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7. 연중30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30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하느님자비를 간청하는 이들에게 오늘 구원을 주시는 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지나간 과거를 붙잡고 묻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오늘,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는 물으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찬례 중에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구원받아야 할 자신에 대해 더욱 바른 믿음과 바른 인식을 갖게 되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본기도

주 하느님,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살피시며 허물을 다 아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모든 탐욕과 집착을 버리고 겸손히 주님을 따라 삶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예레 14:7-10,19-22
  • 시편 – 84:1-7
  • 2독서 – 2디모 4:6-8,16-18
  • 복음서 – 루가 18:9-14

연중 30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하느님자비를 간청하는 이들에게 오늘 구원을 주시는 입니다.

1독서는 죄의 고백과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는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는 민족이 저지른 죄악을 인정하면서도 하느님을 향해 탄원합니다. 그는 유다 백성이 고난을 겪는 원인을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났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하느님은 그 죄악을 잊지 않고 그들에게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렇지만 예레미야는 이러한 징벌이 용서하시고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성품에 맞지 않다고 구슬프게 탄원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시어 “저버리지 말아 달라”고 민족과 하느님 사이에 서서 ‘중보’(中保)합니다. 그는 하느님이 아니라면 누가 그들을 도와 줄 수 있을지 묻는 짧은 수사적 질문 세 개와 희망 가득한 믿음의 선언으로 예언을 마무리합니다. 이렇게 민족의 ‘죄악을 인정’하면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는 희망의 모습이 복음이야기의 ‘세리의 기도’와 상응하기에 배경독서로 배정되었습니다.

《시편》은 하느님과 성전을 향한 순례자의 사랑과 갈망을 노래하는 <84>입니다. 흔히 평화를 노래하는 ‘시편의 진주’라고 불려 집니다. 크게 세 단락으로 나뉩니다. 첫째 단락(1~4절)은 하느님의 집, 즉 예루살렘 성전을 사모하는 노래입니다. 둘째 단락(5~7절)은 하느님께 힘을 얻어 성전을 향해 순례길에 오른 순례자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충직한 이스라엘은 마침내 성전 안에서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느님의 깊은 사랑의 섭리를 발견하고 행복감에 젖습니다. 셋째 단락(8~12절)은 은총과 복을 내려주시는 하느님과 성전의 탁월함을 찬미합니다. 자기 민족에게 베풀어진 평화를 발견하고 감사의 기도를 바쳐 올립니다. 성전 안에서 발견한 하느님의 사랑의 섭리와 감사를 생활 속에서 이어가겠다는 찬미로 마감합니다. 오늘 시편은 이 중에서 둘째 단락까지만 배정했습니다.

84편이 <전례독서>로 배정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순례자가 찾아 온 성전은 본래 백성 전체의 집입니다. 어떤 인생이든지 성전에 찾아들면 그 안에서 하느님이 주시는 용서와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기 인생을 향한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참새도 깃들이고 제비도 보금자리를 얻는 성전인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는 얼마나 큰 은총이 허락된 곳이겠습니까? 이렇게 오늘 시편은 비록 죄 많은 인생길을 살아왔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은총을 사모하여 참새처럼, 제비처럼 성전에 찾아든 세리에게 베풀어진 깊은 감사 찬미처럼 들립니다.

물론 이제 그 성전은 더 이상 우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그 성전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우리가 성령이 거하시는 집입니다. 성전인 우리도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푸신 사랑의 섭리와 감사를 생활 속에서 이어갈 것을 이 ‘성찬례’에서 다짐합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는 순례자의 시편처럼 여러분이 좀 더 자주 우리의 공적 예배를 위해 축성된 이 성전을 찾아와 찬미를 바치시기를 권합니다. 가능한 한 자주 성전을 찾아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지체들과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시기를 권합니다. 성전은 기도와 찬미가 울려 퍼져야 하는 우리 모두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2독서《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입니다. ‘믿음’을 지키며 달려온 사도 바울로의 투쟁을 전해줍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온 세상의 구세주시라는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 복음을 전파하다 그는 핍박을 당했고 옥에 갇혔습니다. 이제 자신의 미래가 순교임을 직감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AD 60년대 중엽에 있었던 ‘네로 황제’ 박해시절에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낙담하지 않습니다. 그 무엇도 그의 복음 전파를 막아설 수 없었듯이 그의 믿음은 옥의 벽마저 뚫고 나와 이렇게 빛납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 2디모 4:8

바울로는 그리스-로마 문학양식에서 영웅으로 묘사되는 양식을 차용해 자신의 확신에 찬 ‘승리의 믿음’(정의의 월계관)을 묘사합니다. 그는 이 승리의 믿음이 자신뿐 아니라 ‘순교’를 앞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것이라고 교훈합니다. 그가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본문에 이어져 있습니다(17~18절). 그것은 ‘하느님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그 확신에 찬 승리의 믿음은 일종의 기도로 ‘하느님-자비를 간청하는 이들에게 오늘 구원을 주시는 분’이라는 <전례독서> 주제와의 연결이 빛납니다. 사실 바울로의 ‘믿음의 기도’(17~18절)는 ‘성 목요일 성찬제정 예식’ 때 사제가 ‘제대보’를 벗기며 바치는 <시편 22편>과 유사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시편 22편>을 마음에 두셨습니다. 순교를 앞둔 바울로도 비슷한 상황에서 주님과 같은 시편으로 위로와 격려를 받았던 셈입니다.

그는 앞으로 어떤 고난이 닥친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어 하늘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승리의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습니다. 그의 ‘기도’와 확신에 찬 ‘승리의 믿음’처럼 우리 앞에 놓인 고난을 이길 유일한 힘은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확신하는 ‘믿음’으로부터 나옵니다. 순교를 예상하면서도 끝까지 승리의 믿음을 간직한 바울로와 모든 순교자들처럼 우리도 믿음의 사람이기를 축복합니다.

복음이야기《루가복음》에서 배정했습니다. 자기네만 옳다고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을 향한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독선적인 사람들의 표본(標本)으로 ‘바리사이파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사람의 표본으로 ‘세리’를 등장시킵니다. 그들은 분명 ‘동족’이지만 전혀 ‘공동체’라는 의식이 없습니다. 한 편은 당대에 존경받는 사람의 표본이고, 한 편은 당대에 경멸받는 사람의 표본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극과 극에 위치한 이 두 사람을 비유에 등장시켜 하느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자세들을 가르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겸손’, ‘자기 진실을 대면하기’,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의탁하기’입니다.

이제 복음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당연히 ‘의도’와 ‘목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건물’을 세울 때도 ‘특별한 용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삼위일체 하느님을 예배하기 위해 성당에 왔습니다. 물론 하느님은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특별히 구별한 공간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서 어느 곳에서나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잘 유념해야 합니다.

비유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그들은 둘 다 ‘성전’에 갔습니다. 바리사이파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던 사람들로서 예수님 당시에 약 6,000명가량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구별된 의인’이라 불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성당에 잘 다니고, 신자의 의무를 다하며, 소위, 믿음이 좋다고 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의 내면은 썩은 송장이 들어있는 무덤처럼 냄새나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 역시 그랬습니다. 그는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남자만 들어갈 수 있는 구역으로 가서 두 손을 쳐들고 보란 듯이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 루가 18:11~12

그는 먼저 자신이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는 점을 구체적인 예까지 들어가며 감사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올바름’을 확신하고 ‘자신감’에 차서 바치는 기도입니다. 곱씹어 볼수록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살아온 과거에 대해 ‘보고하며 자랑’합니다. 다른 유다인들은 일 년에 한 번, 속죄의 날에만 단식하는데, 자신은 일주일에 두 번씩, 그러니까 1년이면 무려 104일이나 단식한다고 ‘자랑’합니다. 다른 유다인들은 ‘곡식’이나 ‘포도주’나 ‘올리브기름’을 생산했을 때만 소출의 ‘십일조’를 바치는데, 자신은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라고 보고하며 자랑합니다. 이렇게 그의 기도는 하느님이 베푸신 일에 대한 감사는 아주 짧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을 위해 해 온 일에 대해서는 아주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신이 그토록 독실하다는 점을 하느님께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고 있으니 누가 보더라도 자신은 올바르고, 모범적이라는 ‘자화자찬’입니다.

그러나 그의 장황한 ‘기도’는 정확히 말하면 ‘자기기만’입니다. 그는 하느님을 향하여 기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문의 뜻을 살려 번역하면 “그는 자기 자신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었다.”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애쓰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분명 그는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삶의 모든 것이 하느님과 관계된 것임을 알고 있을 정도로 훌륭한 믿음을 간직한 그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성전’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는 ‘성전’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성전’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없었으니 그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자화자찬, 자기자랑만 늘어놓는 ‘자기’말입니다.

더욱이 그의 기도는 세리, 즉 타인을 업신여기는 ‘심판의 기도’였습니다. 그는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느님을 불신하고 있습니다. 회개의 기도를 통해 세리의 불의한 과거가 용서될 수 있음에도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처럼 경멸했습니다. 이처럼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는 기도라기보다는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일종의 보고입니다. 타인과 비교해 자기 삶의 우위를 주장하는 교만하고 분리된 성별의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많았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이라고 비유의 첫머리에서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비유 결론에 따르면 그의 기도는 하느님을 우롱하는 아주 교만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금껏 실천해 온 ‘공로’(자기 의)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당연히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께서도 그런 자신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야할 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그의 기도는 자신의 신앙적 실천이 ‘사랑’에 기초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올바름을 보상받고 보답받기 위한 일종의 ‘거래’였음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또 다른 한 사람인 ‘세리’는 어땠습니까? 세리의 기도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와는 정반대입니다. 예수님 당시 세리는, 목동, 백정, 의사, 이발사, 행상인, 고리대금업자, 오물수거꾼과 함께 천한 직업을 가졌다고 하여 ‘직업상의 죄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특히 ‘세리’는 로마제국에 빌붙어 먹고 사는 창기,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라고도 불렸으며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한 마디로 ‘세리’는 ‘미운털’이 박힌 존재였습니다. 그런 죄인 중의 죄인이 ‘지금’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남자만 들어갈 수 있는 구역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멀찍이’ 섭니다.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 루가 18:13b

바리사이파 사람은 ‘스스로를 옳다’고 여겼기에 ‘오늘’ 하느님께 요청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죄인’(원문에도 ‘죄 많은’이 아니라 ‘죄인’입니다)으로 직면한 ‘세리’에게는 ‘오늘’이 하느님의 자비가 무엇보다도 필요했던 날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다른 이를 쳐다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만일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진다면 자신이 멸망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의 기도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진정으로 깨달은 기도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철저히 직면한 ‘현재의 기도’였습니다. 죄인인 그에게는 ‘오늘’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입는 것’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이처럼 그의 기도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죄악을 하느님 앞에서 인정하며 “우리를 저버리지 마십시오.”라고 중보(中保)한 1독서 예레미야의 기도와 상응합니다.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은 결론을 알려주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철저히 지켜온 그 바리사이파 사람을 칭찬하실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에 대해 하느님으로부터 마땅히 보상받아야 할 ‘첫째들’이라고 단정 짓곤 했습니다. ‘세리들’에 대해서는 전혀 구원받을 희망이 없는 ‘꼴지들’이라고 업신여겼습니다.

예수님의 결론은 어떻습니까?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 루가 18:14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를 완전히 뒤집는 말씀을 하십니다.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스스로를 본받아야 할 ‘귀감’으로 자부한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겸손히’ 스스로를 ‘죄인’으로 ‘직면’하고,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자신을 던진’ 세리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부심으로 거들먹거리는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그 ‘세리에게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성전’이라는 그 장소에 맞게 자신의 ‘의도’와 ‘목적’을 성취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세리’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외에는 달리 구원받을 길이 없음을 철저히 인식하고 ‘회개’ 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서 말미에, 구원받아야 할 ‘현재의 자신’에 대해 이 세리처럼, 그렇게 인정하고 살아가는 이들만이 종말의 때에 진정으로 높여질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스스로를 높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낮추실 것이고, 겸손히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높여주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이웃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살아갑니까? 중요한 것은 자기 옳음에 대한 자랑이 아니라 자신과 의견이 다르고, 주장이 다른 이웃을 예수님 마음으로 ‘오늘’ 수용하고,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의 기도에 나타난 진정한 차이는 하느님 앞에서 ‘오늘’ 그들이 취하고 있는 ‘자기인식’에 있었습니다. 세리는 하느님 앞에서 현재의 자기 처지를 정확하게 ‘직면’하고, 가장 적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도 성찬례를 바치기 위해 성전에 나온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갖추고 있어야 할 진정한 삶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자기 옳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는 ‘겸손한 믿음’입니다. 죄 속에 살아온 가련한 ‘자신의 진실을 직면’하고, ‘겸손히 인정하기’입니다. 자비를 간청하며 나아오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분임을 믿고 의탁하기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 존재에게 지금도 확인하시는 사항이고, 우리 믿음의 기도가 서 있어야할 자리입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가 가진 ‘자아상’들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변됩니다. 하나는 남들이 보기에 인정할만한 자기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자기 모습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는 나의 ‘강점’(장점)이고 다른 하나는 나의 ‘약점’(단점)입니다. 우리는 이 중에서 어느 모습에 마음을 더 두고 살아갑니까?

동기부여 강사들은 자신의 ‘강점’에 더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강점을 더 개발해서 인생에서 성취하고 성공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는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강점(장점) 때문에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약점(단점)과 허물들 덕택에 신앙을 갖게 됩니다. 자신의 강점(장점) 때문에 하느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점(단점)과 허물 때문에 가슴을 치며 하느님께 무릎 꿇게 됩니다. 자신의 강점과 장점 때문에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점(단점)과 허물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필요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는 바로 이런 우리의 두 모습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더 가깝습니까? ‘바리사이파 사람’은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의 상징입니다. 나는 정상이고 남은 비정상이라며 비판하는 마음의 상징입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드러내놓을 만하다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만하다고, 스스로 자부(自負)하는 나의 ‘강점’을 상징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상징입니다. 자책하는 마음, 숨기고픈 우리의 ‘약점(단점)과 허물’을 상징합니다. 이 약점(단점)과 허물은 분명 내 것임에도 낯설기만 합니다. 피하고 싶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숨기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이 두 모습이 어떻게 작용할까요? 놀랍게도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통로는 자신의 강점(장점)이 아니라 약점(단점)과 허물들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은 세리 같은 내 안의 약점(단점)과 허물들을 통해 나를 부르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도 그랬습니다. 그 중에서도 ‘야곱’이 표본입니다.

지난주일 저는 이스라엘 성지순례 중이어서 설교문을 교회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설교의 감각을 유지하려고 밤이면 숙소로 돌아와 <전례독서>를 펼치고 ‘씨름’을 하곤 했습니다.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주일 1독서는 《창세기》입니다. 평생을 속이는 자로 살아온 야곱이 이스라엘로 거듭나는 대전환이 주제였습니다. 그는 약삭빠르게 아버지를 속였고, 형 에사오를 속였으며, 삼촌 라반도 속였습니다. 그렇게 속이는 일에 선수였던 그는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 그는 괴로워합니다. 왜 그랬습니까? 다른 사람을 속이며 승승장구했지만, 단 한 사람만은 속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한 사람이 누굽니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베델의 하느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살아온 ‘자기 자신’입니다.

《창세기》는 야곱이 그렇게 살아온 자신의 약점(단점)과 허물을 직면해야 했던 그 시간을 ‘밤’이라는 상징적 단어를 통해 표현합니다. ‘밤’이라는 시간은 자신의 ‘강점’(장점)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때를 상징합니다. ‘밤’은 자신의 ‘약점’(단점)과 허물로부터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어서 오롯이 그것들과 ‘같이’ 있어야 하는 괴로운 시간입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 밤이 ‘존재의 변화’를 일으키는 신비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오시는 ‘절대적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인간이 자신을 찾아오시는 하느님과 함께 이렇게 지새워야 하는 그 밤을 ‘씨름’이라는 또 하나의 상징적 단어 속에 담아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 ‘씨름’이라는 말을 씁니까? 수월한 일을 다루는 것을 ‘씨름’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낯선 일, 다루기 힘든 일을 마주해야 할 때 우리는 ‘씨름’이라는 말을 씁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약점(단점), 내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나의 ‘허물’을 ‘직면’해야 할 때 우리는 ‘씨름’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 ‘씨름’이라는 말을 복음이야기에 나오는 ‘기도’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야곱’은 무엇을 가지고 ‘씨름’했겠습니까? 그가 무엇을 가지고 기도했겠습니까? 바로 자신의 약점(단점)과 허물이었겠지요. 평생토록 약삭빠르게 남을 속이며 살아온 그의 성품, 결코 떨쳐버릴 수 없었던 그의 기질이었겠지요. 그렇습니다. 기도는 자기를 발견하고, 직면하는 씨름입니다. 어떤 자기냐면, 세리 같이 낯 뜨거운 자기의 모습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객관화’라고 합니다. ‘세리’는 늘 내 안에 있으면서도 구원받지 못한 또 다른 나의 모습입니다. 그런 나를 만나면 우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가슴을 칩니다. 그런 약점(단점), 내 안의 낯선 자기를 만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늘 문’을 두드리며 ‘겸손’해 집니다. 그렇게 가슴을 치는 겸손한 ‘기도의 순간’을 통해 하느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언제나 자신의 약점(단점)과 허물에 대한 인정은 늘 ‘자기구원의 시작’입니다.

이제 자신의 약점(단점)과 허물을 보게 되거든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그 순간이 바로 하느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순간입니다. 그 약점(단점)과 허물을 통해 하느님이 나를 부르시는 순간입니다. 그러한 자신을 밀쳐내지 말고 보듬어 안아주십시오. 자신의 그런 모습 때문에 우리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집을 찾게 되고, 하느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내가 바치는 겸손한 기도를 외면치 않으시고 받아주십니다. 그런 내가 드리는 겸손한 예배를 받아주십니다. 나아가 이러한 기도와 예배를 통해 자비를 누리는 이들은 이웃의 약점(단점)들과 허물들마저도 자비의 눈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수행자’들이 가슴에 새기는 사자성어 중에 ‘관인엄기’(寬人嚴己)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하라”는 뜻입니다. 듣기에는 참 좋은 말 같지만 적용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객관화’라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에게는 ‘관대’(자비)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잣대’(정의)를 들이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는 ‘자비’를, 남에게는 ‘정의’를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 자신이 ‘용서’받기를 원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길은 ‘정의’가 아니라 ‘자비’입니다. 참으로 ‘관대한 자비’가 엄격한 정의보다 더 풍부한 결실을 가져온다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믿습니다. 우리는 ‘자기 의’를 세우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더욱이 자비와 용서의 실천은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셨습니다(마태 5:7; 6:12).

오늘 복음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르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지나간 과거를 붙잡고 묻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오늘,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는 물으십니다. 우리는 자신이 살아온 과거에 대해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보고하거나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낮추어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현재의 기도’를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성찬기도 첫 순서를 ‘세리의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과 소원을 다 아시며, 은밀한 것이라도 모르시는 바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성찬례 중에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구원받아야 할 자신에 대해 더욱 바른 믿음과 바른 인식을 갖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자기 자신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게 될 때 비로소 좀 더 너그러워지고, 좀 더 이해심 많게 되며, 이웃을 좀 더 수용할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우리가 “우리를 저버리지 마십시오.”라고 중보 기도한 예레미야처럼, 이 시대를 향한 중보자로 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며 약점(단점)과 허물을 다 아시는 주님만 온전히 바라보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당신의 의를 덧입혀 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기를 축복합니다. 꾸준한 기도생활을 통해 자신의 약점과 허물을 잘 통합해 가는 겸손한 사람이기를 축복합니다. 겸손히 주님을 따라 살아간 사도 바울로처럼, 믿음의 길을 잘 달려감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우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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