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4. 왕이신 그리스도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34주일이자 전례력으로 ‘다’해를 마감하는 ‘왕이신 그리스도주일’입니다. 전례색은 ‘백색’입니다.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기로 시작한 한 해의 결론이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듯이 우리도 모든 일에 주님의 이름을 빛나게 하는 복된 신자로 살아가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면서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시어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통치에 순종하며 소외된 이들을 사랑하여 주님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예레 23:1-6
  • 성시 – 즈가리야 송가(루가 1:69-79)
  • 2독서 – 골로 1:11-20
  • 복음서 – 루가 23:33-43

오늘은 ‘연중시기’를 마감하는 ‘왕이신 그리스도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통치하시는 진정한 ‘왕’이심을 기쁨으로 찬미하는 축일입니다. 만물을 사랑으로 주관하시는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가 우리 ‘눈에 보이는 형태로 이 역사에 실현’되기를 기도하는 축일입니다. 전 인류가 그 왕국에서 평화롭게 살아 갈 ‘샬롬의 날’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축일입니다. 성경에 약속한 것처럼,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속히 오시어 ‘완전한 샬롬’(평화)을 실현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축일입니다. 오늘 <전례독서들>도 이런 ‘축일’(오늘은 주요축일 중에서도 우선순위를 갖는 축일에 속합니다)의 의도에 맞추어 ‘왕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배정입니다.

1독서는 하느님께서 장차 세우실 ‘왕’을 예고하는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27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유다가 멸망한 587년까지 40년 동안 활동했습니다. 그의 별명은 ‘눈물의 예언자’, ‘고난의 예언자’입니다. ‘풍전등화’(風前燈火)처럼 멸망의 길로 치닫던 민족의 운명을 돌리고자 애썼지만 민족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왕들’과 ‘거짓 예언자들’과 ‘귀족들’과 ‘백성들’, 심지어 ‘고향사람들’마저 심판을 외치는 그를 ‘매국노’ 취급하며 박해했습니다. 조롱과 핍박과 채찍질과 투옥과 죽음의 처지로 그를 내몰았습니다. 꼭 오늘 복음서의 예수님을 보는 듯합니다.

사실 예레미야는 구약의 예언자 중에서 수난의 예수님과 가장 잘 포개집니다. 둘 다 유다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던 당대 최대 강국 치하에서 ‘하느님 말씀’(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뜻)에 붙잡혀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 예수님은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사역 초기부터 변절과 허영에 빠진 세대에게 담대히 ‘회개를 선포’했습니다(예레 1:16~19; 마르 1:14~15). 고향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했고(예레 11:21; 12:6; 마르 6:1~6), 장가도 들지 않았습니다(예레 16:2; 마태 19:12). 바룩(예레 36장)과 12제자로 대변되는 작은 무리의 ‘추종자들’을 두었고, 하느님을 잘 믿는다는 종교인들로부터도 ‘반대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니야’로 대변되는 거짓 예언자들로부터(예레 27:9~10,14~17; 28:1~11), 예수님은 ‘원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로부터 반대를 받았습니다(마르 3:6; 루가 19:47; 요한 11:53).

신성불가침처럼 믿어지던 ‘예루살렘 성전’ 때문에 둘 다 울었으며 ‘파괴’를 예언했습니다(예레 7:14~15; 마르 13:2). 동족으로부터 위험한 인물로 ‘박해’를 당했으며, 불의하게 체포되어 모진 ‘고난’을 받았습니다. 형식이나 고정화된 전례가 아니라 ‘내면(마음)의 변화’와 ‘개인의 정신적 자유’를 가르쳤습니다. 무엇보다 ‘새 계약의 복음’을 가르쳤습니다(예레 31:31~17; 마태 26:26~28; 마르 14:22~-24; 루가 22:19~20; 1고린 11:23~26). ‘예화’와 ‘비유’로 당시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 능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둘 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면 하느님께 받은 사명마저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공정한 재판관이신 하나님께는 아니었습니다. 이렇듯 비슷한 점이 많기에 그리스도교는 고난의 예레미야를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의 ‘예형’(豫形)으로까지 가르쳐왔습니다. 그의 삶은 수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예수님’과 많이도 포개집니다.

오늘 본문은 하느님께서 장차 ‘다윗 가문에서 한 왕’을 세워주시어 ‘유다와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5~6절). 이것은 《예레미야서》가 포로기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느님은 예레미야를 시켜 당대의 ‘거짓 목자들’, 즉 유다의 ‘왕들’과 ‘지도자들’을 혹독하게 꾸짖으십니다(1~2절). 유다왕국은 ‘거짓 목자들’의 부정과 부패로 멸망하고, 백성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수모를 겪을 것입니다(3절). 그러나 하느님은 장차 “참 목자를 세워 주리라” 약속하십니다(4절). 그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세상에 ‘올바른 정치’(공평과 정의)를 펼칠 것입니다(5절). “그를 왕으로 모시고 유다와 이스라엘은 살 길이 열려 마음 놓고 살게 될 것”입니다(6a절). “‘야훼 우리를 되살려 주시는 이’(히브리어로는 아도나이 찌드케누)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를 것”입니다(6b절). 이렇게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고 영적 이스라엘이 된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로마 1:3~4).

그림: "즈가리야에게 드러난 계시", James Tissot

“즈가리야에게 드러난 계시”, James Tissot

《시편》<즈가리야 송가>를 차용하였습니다(루가 1:68~79). 본래 1독서 후에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인 《시편》을 부르는 것이 정식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성무일과 ‘아침기도’에 바치는 <즈가리야 송가>가 배정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모 마리아를 통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1독서의 성취임을 들려주기 때문입니다.

사제 ‘즈가리야’는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 늘그막에 얻은 아들(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어 ‘구세주의 오실 길을 준비’하고, ‘죄의 용서’와 ‘구원의 길’을 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1독서 말씀대로 하자면 하느님이 세우실 ‘참 목자’, 즉 하느님이 일으키실 ‘다윗의 정통 왕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닦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루가 1:76~77).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의 오실 길을 닦으며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을 주님의 백성들에게 알려야 할” 거룩한 사명을 위임받았음을 <즈가리야 송가>를 통해 성찰합니다.

2독서《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에 걸맞게 ‘그리스도 찬가’라 불리는 본문이 배정되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로는 골로사이 교우들이 ‘흑암의 권세들’이 가하는 심각한 도전을 경계하고 더 강하여지기를 기도합니다(11절). ‘흑암의 권세들’은 골로사이 교회 안에 퍼져 있던 각종 ‘이단사상들’(세속의 유치한 원리들, 골로 2:20)을 가리킵니다. 그 이단사상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영지주의’(골로 2:9), ‘그리스 철학’(인간의 지혜와 전통을 신뢰하게 하는)의 헛된 속임수(골로 2:4), ‘유대 율법주의와 금욕주의’(골로 2:16,21,23), ‘천체숭배와 천사숭배’(골로 2:8,18) 등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협하는 이러한 이단사상들을 배격하고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그리스도 찬가 또는 그리스도론)과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생활’을 가르치고 격려하기 위해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성도들이 ‘광명의 나라’에서 받을 상속에 참여할 자격을 ‘그리스도인’에게 주셨다고 격려합니다(12절).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을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다고 격려합니다(13절).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났다고 격려합니다(14절). 이렇게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그리스도 찬가)를 이어지는 구절에서 명백하게 증언합니다.

신약성서 학자들은 여기에 기록된 ‘그리스도 찬가’가 이전부터 전승되어 온 찬가를 사도 바울로가 문맥에 맞게 재편집한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1세기 중반 이전부터 초대교회가 함께 이 같은 그리스도론을 신앙고백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창조 이전부터 영원히 존재하십니다(15,17절).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시고(16,17절), 만물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존속합니다(17절).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그리스도께서는 볼 수 있는 하느님으로 이 땅에 성육신하셨습니다(19절).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하느님과 모든 만물 사이에 화해와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20절).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죽은 자들 가운데서 최초로 살아나시어 우주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18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18절). 이제 세례한 우리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는 ‘진복’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찬가는 이제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는 눈을 뜨는 오늘입니다.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다”, James Tissot

복음이야기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전하는 《루가복음》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루가 23:37,38,39) 직접적으로 ‘왕’이라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배정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분명 오늘은 사랑과 진리와 생명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미하는 축일입니다. 그런데도 ‘부활’이나 ‘승천’ 본문이 아니라 ‘십자가 수난’을 배정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왕권이 세상의 왕권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2독서 《골로사이》의 말씀처럼(골로 1:20) ‘십자가 희생’을 통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루가’는 복음이야기를 통해 ‘십자가 상’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왕’인지를 선포합니다. 십자가에 수난하시는 예수님은 모두에게 ‘조롱’과 ‘희롱’을 당하시는 왕입니다. 예수님은 백성의 지도자들로부터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라는 ‘조롱’을 당하시는 왕입니다. 예수님은 군인들로부터 ‘유다인의 왕’임을 증명하라는 ‘희롱’을 당하시는 왕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하나로부터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라는 ‘모욕’을 당하시는 왕입니다. 예수님은 그 ‘조롱’과 ‘희롱’과 ‘모욕’ 앞에서 ‘무력’하게 매달려 있는 왕이십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최후의 유혹’ 앞에 직면한 왕이십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마저 구원할 수 없는 너무나 ‘무력한 왕’입니다. ‘강함’(권력, 영광, 부요함, 화려함)을 자랑하는 ‘왕’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약함’(자기비움, 자기부여, 자기희생, 섬김, 낮아짐, 가난)을 자랑하는 ‘왕’이십니다.

“목마르다”, James Tissot

그러나 ‘무력’하게 십자가에 죽으신 왕께서 역설적이게도 온 세상의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진정한 힘이 ‘사랑’임을 보여주는 왕의 침상이 ‘십자가’임을 보아야 합니다. 그 십자가 죽음은 그리스도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영원한 승리의 보장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최고의 왕권과 주권과 권세를 계승 받으신 영원한 왕에 오르셨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하느님과 화해시키시는 영원한 왕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다른 죄수처럼 이 무력한 왕 속에서 진짜 왕을 발견하고 믿는 사람은 그 왕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낙원에서 이 왕과 함께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이것이 루가가 전하는 오늘의 증언입니다.

이제 저는 인생이 고난스럽다고 불평하는 그대에게 감히 말씀 드립니다. 어느 누구도 이 무력한 십자가의 왕 만큼은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이제 저는 인생에서 당하는 조롱과 희롱과 모욕으로 괴롭다는 그대에게 감히 말씀 드립니다. 어느 누구도 이 무력한 십자가의 왕 만큼은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이제 저는 인생의 짐을 짊어질 힘이 없다고 투덜대는 그대에게 감히 말씀 드립니다. 어느 누구도 이 무력한 십자가의 왕이 인류를 위해 짊어지신 그 무게만큼은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James Tissot

또한 이제 저는 인생이 고난스럽다고 불평하는 그대에게 감히 말씀 드립니다. 그 인생에 다음과 같은 진실도 포함시키라고 말입니다. 그대는 그대의 왕이신 분처럼, 이 전보다 더 옹골차지기 위해 잠시 약해진 것뿐입니다. 그대는 그대의 왕이신 분처럼, 이 전보다 더 빛나기 위해 잠시 구름에 가려진 것뿐입니다. 그대는 그대의 왕이신 분처럼, 왕이 되기 위해 잠시 ‘종’처럼 되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대의 눈이 열린다면 그 무력한 왕이 고난의 십자가 위에서 가장 멋진 구원의 춤을 추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서 있기조차 힘든 차가운 얼음판 위에서 가장 멋진 춤을 춤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였던 올림픽 영웅 ‘김연아’처럼 말입니다. 조롱과 희롱과 모욕의 해골산 위에서 주님은 자신을 이기고, 인류를 위한 가장 멋진 구원의 춤을 무릎을 굽히고 두 팔을 벌리며 추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 십자가의 예수를 통해 루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왕의 신비입니다.

“비탄에 잠긴 성모”, James Tissot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어렸을 때 동화를 들으면 가장 부러웠던 인물이 ‘왕’이었습니다. 이야기들 속에서 ‘왕’은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셈드니 왕은 부러워할 만한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진짜 왕은 자신의 마음대로 하는 인물이 아님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1독서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참 목자’처럼, 왕은 누구보다 먼저 ‘백성’을 위해야 함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성현(聖賢)들도 ‘민심’(民心)을 하늘의 말씀으로 알아듣고 선정(善政)을 펼친 왕은 ‘성군’(聖君)으로, 그렇게 하지 않은 왕은 ‘폭군’(暴君)으로 불렀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왕’이신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호칭은 별로 와 닿지도 않고 별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 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대부분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어떤 분들은 “대통령이나 총리가 왕 아니냐?”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왕’이라고 부를 때 그 호칭은 그런 정치 지도자들과 나란히 놓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실감이 안 나면 예수님을 한번 “우리의 대통령님, 우리의 총리님!”이라고 한번 불러보십시오. 그 맛이 살아납니까?

“창으로 찌르다”, James Tissot

어제 서울교구 의회에 참석했다가 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내어 광화문 광장에 나갔습니다. 이른 바 ‘태극기 부대’라고 불리는 분들의 집회가 있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듣기에도 민망하고 불편한 소음을 내고 있었습니다. 저 뿐 아니라 그 앞을 지나는 대부분의 얼굴들이 귀를 막고 지나가야 했습니다. 5년 임기 중 절반이 지난 대통령이고, 또 2년 후에는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손으로 갈아치울 수 있다고 여겨서 그렇게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성경》시대에 누군가를 ‘왕’이라고 부를 때, 그것이 말하려는 바는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시대에 누군가를 ‘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들의 삶에서 절대적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성경》시대에는 ‘제사장’, ‘예언자’, ‘왕’이 가장 중요한 인물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대통령’이나 ‘총리’가 아니라 여전히 ‘왕’이라 부르고 있는 우리는 자신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성찰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초대교회가 바로 그런 성찰을 우리보다 먼저 했습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초대교회는 《성경》시대에 가장 중요한 인물인 ‘제사장’, ‘예언자’, ‘왕’을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확장했습니다(1베드 2:9~10).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똑같이 중요해졌다는 통찰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왕’이라 부름으로써 초대교회가 예수님과 자신들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통찰해 낸 결과입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교회 전통으로 전해져서 우리는 세례를 줄 때 각 사람의 이마에 물을 붓습니다. 《성경》시대에 ‘제사장’, ‘예언자’, ‘왕’이 기름부음을 받았듯이 말입니다.

“예수를 무덤으로 옮기다”, James Tissot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영접한 우리도 왕가의 자녀들입니다. 가장 거룩하신 하느님 왕국의 자녀들입니다.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우리가 얻은 ‘신분’입니다. 이것이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이 우리에게 가리키려는 ‘자리’입니다. 주님의 왕국과 왕권이 영원하듯이 우리가 받은 이 ‘진복’(眞福)도 영원합니다. 지금 봉헌되는 이 성찬례가 우리와 함께 자신의 승리를 나누신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진복(眞福)의 확인’입니다.

물론 오늘날 ‘왕’은 봉건시대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한 꺼풀 벗기고 보면 ‘왕’이라는 호칭이 가리키는 바는 ‘참된 주체성’입니다. 다른 소리에 흔들리지 않는 당당한 나,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주체’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자유자’, 조롱과 희롱과 모욕을 이긴 나, 나를 이긴 나, 이것이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이 가리키는 ‘자리’입니다. 올 한 해 나는 얼마나 왕답게 살아왔는지, 신성한 하늘 왕가(王家)의 자녀로 살도록 불러주신 그 은총을 기리며 감사하는 자리가 오늘입니다.

부디 우리 자신이 해가 갈수록 더 성숙한 왕의 자녀가 되었음을 하느님께 보여드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수없이 쓰러지고 실패한 어제까지의 김연아를 이기고 마침내 멋지게 비상하여 올림픽 영웅이 된 ‘김연아’처럼, 우리도 이전보다 멋지게 고난의 얼음판을 지치며 구원의 춤을 출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영원한 나라에서 시상대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지상에 살던 우리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는 복된 인생들이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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