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3. 추수감사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31주일이자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교회력’에서 추수감사주일은 ‘주요축일’에 속합니다. 따라서 연중주일보다 우선하여 지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삶에서 누리는 모든 복의 참된 근원이 하느님이심을 교회 공동체가 함께 고백하는 기쁜 명절입니다. 자연과 인간과 하느님이 깊은 차원에서는 서로 연결된 한 공동체임을 확인하고 감사하는 축일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그 크신 은총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우리가 장차 도래할 ‘인생추수 때’(그것이 개인적 종생이든, 주님의 재림이든)도 잘 준비하는 ‘충성된 청지기’가 되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전능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 우리의 필요에 따라 풍성한 수확을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비오니, 바다와 육지의 소산물을 기르고 수확하는 이들을 축복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허락하신 은총을 잘 관리하고 나누는 충성된 청지기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신명 8:1-10
  • 시편 – 65:9-13
  • 2독서 – 야고 1:17-18,21-27
  • 복음서 – 마태 6:25-33

연중 31주일이자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교회력’에서 추수감사주일은 ‘주요축일’에 속합니다. 따라서 연중주일보다 우선하여 지킵니다. 오늘은 우리가 삶에서 누리는 모든 복의 참된 근원이 하느님이심을 교회 공동체가 함께 고백하는 기쁜 명절입니다. 자연과 인간과 하느님이 깊은 차원에서는 서로 연결된 한 공동체임을 확인하고 감사하는 축일이 오늘입니다. 이 복된 날, 성찬례 의향을 드러내는 <본기도 collect>는 이렇습니다.

전능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 우리의 필요에 따라 풍성한 수확을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비오니, 바다와 육지의 소산물을 기르고 수확하는 이들을 축복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허락하신 은총을 잘 관리하고 나누는 충성된 청지기가 되게 하소서.

이 기도를 바치는 주례자인 사제의 마음은 1독서 《신명기》를 설교하던 모세의 심정이 됩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코앞에 둔 이스라엘을 향하여 설교했습니다. 그 설교의 핵심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항상 기억하라’입니다. 그 계약에 충실하면 이스라엘은 번영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 것이라 선포합니다. 반면에 불충실하면 그들은 불행해지고 땅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 선포합니다.

주례자인 사제 역시 그런 심정으로 모든 기도와 예배의 참 주인이신 ‘하느님’을 불렀습니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들어오는 ‘세례성사’를 받았습니다. 교회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세례성사를 통해 연합한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났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하느님의 가정인 교회의 일원,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고 축복해 왔습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선물 받았을 뿐 아니라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교회는 교훈해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우신 이 세례성사의 약속은 결코 소멸될 수 없다고 교회는 강조해 왔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세례언약’을 충실히 지키며 살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느님을 거역하고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사탄의 모든 일’을 우리가 ‘거절하며’ 살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을 파괴하고 타락하게 하는 ‘세상의 악한 권세’를 우리가 ‘물리치며’ 살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는 ‘죄의 욕망’을 우리가 ‘버리며’ 살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도신경’이 가르치는 내용을 우리가 온전히 고백하며,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일구라는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살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2독서 《야고보서》도 이렇게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온갖 악한 행실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심으신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저 듣기만 하여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이렇게 실천함으로써 그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 야고 1:21~23, 25b

그렇습니다. 1독서 《신명기》에서 모세는 ‘계약의 하느님을 기억하라’고 설교했습니다. 주례자인 사제도 모세처럼 하느님을 기억하라고 <본기도> 첫 머리’를 바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전능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생각하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불렀습니다. 1독서 《신명기》에서 모세는 ‘계약에 충실’할 것을 이스라엘에게 설교했습니다. 《야고보서》 기자도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설교했습니다. 주례자인 사제도 모두가 ‘세례언약’에 충실할 수 있도록 다시금 그 언약을 들려드리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사제는 이어지는 <본기도>에서 모든 기도와 예배의 참 주인이신 ‘하느님의 속성’을 찬미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필요에 따라 풍성한 수확을 주시는 분”, 즉 ‘창조주’시라고 <본기도>는 ‘하느님의 속성’을 밝힙니다. 모세 역시 1독서 《신명기》에서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설교로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혹여나 ‘약속의 땅’을 잃어버리는 불행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광야생활을 하던 그들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먹이시고 입히시며 보살펴주셨는지 그 ‘은총’을 “더듬어 생각해 보라”고 재차 강조합니다(신명 8:2). 무려 40년 동안이나 하느님은 그들을 만나로 먹이셨습니다. 몸에 걸친 옷이 떨어지지 않도록 입혀주셨습니다. 발이 부르트지 않도록 건강을 지켜주셨습니다. 그토록 세심하고 풍성한 은총으로 그들과 함께 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약속의 땅에 정착한 이후로도 하느님의 보살피심은 계속되었습니다.

복음이야기에서 예수님도, 율법을 받아 전하던 모세처럼, 제자들에게 먹이시고 입히시는 인자하신 하느님의 은총을 상기시켜주십니다.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 마태 6:26,30

모세의 설교 뿐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도 오늘의 우리에게 진실입니다. 하느님은 이 땅에 당신을 대신하는 이들을 두셨습니다. 그들은 ‘농부와 어부들’입니다. 그들을 통해 하느님은 우리의 필요에 따라 세심하고 풍성한 은총을 지금도 내려주고 계십니다. 여전히 우리는 그들을 통해 ‘만나’를 제공받으며, 옷가지를, 건강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받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부모님이야말로 하느님을 대신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오늘은 어버이주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사제는 <본기도>에서 두 가지를 청원 했습니다. 하나는 바다와 육지의 소산물을 기르고 수확하는 이들, 즉 ‘농부와 어부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라는 청원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 식탁에 풍성한 먹거리가 올라오도록 ‘가장 먼저 수고한 그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라는 청원입니다. 이 청원을 바침으로써 우리는 오늘 2독서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그들이 얻은 모든 소산물의 근원에 창조주 하느님의 은총이 ‘먼저’ 작용했음을 고백하는 셈입니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교훈합니다.

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늘의 빛들을 만드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 야고 1:17a,b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을 위한 청원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총을 잘 관리하고 나누게 해 달라는 청원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인생이어서는 안 된다는 기도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고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나누며 살겠다는 기도입니다. 2독서 《야고보서》는 이렇게 교훈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 – 야고 1:27

끝으로 <본기도>는 이 같은 청원들의 ‘목적’을 하느님께 아뢰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그 목적은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 우리가 ‘충성된 청지기’로 세상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것이 추수감사 축일인 오늘 우리가 되새겨야할 성찬례의 가장 중요한 기도 의향입니다. 복음이야기도 <본기도> 청원들의 목적처럼 ‘충성된 청지기’로 부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훈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 마태 6:33a

예수님 ‘말씀의 거울’에 우리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봅니다. 우리는 자유를 주는 완전한 말씀대로 살아가는 ‘충성된 청지기’입니까? 아니면 그 말씀을 잊어버리고 사는 ‘이방인들’입니까? 우리는 예수님 말씀대로 실천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까? 아니면 실천 없이 그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바람대로 우리가 ‘충성된 청지기’, ‘하느님의 자녀’로 오늘을 살고 있는지 추수감사주일 <본기도>는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순환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번잡한 대도시에 삽니다. 그러다 보니 ‘추수’(秋收)란 말이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추수’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는 분은 없습니다. 더욱이 교회가 ‘추수감사 축일’을 지키도록 안내하는 이유는 문자적인 뜻을 넘어섭니다.

‘추수’는 소산물을 거두어들이는 일입니다. 한 사람의 수고와 노력의 ‘결실’을 가리킵니다. 한 톨의 쌀은 지난해 겨울부터 준비하여 올해 가을까지 농부가 쏟아 부은 수고와 노력의 ‘결정체’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추수’란 말을 쓸 때는 이런 문자적인 뜻 너머를 보라는 초대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수고와 노력 그 이상의 것을 보라’는 초대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진짜 농부는 한 톨의 곡식 속에 들어 있는 ‘햇빛’과 ‘비’와 ‘바람’을 먼저 본다고 합니다. 자신의 노고만을 생각하며 교만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열매마다에 작용한 ‘하늘의 섭리’를 기억하며 ‘겸손히’ 하늘을 우러른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성실히 수고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이 돌보시지 않는다면, 단 한 푼의 수입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기억’(생각)하는 것, 즉 ‘감사’가 오늘 우리가 다시금 되새겨야 할 ‘믿음’입니다.

모세도 우리가 이 ‘믿음’에서 빗나가지 않도록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 재산은 내 손으로 뼛골이 빠지게 일해서 모은 것이다.’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거든, 너희 하느님 야훼를 생각하여라.” – 신명 8:17~18a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엉뚱한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우리도 ‘감사의 믿음’이 아니라 가끔 ‘엉뚱한 생각’이 드는지 궁금합니다. 모세는 우리 삶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은혜를 늘 생각하며 살아가는 신앙’, 다시 말해 ‘감사하는 신앙’이 올바른 삶의 태도라고 교훈합니다. 그렇게 ‘감사하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신자는 예수님의 말씀처럼(마태 6:33),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에 맞게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가치’를 추구하고, 자신의 행동 속에 그 ‘가치’를 녹여낼 수 있습니다.

어느덧 대림절기로 시작한 ‘다해’를 마감하는 11월의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화가이신 하느님의 솜씨로 이 땅 어디를 가나 물감을 뿌려놓은 듯 빛납니다. 울긋불긋 깊어가는 가을빛은 참으로 밝고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귀한 세상입니다. 하느님은 온 땅과 바다, 그 안에 사는 크고 작은 모든 피조물들을 만드셨습니다. 성시 <65편>에서 노래한 것처럼, 하느님은 이 땅을 찾아오시어 철따라 우로(雨露)를 내려 풍년을 주셨습니다. 온갖 과일나무가 풍성한 열매들을 자랑하고, 논밭은 오곡으로 넘실대도록 하느님께서는 돌보아 주셨습니다. 강과 바다는 잡고 잡아도 다함이 없는 물고기로 넉넉하도록 하느님께서는 돌보아 주셨습니다. 농부와 어부들이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며 콧노래를 부르도록 하느님께서는 이 땅에 복을 내려 한 해를 장식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수확하여 제공해 준 모든 소산물의 근원에 ‘창조주 하느님의 은총’이 먼저 작용했음을 보는 눈이 있기에 오늘도 ‘하느님께 먼저 감사’를 바쳐 올립니다.

또한 우리가 먹고 입고 누리는 모든 것들 속에 담긴 ‘농부와 어부들의 수고’를 기억하며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습니다. 사실 우리 식탁에 올라온 그 어느 것도 스스로 재배한 것은 없다시피 합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농부와 어부들이 ‘가장 먼저’ 수고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의 것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삶에 ‘먼저 일어난 은총들’을 기억하며, 하느님과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면 세상살이는 분명 더 평화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감사의 마음을 잃어버릴 때 공동체는 갈등과 대립에 휩싸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현재 삶의 형국이 어떻든 ‘창조주’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상기하고 감사하는 축일입니다. 살다보면 햇볕이 쨍쨍한 날도 있고, 비바람으로 앞조차 내다볼 수 없는 어려운 때도 있습니다. 햇볕이 쨍쨍할 때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비바람 속에 있어보면 햇볕 쨍쨍한 날에 대한 고마움이 절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고생스런 비바람도 우리 잘되라고 섭리하신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모세는 교훈합니다(신명 8:5). 어째서 그 고난의 때가 은총입니까?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에 붙어있던 불순물들이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수해지고 겸손해지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은 우리의 생명이 존재하도록 ‘먼저 수고한 이들’이 있음을 감사로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우리 자신이 보다 ‘더 큰 세계의 일부분’임을 깨우쳐 주는 축일입니다. 종국에는 자연과 인간과 하느님이 서로 연결된 한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오늘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앞서 일어나는 ‘많은 수고들’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자연과 인간과 하느님이 깊은 차원에서는 서로 연결된 ‘하나의 공동체’임을 기억하십시오. 이 같은 깨달음, 즉 추수감사의 정신이 우리 속에 올바로 새겨져 있을 때, 우리는 혼자서만 잘 살려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고 함께 나누는 ‘충성된 청지기’의 삶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한해의 ‘추수’를 마친 농부가 자신의 삶에 작용한 섭리를 생각하며 겸손히 하늘과 땅을 바라봅니다. 우리도 그런 은총의 마음으로 지나온 한 해를 돌이켜 봅니다. 꼭 특정 사건을 말씀드리지 않더라도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다사다난한 일들로 채워진 한 해였습니다. 그런 일들 속에서 하느님을 기억하고 믿음을 고백하며 감사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견디며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임마누엘, ‘하느님을 생각(기억)하는 믿음’으로 그 순간들을 다 견디어 내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언젠가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룰 것이라는(로마 8:28) 그 ‘믿음’ 하나로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여기까지 온 우리 모두가 정말 자랑스럽고, 고맙습니다.

이 시간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우리가 가진 그 믿음대로 하늘의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인생추수 때’(그것이 개인적 종생이든, 주님의 재림이든)를 잘 준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추수’는 농부가 벼 천 가마를 수확하는 일이나, 대표이사가 수십 억 원의 수입을 올리는 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인생일대의 중차대한 추수’입니다.

사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이 땅에 심으신 ‘하늘 씨앗’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씨앗인 나의 생명, 성품, 인격이 잘 자라고 영글어 저 ‘하늘 곳간’에 들어가는 일보다 우리가 더 관심해야 할 ‘추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 하늘 곳간에 들어갈 알곡으로 충실하게 영글어 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양분은 ‘감사’입니다. 감사는 이제 막 맺히기 시작한 이삭 같은 우리의 삶에 병충해가 다가올 때 그것을 이기게 하는 ‘거름’이며, 더 알차게 영글게 하는 거름입니다. 뿐만 아니라 감사가 내면에 흐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은총 속에 살아가는 것임을 알기에 이웃에게 ‘관대’할 수 있습니다. 내 것이라 고집하지 않으며, ‘충직한 청지기’처럼 자신의 재물을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생명(성품, 인격)을 ‘가라지’(독보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닮은 알곡이 되게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감사성찬례로 모였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생명이 어디서 왔으며, 그 생명이 어떻게 완성되어야 하는지 생각하면서 장차 도래할 ‘인생추수 때’(그것이 개인적 종생이든, 주님의 재림이든)를 잘 준비하여야겠습니다. 잘 준비하는 길은 모세의 설교처럼 ‘늘 하느님을 기억(생각)’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충직한 청지기’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시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들을 성령의 조명을 받아 날마다 기억하십시오. 그 기억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처지에서도 겸손할 수 있게 합니다. 감사할 수 있게 합니다. 가라지(독보리)가 아니라 ‘하늘 곳간’에 들어가는 ‘알곡’으로 무르익게 합니다.

부디 ‘추수감사 찬송’을 부르며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가 ‘하늘 곳간’에 들일만한 알찬 알곡으로 영글게 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남은 한 해도 인자하신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의 교회와 가정과 일터, 특별히 이 나라 위에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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