님이 마련하신 그 영원한 새 예루살렘으로의 순례를 잘 걸어가기를 축복합니다. 단정하게 처신하며, 평화의 왕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려는 태도로 오늘을 잘 준비하며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2독서는 ‘때를 분별하여 단정하게 처신하라’고 권고하는 사도 바울로의 서신인 《로마서》입니다. 우리는 성찬례 때마다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라고 ‘기념환호송’(신앙의 신비)을 노래합니다. 마지막 구절인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를 어떤 마음으로 부르시는지 궁금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의식이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이런 우리와 달리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의 통치를 가져옴으로써 역사를 완성하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진지하게 믿고 살았습니다. 서기 57년경 고린토에 머물던 바울로는 ‘로마’를 방문할 계획을 합니다(사도 19:21). 그는 로마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편지를 쓰면서 ‘지금’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재림(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때)을 준비할 때’라고 촉구합니다. 그 믿음을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옷을 벗고 입는 그림입니다. 일상의 모습을 통해 머리에 쏙 들어오도록 가르침을 줍니다.

사제는 주일 아침 성찬례를 준비하면서 외투를 벗고 ‘캐석’(cassock)을 입습니다. 캐석을 입을 때마다 ‘하느님과 연결된 제 자신’을 되새깁니다. 성찬례 시간이 되어 ‘장백의’(alb)를 입고 그 위에 ‘제의’(chasuble)를 입을 때마다 기도를 바치며 제가 ‘무엇’ 하는 사람인지를 되새깁니다. 이렇게 사제가 입는 옷은 자신이 누구이고,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나타냅니다. 성가대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복을 입는 학생이나 군복을 입는 군인들처럼, 여러분도 먼저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자신이 하려는 일에 맞추어 옷을 입습니다. 바울로는 우리가 ‘빛의 자녀’이고, ‘빛의 일’을 할 것이기에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명령합니다. ‘빛의 갑옷’이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우리는 영적 전투를 위한 방어와 공격 모두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빛의 갑옷’을 입기 위해서는 당연히 먼저 ‘어둠의 행실을 벗어야’ 합니다. ‘어둠의 행실’이란 유흥과 술취함과 음행과 방탕과 분쟁과 시기 같은 육체의 욕심을 만족시키려는 일들입니다. 한마디로 ‘죄에 대한 사랑’, ‘죄의 습관’, ‘죄의 누더기’입니다. 이것들은 ‘어둠’으로부터 ‘참 빛’으로 나온 그리스도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죄의 누더기’를 ‘먼저 벗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바울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희망적인 기대뿐 아니라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함으로써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촉구합니다.

교회사에는 오늘 본문에 큰 영향을 받은 인물이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 (Augustine)입니다. 그는 「고백록」 8권에서 자신의 나이 32세 때 있었던 회심을 기록합니다. 내면의 고뇌로 눈물을 흘리던 그는 근처 어느 집에서 “그것을 집어 읽어라. 그것을 집어 읽어라”는 아이의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이것을 《성경》을 펴서 읽으라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알아듣습니다. 그가 집어든 책은 사도 바울로의 서신이었고, 눈길이 처음 닿은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 로마 13:13~14

‘성 어거스틴’은 이 구절을 읽고 난 후의 감흥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확신의 빛이 밀물처럼 내 마음에 밀려들어오고 모든 의심의 어둠이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본문은 교회사에서 ‘성 어거스틴’ (Augustine)의 회심을 가져온 말씀으로 유명합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오늘 우리도 똑같은 본문을 들었습니다. 확신과 평안의 빛이 밀물처럼 찾아들었습니까? 사도바울로는 자신의 편지로 그리스도교 물줄기의 도도한 흐름을 만들어낸 한 위대한 인물을 얻었습니다. 방탕하게 살아온 한 인생이 ‘빛의 전사’로 거듭났습니다. 자신이 발견한 삶의 가치를, 삶의 참 빛을 충실히 지켜가는 위대한 신앙의 영웅을 얻었습니다. ‘성 어거스틴’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말씀은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밤거리의 현란한 ‘네온불빛’에 정신이 팔려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런 네온불빛을 ‘참 빛’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준비해야 하는 이유는 《이사야》 예언자처럼, 교회가 이 시대의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그 시대를 위해 세우신 보초이고, 파수꾼입니다(에제 33:7).

본래 ‘예언자’는 ‘미래 일을 알아맞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입니다. 이 시대의 예언자로 부름 받은 교회도 ‘네온불빛’(돈, 지위, 인기의 빛)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에게 ‘참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침묵할 것이 아니라 그 길로 가면 안 된다고, 그것이 삶의 궁극적 행복을 줄 수 없다고, 여기에 길이 있다고 외쳐야 합니다. 이렇게 교회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거룩한 ‘사랑의 의무’를 짊어져야 합니다. 단정하게 처신함으로써 자신들이 참 빛의 자녀임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교회가 침묵했기에 세상에서 생겨난 일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그 책임을 교회에게 물으실 것입니다(에제 33:8).

물론, 남 말하기 전에 자신은 잘하고 있는지부터 성찰해야 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불의’, 자신 안에 있는 ‘적폐’부터 청산해야 합니다. 시각장애인이 시각장애인을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어둠인 교회는 시대의 빛일 수 없습니다. 정말 단정하게 살면서 시대를 향한 예언자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오늘날 교회는 먼저 성찰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으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우리 안의 ‘어둠’은 무엇인지 성찰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교회가 ‘시대적 과제’를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야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대적 과제’에 ‘역행’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야 합니다. 점점 역사의식이 부족한 교회로 전락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야 합니다. 정말이지 교회는 자신들을 둘러싼 ‘시대적 과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는 역사의식이 투철한 지혜로운 교회여야 합니다.

복음이야기는 ‘성주간’ 올리브산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담화를 전하는 《마태오복음》입니다. 가해 동안 우리는 주로 《마태오복음》을 낭독할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은 서기 80년경에 쓰였습니다. 마태오는 하느님의 통치를 확립하러 오실 그리스도(메시아)의 재림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낭패를 보지 않으려거든 “늘 준비하고 있으라.” 경고합니다. 이런 경고는 유대 묵시문학의 양식을 면밀히 따르고 있는 전형입니다. 사실 본문은 ‘작은 묵시록’이라 불리는 《마르코복음》 13장(32~37절)을 ‘원(原) 자료’로 하여 《마태오복음》 기자가 편집한 단락입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 《마태오복음》 기자는 본문을 편집했을까요?

사실 이것이 오늘 복음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한 가지 목적입니다. 로마제국의 ‘박해’와 ‘고난’ 속에 있던 당시로서는 소수자에 불과했던 교회를 교훈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본문이 ‘그 날과 그 시간’이라는 ‘다가올 종말의 때’를 언급하고 있더라도 이것은 ‘정확한 미래의 날짜’를 알려주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본문은 당시로서는 소수자에 불과했던 교회에게 용기를 북돋기 위해서 편집되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분명히 다시 오실 것이니 이 예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오늘’의 모든 박해와 고난을 이겨내라고 격려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일차적인 목적을 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이상한 ‘종말론’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빠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가해 첫날’을 시작하는 대림 1주일입니다. 첫 출발선에서 우리는 공교롭게도 ‘종말의 때’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듣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촉구를 먼저 듣습니다. 듣기에 따라서 ‘두려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두려움’을 조장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기쁜 소식’입니다. 한 해를 출발하는 첫 날, 마지막을 이야기하는 것도 그 초점이 ‘지금 여기의 기쁜 소식’을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하느님의 통치를 가져옴으로써 이제까지 없었던 평화의 새 시대를 열어주실 것이라는 ‘기쁜 소식’이 그리스도교입니다. 이렇게 한 해를 출발하면서 교회는 우리에게 평화의 왕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그리스도가 가져오실 이전에 없던 평화의 새 시대를 희망하라고 용기를 불어넣어줍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는 예언을 예수님께 들었습니다(마태 24:2). 그들은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날지, 주님이 오실 때와 세상이 끝날 때에 어떤 징조가 나타날지 알려주시기를 요청했습니다(마태 24:3).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을 시작하십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 마태 24:36

예수님의 대답은 다소 의외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돌아오시는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한 지식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강조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그 지식이 오직 ‘아버지’만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자신마저도 올리브산 담화에서 자신이 돌아오실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해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교회사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넘어서려는 이단들이 있었고,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종말 날짜’를 특정 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신비한 은총을 받은 이들이 아니라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증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공관복음> 기자들은 다소의 숨통을 열어놓았습니다. 사람들은 무화과나무의 변화라고 하는 자연의 징조를 통해 여름이 가까워 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마태 24:32~33). 마찬가지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징조들을 통해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예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떠벌려서는 안 됩니다. 거기까지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노아 때와 같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노아의 때’란 두 가지 상징을 갖습니다. 하나는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상적인 일에 중심을 두고 살아가는 세상’을 말합니다(창세 6:1~2). 다시 말해 노아 때 사람들은 모든 일이 평상시처럼 흘러가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죄악으로 가득차고 못된 생각만 하는 ‘무법천지의 세상’을 말합니다(창세 6:5,11~13). 노아 때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홍수를 만나 모두 휩쓸려 갔습니다. 그들은 경고를 받았지만 돌이키지 않았기에 결국 단죄를 받았습니다(히브 11:7). 그 단죄는 그들에게 ‘갑자기’, ‘뜻 밖에’ 들이닥쳤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올 때도 그럴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에 ‘늘 준비하고 있으라.’ 경고하십니다.

이어서 밭에서 일하던 두 남자들, 맷돌을 갈던 두 여자들 사이에도 영원한 이별이 있을 것이라 경고하십니다. 밭에서 일하거나 맷돌을 갈던 사람들 역시 ‘일상을 살던’ 이들을 말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형제일 수도 있고, 한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 일상을 살던 그들 사이에 명백한 차이가 드러날 것입니다. 한 사람은 재림하시는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은 ‘구원’ 받을 것이고, 한 사람은 구원으로부터 ‘제외’될 것입니다(1데살 4:16~17). 이렇게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과 시간을 알 수 없기에 그리스도인은 늘 경계하면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치 도둑을 막아내는 집주인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에 매일 매일을 값지고 소중하게 살아야 합니다. 순간순간 ‘사랑을, 자비를, 나눔을, 용서를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고 있다면 이미 늘 준비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이들은 분명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전에 없던 새로운 평화의 시대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대림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사야》가 희망한 것처럼, 이제까지 없던 평화의 새 시대를 가지고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날과 그 시간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마저도 모르시고 오직 아버지만이 그 지식을 아십니다. 우리는 이 강조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예고도 없이 오실 것이기에 우리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언제부터 준비를 해야 합니까?

언젠가 들은 언어유희가 떠오릅니다. 세상에는 세 가지 ‘금’(金)이 있다고 합니다. ‘부’(富)를 상징하는 ‘황금’(黃金), 음식에 간을 맞추는 ‘소금’(鹽), 현재를 뜻하는 ‘지금’(今)입니다. 이중에서 가장 소중한 ‘금’(金)은 ‘지금’(今)입니다. 사실 우리가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외의 다른 시간과 공간이 필요치 않습니다. ‘오늘’을 잘 살아가는 이들에게만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한 ‘기다림’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준비를 위해 가장 좋은 시간은 항상 ‘오늘’이고, ‘지금’입니다. 내일 할 수 있는 사랑도 없고, 내일 할 수 있는 기도도 없으며, 내일 할 수 있는 용서도 없습니다. ‘지금’ 해야 하고 ‘오늘’ 해야 합니다. ‘지금’ 하는 이들이 그 기쁨을 맛봅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씀 드리면 주님의 복을 받았기에 ‘지금’ 사랑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지금’을 잃어버린 사람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과 그 시간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로가 권유하는 것처럼 ‘어둠의 행실’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간직하셨던 삶의 지향으로 우리 자신을 무장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육체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보다는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하며 오늘을 단정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까지 없었던 평화의 새 시대를 가져오실 그리스도를 늘 희망하며 맞이할 준비를 하는 대림절기입니다. 성탄절기부터가 아니라 이 절기부터 ‘예수의 지향’을 마음에 품고 살아감으로써 ‘참 빛이 주시는 평화’로 우리 ‘마음의 왕국’이 대낮처럼 밝아지시기를 축복합니다. 부디 그런 대림절기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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