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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7.30. 연중17주일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17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에서 우리는 겨자씨와 누룩 같이 연약한 우리를 택하시어 하느님 나라의 자녀로 삼으신 은혜의 하느님을 만납니다. 또 우리는 우리의 참된 보물과 진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케 하시고 소유케 하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렸습니다. 지혜의 샘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분별력을 주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찾아낸 이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굳게 지켜나가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이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아울러 스텔라 데이지호 수색에 정부가 적극 나서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세월호 미수습자들이 가족 품으로 돌아오도록 기도합시다. 또한 故김종현님, 故김계훈님의 안식을 위해 기도합시다.

본기도

지혜의 샘이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성령의 분별력을 주시어 하느님 나라의 소망을 간직하게 하시고, 그 은총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29:15-28
  • 시편 – 105:1-11,45
  • 독서 – 로마 8:26-39
  • 복음서 – 마태 13:31-33,44-52

제 1독서 창세기는 지난주에 이어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연속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속임수를 써서 형에게 돌아갈 복을 가로챘습니다. 에사오는 자신에게도 복을 빌어달라고 아버지 앞에서 통곡하며 거듭 애원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화나고 억울하고 슬펐을까요?(창세 27:30-40) 이미 빌어 준 복은 어쩔 수 없다는 아버지의 그 한 마디에 에사오는 “삶이란 전혀 공정하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형의 원한을 산 야곱은 삼촌 집으로 피신가다 베델이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보냅니다. 거기서 하느님을 경험한 후 다시 하란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하란에 당도한 야곱은 들에 있던 우물가에서 목자들을 만납니다. 그들에게 삼촌 라반의 안부를 묻다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납니다. ‘라헬’입니다.

야곱은 삼촌에게 사정을 다 이야기합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까지 말입니다. 이번 연속극의 마지막을 보면 이것이 그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삼촌의 일을 도우며 한 달 동안 머뭅니다. 어느 날 라반은 일해 준 보답을 어떻게 해주면 좋겠냐고 묻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자기 이름 말고는 가진 것 하나 없는 이의 당돌함입니다.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7년 동안 노동력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라헬이라는 보물을 얻기 위해서라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제안입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입니다. 사실, 라헬을 향한 사랑을 이미 삼촌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라반은 라헬을 이용해 야곱을 붙잡을 ‘간사한 꾀’를 이미 갖고 있었습니다. 라반은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된다며 속으로 쾌재를 부릅니다. 사랑에 정신이 나간 야곱은 그런 삼촌의 간사한 꾀를 알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삼촌이 호의를 베풀어줄 것이라 믿습니다. 얼마나 사랑에 눈이 멀었던지 라헬을 준다는 확답이 없었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주느니보다 너에게 주는 편이 낫겠다.”라는 삼촌의 말을 철썩 같이 믿고 계약을 이행합니다.

오늘의 문화에서 보자면, 여성을 이런 식으로 대우하는 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에서 여성은 ‘재산’처럼 거래되었습니다(창세 31:15). 여성의 가치는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갈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었습니다. 아내를 얻으려면 다소 큰 결혼 지참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라헬에게 장가들 생각하나로 7년을 견뎠습니다. 세월이 바람처럼 지나 약속의 날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라반에게는 ‘라헬’(뜻: 암양) 말고도 딸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언니 ‘레아’(뜻: 암소)입니다. 둘의 이미지는 이름에 드러나 있습니다. 레아는 눈매가 부드러웠지만, 라헬은 몸매도 아름답고 용모도 예뻤습니다(17절). 레아의 눈매를 묘사하는 “부드러운”이 어떤 의미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이 단어가 ‘약한’이라는 뜻으로도 번역되기에 ‘흐릿하고 광채 없는 눈’ 정도로 해석합니다. 한마디로 언니가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동생보다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마침내 잔칫날이 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들고 성대한 잔치가 벌어집니다. 야곱과 라헬은 들떴습니다. 그런데 밤이 되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라반은 또다시 ‘음모’를 꾸밉니다. 종들을 시켜 라헬을 빼돌린 다음 레아로 하여금 신방에 들어가게 합니다. 엄청난 ‘사기’입니다. 라헬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자신을 사랑한 남자인데,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는 이유 하나로 언니에게 양보해야 하는 그녀의 심정 말입니다. 그녀 역시 “삶이 전혀 공정하지 않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더욱이 신방에 들어가는 레아는 어땠을까요? 야곱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에도 언제부턴가 “삶이 전혀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 올라왔습니다. 한 배에서 태어났는데 동생은 외모가 매력적이고 자신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온 기회라도 차지하고 싶습니다.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숨기고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라헬처럼 행동합니다.

첫날밤을 치룬 다음날 아침, 비로소 야곱은 자신이 속았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격분했습니다.

삼촌이 저에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왜 저를 속이시는 것입니까? – 창세 29:25

아버지와 형을 속인 ‘인과응보’일까요? 형 에사오의 심정이 자신과 같았을까요? 아침에 일어났더니 야곱은 “삶이 온통 불공정해 보이는 그런 상황”에 처했습니다. 자신이 받아야 할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그런 “엉망진창인 상황”입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미 첫날밤을 치렀기에 레아는 법적으로 야곱의 정식 부인이었습니다. 더욱이 라반이 했던 말은 그의 폐부를 찔렀습니다.

우리 고장에서는 작은딸을 큰딸보다 먼저 시집보내는 법이 없네. – 창세 29:26

말문이 턱 막혔습니다. 레아가 바로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에사오 행세를 하며 아버지를 속인 자신이었습니다. 형을 따돌리고 축복을 가로챈 자신이었습니다. 레아처럼 살아온 자신이었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삼촌이 그런 사람인 줄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잘못입니다.

노련한 사기꾼인 라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또 ‘꾀’를 냅니다.

초례 기간 한 주일만 채우면 작은딸도 주지. 그 대신 또 칠 년 동안 내 일을 해 주어야 하네. – 창세 29:27

그는 딸들을 ‘상품’처럼 거래합니다. 이 일로 나중에 라반은 딸 라헬로부터 비난을 당합니다(창세 31:15). 야곱은 7일간의 초례 기간을 치르고 라헬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2주 만에 아내를 둘씩이나 얻었습니다. 세상에나! 그러나 거부당한 신부로서 이 모든 장면을 목격하는 레아의 심정은 또 어땠을까요?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의 계획에 따른 담보(擔保)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확인했습니다. 레아는 오늘 복음 이야기의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정말 초라한 신세입니다.

창세기 이야기에 따르면 나중에 레아와 라헬 둘의 인생이 어떻게 진행되고, 결말은 또 어떻게 됩니까? 레아는 결혼 후에도 라헬보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으로 나옵니다. 여전히 차별입니다. 불공정한 대우를 겪습니다. 그런 속에서 어떻게 애를 6남 1녀나 낳았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아무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레아는 이스라엘 12지파 중 6명을 낳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자식을 낳을 때마다 자신이 남편으로부터 겪고 있는 차별과 삶의 불공정(억울한 심정)이 하느님으로 인해 바로 잡아졌다며 찬미합니다(창세 29:31-35). 그만큼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의탁했다는 뜻도 됩니다.

여러분, 이 어이없어 보이는 일련의 일을 누가 계획하고 행동하신 것입니까? 표면적으로 보면, 형을 속인 야곱의 ‘간사한 꾀’였고, 야곱을 속인 라반의 ‘음모’였습니다. 하지만 이것만 보는 사람은 아직 보아야할 진실을 다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모든 사건들의 밑바닥에는 차별, 불공정을 바로 잡고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행동하시는 하느님의 예정과 개입이 흐르고 있습니다. 특히 야곱의 잔꾀가 하느님의 예정과 만나고 있습니다. 야곱의 분노가 하느님의 개입과 만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약속의 성취를 위해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듯이, 야곱도 선택하셨습니다. 약속의 성취를 위해 하느님이 리브가를 선택하셨듯이 레아도 선택하셨습니다. 더욱이 야곱과 레아는 상대적으로 ‘약자’였습니다. 야곱은 태어나면서부터 형 에사오에게 밀리는 꼴찌였고, 레아 역시 동생보다 매력이 떨어지는 꼴찌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 약자들을 은총으로 선택하시어 아브라함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을 성취해 가십니다. “차별의 아픔을 겪는 이들, 삶이 전혀 공정하지 않다며 눈물짓는 이들의 인생”에 개입하시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교훈한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 1고린 1:25-28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차별 속에 있는 눈물짓는 이들, 삶이 전혀 공정하지 않다고 하소연하는 약한 이들의 편이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스스로 강한 자라고, 지혜 있는 자라고, 유력한 자라고 말씀하신다면 하느님의 구원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2인자인 야곱, 특히 오늘 복음서의 겨자씨와 누룩처럼 매력 없는 레아 같은 우리를 통해서 세상의 구원을 완성해 가시는 분입니다. 우리 눈에 실수로 보이는 일조차도 개입하시어 선한 결과로 만드시는 하느님입니다.

2독서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 로마 8:28

우리는 그런 하느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강한 자들이 아닙니다. 삶이 전혀 공정하지 않다며 눈물짓는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 받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이 종국에는 좋은 결과를 이루도록 개입하시고 이끌어 주시는 은혜의 하느님입니다.

생각할수록 그 은혜가 정말 감사합니다. 하느님이 차별받던 레아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르우벤도, 시므온도, 레위도, 유다도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모세도 다윗도 없었습니다. 출애굽의 주인공인 모세는 레위의 후손이고, 이스라엘 최고의 왕으로 꼽히는 다윗은 유다의 후손입니다. 더욱이 유다의 혈통에서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차별’과 ‘삶의 불공정’에 시달리던 ‘약자’인 레아를 특별한 섭리로 선택하셨고, 그녀의 삶에 개입하시어 구세주의 조상이 되는 은총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약자의 승리입니다. 레아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으로 이어지는 약속의 가문을 잇는 정식 부인이 되었습니다. 죽었을 때는 조상의 묘인 막벨라 굴에 장사됨으로써 동생과의 경쟁에서 승자가 되었습니다(창세 49:31).

여러분은 오늘 창세기 야곱의 결혼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배움을 얻습니까? 오늘 이야기 속에는 이렇게 외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등장했습니다. “삶에 차별이 있어요. 삶이 불공정해요!” 여러분도 그런 고민 속에 있습니까? 어느 날 아침 일어났더니 야곱처럼 “어이없고, 삶이 온통 불공정해 보이는 그런 상황” 말입니다. 라헬처럼 분명 내 정당한 권리인데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빼앗겨야 하는 그런 상황 말입니다. 레아처럼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 데 상대방은 너무도 쉽게 얻는 것 같은 그런 상황 말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며 살아왔을 수 있습니다.

나는 날마다 최선을 다해 왔어… 책임감을 가지고 가족을 위해 성실하게 헌신해 왔어… 이제 조금만 더 고생하면 나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행복해 질 거야… 분명 정당한 보상이 있을 거야. 이젠 내 차례야. 이렇게 노력하며 살았는데 이제 세상이 알아줄 때도 되지 않았을까… 조금만 더 힘내자. 조금만 더 참자…

그런데 어느 날 어이없는 상황에 처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삶이 전혀 공정하지 않은 것 같은 상황에 직면합니다. 팀을 이뤄 활동했는데 자신만 빼놓고 나머지 팀원들이 공과를 나눠 갖습니다. 자신이 주도해서 이끌어 온 모임인데 어느 날 자신만 왕따를 당합니다. 어떤 음모인지 모르지만, 기분이 안 좋습니다. 모욕감을 느낍니다.

또 미래를 준비하며 열심히 달려왔지만 취업 서류조차 받아주지 않습니다. 대학을 진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대학을 안 나와서 그런가?” 대학을 나온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일류대학 출신이 아니라서 그런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내가 여성이라서 그런가?”, “내가 전라도 출신이라서 이런 취급을 받는 건가?” 사실, 우리나라 여성들은 단지 ‘딸’이라는 이유로 ‘아들’에게 양보하라는 부모님의 차별을 수없이 당하며 견디어 왔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있다면, 여러분은 오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무엇을 느꼈을 지 정확하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정당화되건 그렇지 않던 간에, 이사악, 리브가, 에사오, 야곱, 레아, 라헬은 그들이 있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은 상황에 처한 이들이었습니다. 삶이 공정하지 않는 그런 순간들 말입니다. 인생의 어떤 순간은 그들에게 전혀 공정하지 않았고 완전히 불공평하기만 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삶은 통제할 수 없고 인생이 너무나 불공평 했습니다. “차별과 불공정이 그들 삶의 일부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분명코 개입하시어 우리 삶에 작용하는 차별과 불공정에 새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2독서 로마서는 삶의 아픔을 겪고 있는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로의 편지입니다. 그들의 처지는 너무나 힘겨웠습니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 로마 8:26

이 구절에 따르면, 그들은 기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픔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대신 기도해 주셔야 할 정도였습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로가 스페인 선교를 위한 재정적 후원과 필요를 위해 집필했습니다. 이 서신을 쓸 때만 하더라도, 사도 바울로는 곧 세상의 종말이 다가올 것이고 생각했고 그 맥락에서 편지를 썼습니다. 삶이 온통 장미 빛인데 로마서 8장 후반부에 나오는 그런 ‘극단적 표현들’을 편지에 담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이 직접 세운 소아시아의 교회들뿐만 아니라 로마에 있던 교회 역시 로마제국으로 상징되는 세상 문화의 도전과 폭력과 환난과 역경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향한 하느님의 목적은 여전히 성취될 것이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하느님과 교회 사이를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그 무엇도 교회를 홀로 있게 만들 수 없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교회를 멀어지게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이 서신 말씀을 통해 우리가 성찰해야 할 점은 이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차별과 삶의 불공정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어떤 이웃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약한 사람들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얼마나 닮아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교회는 과연 약한 사람들의 편을 들고 있습니까? 약한 사람들의 입이 되어주고, 그들이 목소리를 들어주는 귀가 되고 있습니까? 한 때 교회도 오로지 하느님 외에는 대신 기도해 줄 이 하나 없는 약자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이 하도 오래돼서 이제는 다 잊어버렸지만 1세기 교회는 그랬습니다.

오늘 복음이야기 ‘하느님 나라의 비유’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장차 다가올 그리고 현재 자라나고 있는 미래적이고 현재적인 하느님의 ‘선하신 다스리심’(통치, 주권, 질서)을 뜻합니다. 이 하느님 나라라는 말 속에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핵심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하느님의 직접적인 ‘보살피심’, 즉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처음부터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핵심으로 선포하셨고, 비유를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외세로부터 해방된 민족주의 국가로 이해했습니다. 그 해방을 실현할 인물이 바로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입니다(이사 11:1-9).

예수님은 그렇게 이해하는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셨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다스리심, 정의와 평화)이 온 누리에 직접 구현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십자가형에 처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이 ‘겨자씨 비유’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성장’, 즉 겨자씨가 커지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펼치시는 하느님 나라가 지금은 몹시 작아 보이지만 점점 ‘성장’해 갈 것입니다. 마침내 종말에는 엄청난 구원의 위력을 드러낼 것입니다. 이렇게 겨자씨 비유에는 예수님이 간직하신 하느님 나라의 확신과 믿음이 담겨있습니다.”라고 해설합니다.

물론 중요한 해설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부분을 놓쳤습니다. 첫 구절, 즉 “어떤 사람이 밭에 겨자씨를 뿌렸다.” 이 부분을 지나쳤습니다. 왜 이 구절이 더 중요할까요?

겨자는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다년생 풀’입니다. 아무 때든 밖에 나가면 얻을 수 있었기에 굳이 ‘자기 밭’에다 겨자를 뿌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비유에 등장하는 이 사람은 밭에다 겨자씨를 뿌립니다. 당시 시각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혀를 찼을 것입니다. 그 귀중한 땅에다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가 아니라 고작 겨자씨를 뿌리느냐고 말입니다.

어째서 그 사람은 그렇게 했을까요? 예수님은 그 사람이 바로 ‘하느님’(당신 자신)이라고 비유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행동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겨자씨가 우리라면 이야기가 어떻게 됩니까? 하느님의 그런 어리석은 행동이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구약에서 언급한 ‘레아’처럼, 겨자씨 같은 우리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밭(하느님의 나라)에 심으신 하느님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유력한 1인자들, 강한 자들을 놔두고 2인자인 우리를 당신의 밭(하느님의 나라)에 심으신 것을 납득할 수 없습니다. 강한 자들을 놔두고 약한 우리를 하느님의 밭(나라)에 심으신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잘 납득되지 않는 하느님의 행동(예정, 개입)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조롱합니다. 어리석다고 말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우리 말고도 당신 밭에 뿌릴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인 하느님은 겨자씨 같은 우리를 당신의 밭(하느님의 나라)에 심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이 비유에서 주목할 점이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이 겨자씨는 얼마나 자랄 수 있을까요?

겨자가 싹이 트고 자라나면 어느 푸성귀보다도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 – 마태 13:32

이 구절을 읽고 나면 좀 헛갈립니다. 새가 깃들일 정도로 큰 나무라고 하니까 5-6미터 이상까지는 자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해입니다. 겨자씨가 다 자라면 2-3미터 정도의 크기가 됩니다. 우리식 분류에서는 겨자가 ‘다년 생 풀’이지만, 고대 이스라엘서는 ‘나무’입니다. 그들은 땅에서 나와 곧바로 잎이 펼쳐지는 것은 ‘풀’(푸성귀, 나물), 땅에서 나와 대가서고 거기서 가지가 나와 잎이 붙어 있는 것은 ‘나무’라고 분류했습니다. 우리식으로 풀인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 눈에는 나무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더욱이 겨자는 단독으로 자라지 않는 군집식물입니다. 그런데도 밭주인은 겨자씨 ‘한 알’을 가져다 심었습니다. 우리 공동번역 성서에는 “겨자씨를 뿌렸다”고 하니까 밭의 주인이 한 움큼 쥐고 뿌린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원문에는 “겨자씨 ‘한 알’을 심었다” 입니다.

이미 밭의 주인은 누가 보든지 어리석은 행동을 했습니다. 또 자신이 심은 그 한 알의 겨자씨가 커져서 새들이 깃들기를 원하는데, 이것 역시 어리석은 기대입니다. 왜냐하면 겨자는 군집식물이기에 겨자 한 그루만 있어가지고서는 새들이 깃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겨자씨 비유를 발설하시는 예수님의 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알만 심어가지고는 새들이 깃들일 만큼 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예수님)은 기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예수님)은 전혀 이해가지 않는 행동을 하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는 결과를 기대하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 하느님이 겨자씨 한 알처럼 ‘연약한’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 심으셨습니다. 이런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기대하시는 어리석은 하느님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속성입니다.

이 겨자씨의 비유에 이어지는 누룩의 비유도 똑같은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겨자씨의 비유에서 어떤 사람은 남자인데, 누룩의 비유에서는 여자라는 점입니다.

Sir John Everett Millais, The Parable of the Leaven

겨자씨의 비유에서처럼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누룩의 비유’를 이렇게 해설합니다. “예수님이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 속에 숨겨져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국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위력을 드러낼 것입니다. 이처럼 누룩의 비유는 예수님이 간직하신 하느님 나라의 확신과 믿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중요한 해설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부분을 놓쳤습니다. 왜냐하면 이야기가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밀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넣어 빵을 만든다면 어느 정도의 무게와 양일까요? 무게는 대략 50kg, 150명 정도가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이 비유를 듣던 제자들은 아마 크게 웃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밀가루 서 말에는 누룩을 넣어도 발효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고대에는 빵을 먹고 난 뒤 부스러기를 잘 말려서 갈은 후에 누룩으로 사용했습니다. 대략 누룩이 발효되려면 3-4일이 걸렸는데, 요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발효가 늦었습니다.

따라서 살림 교육을 제대로 받은 여자라면 이렇게 효과적이지 못한 누룩을 서 말이나 되는 가루에 넣는 무모한 행동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정말 그렇게 행동하는 여인이 있다면, 그녀는 빵 만드는 것을 전혀 모르거나,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어리석다며 야단을 맞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가 바로 ‘하느님’(예수님)이라고 비유하십니다. 밀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집어넣으면 발효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시는 분이 하느님(예수님)입니다. 누룩이 효과를 내기를 기대하시는 분이 하느님(예수님)입니다. 겨자씨 비유와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아무도 겨자씨를 자기 밭에 심지 않는 것처럼, 아무도 누룩을 밀가루 서 말에 속에 넣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예수님)께서는 이런 행동을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어리석다며 손가락질 할 행동이지만 누룩 입장에서는 한없이 감사하고 은혜로운 분이 바로 하느님입니다. 비유니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교우 여러분, 겨자씨와 누룩처럼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심겨졌고, 들어갔습니다. 겨자씨를 밭에 심는 주인처럼, 밀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집어넣고 빵을 만들려는 여자처럼, 완전히 어리석은 행동을 감행하시는 하느님의 ‘은혜’ 덕택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유력한 1인자들, 강한 자들을 놔두고 2인자인 우리를, 약한 우리를, 꼴찌인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 집어넣으신 것을 납득할 수 없습니다. 납득되지 않는 하느님의 행동(예정, 개입)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Sir John Everett Millais, The Hidden Treasure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의 비유’는 또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은 외세의 침략이 잦았던 곳입니다. 적군이 들어오면 부자들은 항아리에 ‘보물’을 넣어 밭에 감추고 피난을 갑니다. 인생사 알 수 없다고 나중에 못 돌아오는 경우가 발생하고 대신 남이 밭을 갈다가 ‘우연히’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밭의 주인에게 알리지 않은 사람을 비도덕적이라 비난하고 싶겠지만, 비유가 말하려는 초점은 따로 있습니다.

비유는 이 사람의 신속한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 신속한 행위가 ‘현명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조심스럽게 우의적 해석을 해보자면, 밭은 하느님 나라, 보물은 하느님 나라의 가치들을 상징합니다. 그는 ‘우연히’ 밭을 갈다가 여러 보물 항아리들을 발견합니다. 횡재(橫財)입니다. 처음에는 몰래 하나씩 옮길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았습니다. 로또입니다. 그는 가진 것을 다 팔아 아예 통째로 그 밭을 사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치들은 이 세상 그 어떤 보물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지 않고 그 나라의 가치들 몇 개만 갖는다는 것은 너무 소극적인 태도입니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보물들을 한 개만 가져가고 말 수도 있지만, 전부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그 밭, 즉 하느님 나라 자체를 소유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소유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그 나라의 귀한 가치들까지 가지려고 시도한 이 농부는 아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진주 장사꾼의 비유’는 어떻습니까? 요즘이야 진주가 양식되지만 고대에는 진주가 희귀한 보석이었습니다. 유대 전통에 “진주는 천사의 눈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천사가 눈물을 흘리는데, 그 눈물이 바다에 떨어져 진주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 비유에 진주를 등장시킨 것은 그만큼 진주가 귀중하고 희귀했기 때문입니다.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어떤 장사꾼이 있었습니다. 진주는 그가 평생토록 찾고 원하던 ‘삶의 최고 가치’를 뜻합니다. 어느 날 그는 값진 진주를 만납니다. 눈이 반짝입니다. 신속히 있는 것을 다 팔아 진주를 삽니다. 그 순간 그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 진주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는 자신이 찾고 원하던 최고의 가치, 즉 하느님 나라를 사기 위해 모든 것을 투신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가치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팔더라도 결코 아깝지 않다고 가르치십니다.

이처럼 보물의 비유와 진주 장사꾼의 비유는 둘 다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갖기 위해 가지고 있던 모두 것을 투신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두 번 다시 그런 기회를 못 만날 것처럼 신속하게 행동했습니다. ‘지혜로운 행동’이라는 것이 횡간의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우주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한 이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 시간과 재능과 가진 모든 것을 신속히 거기에 투신(헌신)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삶의 우선순위를 온통 하느님 나라에 맞추며 산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 또는 일부의 신자들은 그렇게 하는 믿음을 어리석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의 눈이 열린 이들은 그렇게 하는 투신이야말로 참된 믿음임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래 믿음이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고, 발견한 그것을 충실히 지켜나가려는 삶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모든 인간은 보물처럼, 진주처럼 삶의 소중한 가치를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하느님은 그런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구원, 영원한 생명)를 ‘은총의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 은총의 선물을 소중히 여기며 살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구원을 가져다주신 예수님이 과연 우리가 유일하게 갈망하는 보물이며 진주입니까? 예수님을 그런 분으로 맛보며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모든 것을 거셨던 그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하는 데 우리의 모든 것을 투신할 수 있습니까? 하느님 사랑에 매료되어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일에 모든 삶을 헌신하셨던 예수님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 사랑을, 하느님 나라를 전하도록 허락된 이 기회를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서 마지막 비유는 ‘그물의 비유’입니다. 지난주에 봤던 가라지의 비유처럼 ‘종말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그물에 비유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 물고기를 골라낼(심판)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비유입니다(레위 11:10-12, 신명 14:9-10). 가려내기 전에는 그물 안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분리시키는 심판의 날이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구든지 다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한 공동체에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합당한 것은 아닙니다. 종말이 오면 하느님께서 친히 선한 이들과 악한 자들을 분명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 날이 안 되었습니다. 마지막 회개의 기회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물을 널리 펼치는 일을 할 뿐입니다. 기억할 것은 세상 끝날 불구덩이에 처넣어지지 않으려면 하느님이 선한 사람이 되라고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잘 살리고 선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보물과 진주를 발견한 사람처럼 말입니다.

 

이제 비유를 마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알아들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예”라고 대답합니다. 지금 여기 있는 우리도 이 비유들의 참된 의미를 올바로 깨닫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를 맺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는 마치 자기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 마태 13:52

이 말씀은 제자란 누구이고 어디까지 성장해야 하는가와 연결됩니다. 고대 이스라엘 회당은 두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한쪽은 사람들이 예배와 행사를 하는 공간이고, 다른 한 쪽은 ‘토라’(율법) 두루마리가 진열되어 있는 공간입니다. 토라가 있던 공간의 관리는 학식이 뛰어난 율법학자들이 맡았습니다. 예배 중에 토라를 낭독하게 되는 데 율법학자들은 어느 곳에 해당 두루마리가 진열되어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적절하게 꺼내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의 율법학자의 역할에 빗대어 제자들을 추켜세우십니다. 다만 딱딱하고 근엄해 보이는 혹은 재미없어 보이는 율법학자 이미지가 싫으셨습니다. 그래서 곳간에 포도주를 보관하고 있는 집주인으로 바꾸어놓습니다. 집 주인은 어느 행사에 새 것이 필요하고 어느 행사에 묵은 것이 필요한지 잘 알고 찾아내옵니다. 이처럼 예수님으로부터 하늘 나라 교육을 받은 제자들은 각각의 상황과 사람에 맞게(유연성) 하느님 나라를 적절히 가르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름지기 제자는 그 정도 수준까지 자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차별과 삶의 불공정’ 속에 한숨짓는 약한 이의 삶에 개입하시고 편드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무엇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교회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확신을 들었습니다. 강한 자가 아니라 겨자씨 같고, 누룩 같은 우리를 선택하시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발견했습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진주를 찾아낸 사람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소유하는 지혜의 사람이 되라고 배웠습니다.

선한 이와 악한 자를 갈라내실 심판의 하느님을 기억하라고 배웠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잘 선용하며 선한 이로 살라고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답게 상황과 사람에 맞게 하느님 나라를 잘 가르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신앙의 목표임을 배웠습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의 의미를 더욱 깊이 깨달아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이 시대의 약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 하느님 사랑을 보여주는 교회로 잘 성장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1. 스텔라 데이지호 수색에 정부가 적극 나서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2. 세월호 미수습자들이 가족 품으로 돌아오도록 기도합시다.
  3. 남북의 대화와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위해 기도합시다.
  4. 실직자들과 청년 구직자들,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5. 이 땅의 교회들이 약자의 벗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6. 오종민(어거스틴) 교우와 모든 군복무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기도합시다.
  7. 故김종현님, 故김계훈님의 안식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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