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0. 연중32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3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부활생명-영원한 위로와 좋은 희망을 주시는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입니다. 부활신앙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교훈하십니다. 우리는 죽음마저도 끊을 수 없는 하느님과의 인자한 사랑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살아계신 하느님으로부터 결코 잊히지 않습니다. 이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된 부활생명을 지금 여기서부터 잘 살아가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새로운 마음과 착한 행실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굳센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욥기 19:23-27상
  • 시편 – 17:1-9
  • 2독서 – 2데살 2:1-5,13-17
  • 복음서 – 루가 20:27-38

연중 3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부활생명-영원한 위로와 좋은 희망을 주시는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입니다.

어느덧 교회력의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은행나무들은 노란 이파리를 떨구어내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냈습니다. 다가가 ‘우리들을 위해 산소와 그늘을 만들어내느라 수고 많았다’고 고마운 마음을 건넵니다. 이제 한 겨울이 올 것이고, 은행나무는 맨몸으로 겨울을 견디어내야 합니다. 그러다 마침내 봄이 돌아오면, 죽은 것 같은 가지들마다 다시 새싹을 틔워내면서 주님의 부활을 축하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은 해마다 우리가 ‘부활의 약속’을 되새기도록 나무마다 당신의 ‘메시지’를 새겨놓으셨습니다. 오늘 <전례독서>도 교회력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우리에게 영원한 위로와 좋은 희망인 부활의 약속을 되새기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1독서는 《욥기》입니다. 욥은 인내심을 초월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결백이 입증될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죽기 전에 입증된다면 좋겠지만 죽더라도 ‘묘비’에 새겨 후대에는 자신의 무죄가 밝혀지기를 기대합니다. 이런 이유로 자신의 말을 글로 새겨 길이길이 보존해 두자고까지 호소합니다. 그러면서 위로를 주실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고백합니다. 하느님을 ‘변호인’(구원자, 대속자)으로 선포합니다. 아직 자신이 살아있을 때 하느님께서 ‘변호인’으로 속히 개입하셔서 자신의 결백함을 입증해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부활생명과 살아계신 하느님을 증언’하는 복음이야기의 배경 독서로 배정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솔직히 말하면 배정이 자연스럽지도 않고 난해한 본문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본문 그 자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아무런 암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욥의 고백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및 부활과 관련한 예언으로 묵상되어 왔습니다. 특히 ‘변호인’(구원자, 대속자)이라는 단어 때문에 더욱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의 구속사적인 관점이 투사된 배정인 셈입니다.

《시편》은 다윗이 생의 위기의 순간에 하느님의 날개 그늘 아래 숨겨주시기를 간청하는 <17편>에서 발췌했습니다. 마치 1독서 욥의 기도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억울하게 죄인으로 고발당한 다윗은 하느님께 자신의 결백과 보호를 간청합니다.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죄로 고발당했는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께 자신의 무죄함을 호소합니다(1~2절).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맹세까지 하면서 보호하심을 간청합니다(3~5절). ‘성소’에 숨어들어 하느님의 힘으로 안전하게 지켜주시기를 간청합니다(6~8절). 특히 다음 구절은 유명합니다.

당신의 눈동자처럼, 이 몸 고이 간수해 주시고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숨겨 주소서. – 시편 17:8

‘눈동자처럼’이라는 묘사는 참으로 강력한 인상을 줍니다(참고, 신명 32:10; 잠언 7:2; 즈가 2:8 개역개정판). 저도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할 때 꼭 이 구절을 사용합니다. 사실 우리 몸에서 ‘눈동자처럼’ 소중하고 신중하게 보호받는 곳도 없습니다. ‘눈동자’는 너무나 연약하고 소중하기에 얼굴뼈, 눈꺼풀, 속눈썹, 내부의 여러 막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먼지나 모래 하나라도 들어올 새라 가장 빠르고 민감하게 작동합니다. 따라서 “당신의 눈동자처럼 고이 간수해 주소서”라는 구절은 소중하지만 쉽게 다칠 수 있기에 ‘세심한 보호’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항상 안전하게 지켜지기 위해서 ‘많은 경비’를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가치 있지만 쉽게 다칠 수 있는 눈동자 같은 연약한 존재에 비유하면서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간청했습니다.

또 다윗은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숨겨 주소서”라고 호소합니다. 이 구절도 참으로 강력한 인상을 줍니다. <성가> 582장 ‘주 날개 밑’이 바로 이 구절로 만들어졌습니다(참고 시편 36:7; 57:1; 63:7). 암탉은 포식자가 나타나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아서 보호합니다. 예수께서도 예루살렘을 향한 사랑을 이 그림을 사용하여 나타내신 바 있습니다(마태 23:37; 루가 13:34). 이렇게 ‘눈동자’와 ‘날개 그늘 아래’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돌보신다는 강력한 그림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너무나 가련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이 꼭 필요한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그렇지만 ‘성소’에서도 다윗은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생명의 위협을 느낍니다(9절). 오늘 시편은 여기까지 배정했지만 좀 더 살펴봅니다.

그는 자신을 도와주고 변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오만불손한 악인들로부터, 굶주린 사자와도 같은 그들로부터 자신을 도와줄 수 있다고 절절이 호소합니다(10~13절). 하느님께 손을 펴시어 자신의 몸을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합니다(14절). 아침에는 정의로운 판결이 내려져 하느님을 찬미하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15절).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시편은 그 결말은 알려주지 않지만, 이 시가 《성경》에 남겨진 것을 보면, 하느님께서 다윗을 후대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죽음의 직전까지, 아니 죽은 것 같던 다윗은 ‘눈동자처럼’ 고이 간수해 주시고, ‘날개 그늘 아래’ 숨겨주시는 하느님의 은총 덕택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 《시편》이 ‘부활생명과 살아계신 하느님을 증언’하는 복음이야기의 배경으로 배정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죽음의 세계에 내버려두시지 않고 구원하시는(건져내시는, 일으키시는) ‘사랑의 하느님’임을 잘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위로와 좋은 희망을 주시는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詩)이기 때문입니다.

2독서는 사도 바울로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입니다. 연중시기에 낭독하는 2독서는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와의 연결이 느슨합니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구절은 ‘부활생명-영원한 위로와 좋은 희망을 주시는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을 증언하는 <전례독서>와의 연결이 빛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총을 베푸시어 영원한 위로와 좋은 희망을 주십니다. – 2데살 2:16a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사도 바울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은 구약에 예언된 ‘심판의 날’과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이스라엘의 예언적 약속과 결합되었습니다(1:7~8,10). 그러나 임박한 것으로 알았던 재림이 지연되면서 초대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이미 재림하셨다는 풍문에 속아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바울로는 어째서 그것이 사실이 아닌지 두 가지 관점에서 교훈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하나는 재림의 날이 오기 전에 먼저 신자들의 ‘배교’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교훈합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하느님이라 주장하는 멸망할 운명을 지닌 악한 자가 나타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교훈합니다. 바울로는 자신이 누차 이것들을 가르친 바 있다고 다시 강조합니다.

이제 바울로는 그들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얼마나 큰 지를 되새겨 줍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택하셔서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셨고 진리를 믿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바울로에게서 들었던 복음에 대한 믿음과 거룩한 생활을 통해 성령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광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받은 그들은 바울로에게서 배운 복음의 진리에 굳건히 서서 첫 번째 편지에서 가르쳐 준 전통을 굳게 지켜 나가야 합니다.

끝으로 바울로는 그들이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로와 힘’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으로 서신을 마무리합니다. 그 위로와 힘 덕택에 그들은 마지막 때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온갖 좋은 일을 실천하고 좋은 말,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부활을 믿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복음이야기는 ‘부활생명과 살아계신 하느님을 증언’하는 《루가복음》에서 배정했습니다. 연중 13주일에 시작해 지난 31주일까지 우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긴 여정(旅程)을 따라왔습니다. 《루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어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는” 하느님 나라 선교활동을 하십니다(루가 4:14~15).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활동하시던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실 날이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정하십니다.”(루가 9:51). ‘루가’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예수께서 ‘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시기 위해 걸으신 길의 ‘도착점’(완성)입니다. 동시에 성령 강림을 통해 탄생한 교회가 땅 끝까지 ‘예수의 길’(구원의 새 역사)을 이어놓는 ‘출발점’입니다.

‘루가’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그 여정(旅程)을 제법 길게 배정했습니다(루가 9:51~19:27). 실제로 그 여정이 계속해서 ‘올라가는’(예루살렘은 해발 780m에 위치) 길의 연속임을 지형적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까지 우리가 살펴 본 그 긴 여정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통해 성취하실 ‘구원(생명, 사랑)의 드라마’를 이루는 ‘구성들’(플롯)이었습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구원 역사의 도착점(완성)이자 새 역사의 출발점인 ‘예루살렘에 입성’(入城)하셨습니다(루가 19:28~40). 성주간 전례의 시작인 성지주일에 우리는 이 입성을 ‘호산나’를 외치며 몸으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며 ‘평화의 동네’라는 자기 이름과는 반대로 가는 ‘예루살렘의 파괴’를 예언하셨습니다(루가 19:41~44). 예수께서는 성전 뜰 안으로 들어 가 상인들을 쫓아내시며 불의한 상거래를 고발하셨습니다(루가 19:45~46). 이 일은 성전 상거래를 통해 이득을 취하던 특권층, 즉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의 미움을 샀습니다(루가 19:48). 한마디로 ‘성전정화 사건’은 특권층들이 보기에 자신들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사회근간을 뒤흔들어 놓는 ‘혁명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예수님을 죽이고 싶었지만 백성들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따르며 곁을 지키고 있었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루가 19:48).

성주간을 지나는 어느 날,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시던 예수님과 백성의 지도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이야기가 《루가복음》 2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그들은(마태오복음에는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 마르코와 루가복음에는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 누구에게서 권한(권위)을 받아 그 같은 ‘성전전화 사건’을 벌였는지 질문합니다. 성전을 지켜온 자신들의 ‘권위’(권한)가 예수 때문에 위협 당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권한’(권위)에 대한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시기보다 도리어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들이 반대하던 ‘세례자 요한’에 대해 질문하심으로써 그들의 ‘허위’(虛位)와 ‘허위’(虛威)를 벗겨내십니다.

그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예수님의 질문에 답변하기를 거부하자 예수님도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기를 거부하십니다. 그런 다음 자신을 잡으러 온 그들의 꼼수를 이미 알고 계신 예수님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루가 20:9~19). 참으로 포도원 주인의 아들까지 죽이는 ‘사악한’ 소작인들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대사제들(마태오에는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 비유가 자신들을 향한 것임을 알고 있었으나 예수님을 예언자로 따르는 백성들이 무서워서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루가 20:19~20).

기회를 엿보던 율법학자들과 대사제들은 선량한 사람처럼 꾸민 ‘밀정들’을 보냅니다. 예수님 말씀의 트집을 잡아 총독에게 넘기려는 음모와 술책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질문을 합니다. ‘악어논법’에 해당하는 ‘세금 논쟁’입니다. “우리가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루가 20:22) 그들의 간교한 속셈을 아신 예수께서는 ‘데나리온’ 한 닢(동전)을 보여 달라 하신 다음 이렇게 지혜를 발휘하십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 루가 20:25

이 대답으로써 예수님은 그들이 쳐 놓은 ‘올가미’로부터 빠져나오십니다. 카이사르(황제)는 자신이 로마제국의 주인이라는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동전’(데나리온)에 자신의 형상을 새겨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그 동전은 황제에게 속한 황제만의 전유물이기에 황제에게 돌려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당신이 ‘주인’이시라는 표시로 인간 안에 ‘당신의 형상’을 새겨 넣어 세상에 내보내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형상(인장)이 새겨진 ‘황제’마저도 ‘하느님의 것’이라는 ‘촌천살인’(寸鐵殺人)입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복음이야기의 배경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대사제들이 실패했다는 말을 전해들은 ‘사두가이파 사람들 몇 명’이 나섰습니다. ‘사두가이파’는 어떤 신념과 가치를 추구하던 당파일까요? ‘사두가이파’는 자신들을 솔로몬 시대 대제사장 ‘사독의 후예’로 자처했습니다(1열왕 2:35; 에제 44:15). 특히 기원전 2세기 ‘마카베오 가문’(제2경전 마카베오 참고)이 ‘시리아’의 식민통치에 맞서 ‘유대 독립’을 쟁취하자 정치 전면에 뛰어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운영권’을 쥐고서 세력을 키웠던 이들로 신분이 높은 제사장이나 경제력이 좋은 평민귀족 출신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제사장’ 조직이 ‘정치화된’ 보수적인 당파가 ‘사두가이파’입니다.

그들은 ‘기록된 율법’, 즉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을 《성경》으로 받아들였고, ‘예언서’와 ‘성문서’는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파’와 달리 ‘모세오경’에 ‘기록되지 않은 율법’은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레위기》의 ‘정결 규정들’과 ‘음식 규정들’을 자신들 같은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이들이 일상에서 철저히 지켜야할 규정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과 계약관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장소를 ‘성전’으로 보았고, ‘성전제의’가 계약관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주장했습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에서 ‘루가’가 밝히듯이 그들은 바리사이파와 달리 ‘부활’도 ‘사후세계’도 ‘천사들의 실재’도 부정했습니다(루가 20:27~38). 죽음을 넘어서는 삶에 대한 모든 믿음을 거부하고, ‘스올’(저승)의 그늘진 존재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을 고수했습니다.

그들은 ‘유대 의회’격인 ‘산헤드린’(최고법정)을 장악한 종교적 실세들이고, ‘사법권’(독자적 형법)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야파의 법정에 섰을 때 받으셨던 재판이 바로 이 ‘형법’입니다. 그들은 ‘성전 제의’만 보장된다면, 어떤 정치체제와도 손을 잡을 수 있는 일종의 ‘실용주의’를 취했습니다. 그 땅의 정치지배 구조를 문제 삼지 않았고, ‘메시아’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헤로데’와는 거리를 두었으면서도 로마 황제에게 충성서약을 하고 안정적인 ‘성전제의’와 ‘기득권’을 보장받았습니다. 그들은 백성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고,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힘을 잃고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런 신념과 가치를 추구하던 당파에 속한 사람들 몇이 예수께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도 않으면서 예수님을 곤란에 빠뜨리려고 ‘괴상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다시 말해 ‘부활신앙’이 터무니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합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의 이런 은밀한 생각을 숨겼습니다. 먼저 그들은 ‘수혼법’(嫂婚法)을 언급합니다(신명 25:5~10; 창세 38장; 룻 4장). 본래 ‘수혼법’은 ‘가족집단의 동질성과 유산’을 합법적으로 지키려는 목적을 갖습니다. 그들은 ‘수혼법’에 따른 상황을 철저히 지킨 한 집안의 예를 듭니다.

지난 연중 26주일(2019. 9. 29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들)에 《토비트》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토비트》는 성공회가 교리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 ‘외경’(外經)에 속하는 책입니다. 하지만 여러 ‘교훈’(특히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종, 자선, 부모공경, 기도와 단식, 결혼생활, 죽은 이에 대한 존중)을 얻을 수 있으니 한번쯤 읽어보시라 권했습니다. 특히 오늘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과 ‘부활논쟁’을 벌이며 ‘수혼법’의 예로 든 ‘그 불운한 여인’이 《토비트》에 등장하는 ‘사라’의 ‘판박이’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 주간에 몇몇 분이 저에게 《토비트》를 읽은 감상을 전해주기도 하셨는데,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야기를 마친 그들은 ‘부활신앙’을 조롱하기 위해 질문합니다.

이렇게 칠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았으니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 루가 20:33

이 질문은 자신들이 속한 당파의 신념과 가치와도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후세계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칠 형제나 그 여자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지 이 질문으로써 ‘부활’을 말씀하신 예수님을 조롱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조롱에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부활’과 ‘사후세계’와 ‘천사들의 실재’를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저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죽는 일도 없다.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 루가 20:34~36

예수님은 이 대답으로써 ‘부활생명’이 전혀 ‘다른 질서의 삶’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십니다. ‘사후세계’(이때는 천국이라고 하겠습니다)는 단지 이 세상의 연속이 아닙니다. 사후세계는 이 세상에서의 신분이 재배치되는 곳도 아닙니다. 사후세계는 ‘완전히 다른 질서’를 갖는 생명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부활’이나 ‘사후세계’를 ‘이 세상적인 이미지의 연장’으로 생각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오해도 바로잡아주십니다. 바리사이파는 ‘부활’과 ‘사후세계’를 믿었다는 점에서 예수님과 일치했으나 ‘부활관’은 달랐습니다. 좀 더 확장하면 예수님의 부활관은 ‘이슬람교’나 ‘몰몬교’의 ‘관능적인 천국관’과도 다릅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숫처녀 72명이 대기하고 있는 남성적인 천국관을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대답만으로 ‘사후세계’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얻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은 이 대답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천국은 결혼이 필요 없는 곳입니다. 누군가와 독점적이고 특별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습니다. 지상에서 남편과 아내로 독점적이고 특별한 관계 속에 살았다 하더라도 천국에서 ‘부부’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지금 부부로 살고 있는 분들에게 복음일지 아닐지 괜히 궁금해집니다. 또 천국에서는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부부로 살아야할 이유도 없습니다. 결혼은 단지 이 세상의 산물일 뿐입니다. 옛날부터 결혼은 자기 죽음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자손들을 낳아 부모가 되고, 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물려줌으로써 죽음너머까지 자기를 확장하고, 영원히 살고자 했던 욕망의 투사였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죽는 일이 없이 영원히 삽니다. 따라서 부모가 될 필요도 없고 자손을 낳을 필요 없습니다. 모든 관계는 변화되고 평등해집니다. 하지만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루가 16:27~28), 지상에서의 가족관계가 ‘사후세계’에까지 알려질 수는 있습니다.

둘째, 천국은 가장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현재의 가족관계를 포함하여 우리가 지상에서 누리는 그 어떤 영광(만족과 즐거움)도 천국에서 누릴 그 ‘영광’(만족과 즐거움)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영광은 아버지이신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자녀의 영광일 것이기 때문입니다(묵시 21:1~5, 22~23). 우리는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에게조차 주어지지 않은 ‘하느님의 자녀’(부활의 자녀)라는 칭호를 얻어 지복을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권위를 인정하는 ‘토라’(모세오경)를 사용하여 ‘부활의 실재’를 증언하시고, 복음이야기의 핵심으로 한 발 더 들어가십니다.

모세도 가시덤불 이야기에서 주님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이것으로 모세는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 루가 20:37~38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모세오경’의 한 장면을 소환하십니다. 그것은 모세의 소명을 전하는 ‘가시덤불’ 이야기입니다(출애 3:1~12). 하느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나는 네 선조들의 하느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 출애 3:4, 6

분명 모세 시대 이전에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그들이 살아있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만일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살아있지 않다면 하느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야 했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나는 네 선조들의 하느님이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었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절대적 권위로 떠받드는 ‘모세오경’에서 부활을 근거를 제시하십니다. 모세오경은 죽음을 넘어서는 영생에 대한 믿음을 내포하고 있음을 제시하십니다. 만약 그들이 여전히 죽은 채로 있다면 하느님은 죽은 사람의 하느님이 될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이라면 전능하지도 않으니 믿을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생명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살아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루가의 보편주의는 놀랍기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 모두 살아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과의 인자한 사랑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죽음으로 결코 끝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사후세계’에서도 결코 잊히지 않는 이름으로, 즉 인격적인 한 개인으로 분명히 살아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무명’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알고 계시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인격적으로 관계하십니다. 그들은 이 세상 슬픔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결코 죽지 않으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있습니다.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은 결코 ‘구천’(九泉)을 떠돌지 않습니다. 그들은 분명 ‘하느님의 품’에 있음을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압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교회력의 끄트머리에서 우리는 ‘부활신앙’을 가르치는 교회의 선포를 듣습니다. 교회력의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숙연한 자리에서 우리는 ‘부활생명’을 다시 되새깁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로가 강조한 것처럼 교회가 물려준 ‘부활신앙의 전통’을 굳게 간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신앙’(부활생명)을 조롱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부활과 영원한 천국의 실재를 명백히 가르치십니다. 특히 하느님은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고, 모두가 하느님 앞에는 살아있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결코 우리를 영원히 가둘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죽음을 뚫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 일어설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증언하는 진실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부활생명’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부활생명은 우리가 죽은 후에 맛보는 세계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도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영원한 생명’을 경험합니다. 어제까지의 오래된 ‘증오와 원한’이 오늘의 ‘용서와 사랑’으로 바뀌는 순간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맛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용서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한 위로와 좋은 희망을 주시는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반드시 이 진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그 용서에는 이웃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포함합니다.

계절이 지나가는 길목에 서 있습니다. 2019년이 마지막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또 세월이 흘러가더라도 우리는 재림하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노란 잎들을 떨군 채 말없이 서 있는 거리의 은행나무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지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오늘 부활하라. 오늘 용서하라. 오늘 사랑하라.

우리는 죽음마저도 끊을 수 없는 하느님과의 인자한 사랑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느님으로부터 결코 잊히지 않습니다. 부디 우리가 영원히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서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생명을 영원히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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