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0. 연중29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29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기도, 언제나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사람으로 사는 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입을 벌리기도 전에, 우리의 소원을 다 알고 계십니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속히 당신의 마음을 바꾸시도록 졸라대는 떼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지성(知性), 감정(感情), 의지(意志)를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에 맞추는 ‘연대’(連帶)입니다. 참으로 기도는 ‘입술’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지는 하느님과 이웃과의 ‘연대’(連帶)입니다. 그렇게 ‘연대’(連帶)하는 만큼 우리는 ‘언제나 기도’할 수 있고, 즉각적인 응답이 없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항상 용기를 간직’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의 정신’이 우리에게서 실천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주 하느님, 주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을 언제나 보살피시고 지켜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기까지 끊임없이 기도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32:23-32
  • 시편 – 121
  • 2독서 – 2디모 3:14-4:5
  • 복음서 – 루가 18:1-8

연중 29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기도, 언제나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사람으로 사는 길’입니다.

1독서《창세기》입니다. ‘끈질긴 씨름’을 통과한 야곱에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시는 대전환의 이야기입니다. 그 ‘씨름’을 ‘내면의 영적투쟁’, 즉 ‘기도’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라는 (모든 것의 기원을 알려주는) 책답게 이 이야기 하나로 여러 전통의 기원을 알려줍니다. ‘야뽁’, ‘브니엘’이라는 지명을 갖게 된 배경, 유대 민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배경, 환도뼈 힘줄을 먹지 않는 그들의 음식문화가 생기게 된 배경을 알려줍니다.

물론 전체 이야기의 배경에는 야곱의 ‘가족사’가 있습니다. 야곱이 ‘야뽁 나루’를 건너 다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기 20여 년 전, 그는 형 ‘에사오’가 받아야할 ‘상속권’을 ‘속임수’로 가로 챘습니다(창세 27:1~36). 그 일로 화가 난 에사오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야곱을 없애 버릴 생각을 했습니다(창세 27:41). 그런 속마음을 알게 된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자기고향 ‘하란’에 있는 ‘바딴아람’(아람의 평화라는 뜻)으로 피신시킵니다(창세 25:20; 27:42~45). 그곳에 있는 삼촌 집에서 20년을 지내며 ‘일가’(一家)를 일구었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먼 바다로 나간 ‘연어’가 강으로 돌아오듯이 드디어 야곱도 ‘귀향길’에 오릅니다(창세 31:20~32:3). 그가 돌아가야 할 진정한 집은 ‘이사악의 품’이 아니라 ‘하느님의 품’임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고향에는 돌아오는 그를 잡아먹을 것 같은 ‘괴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괴물이 형 에사오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진짜 괴물’은 ‘밖’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괴물이 ‘자기 안’에 자리하고 있는 ‘야곱 자신’임을 알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에돔 벌 세일 지방’에 사는 형 에사오에게 먼저 ‘종들’을 보냅니다(창세 32:4~6). ‘화해’를 청하러 가는 자신의 소식을 전하게 합니다. 그곳은 그가 출발한 ‘하란’에서 적어도 1,000km가 넘는 거리입니다. 따라서 귀향길이 몇 개월 전부터 준비한 여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돌아온 종들로부터 ‘최악의 상황’을 전해 듣습니다. 에사오가 4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온다는 말에 덜컥 ‘겁’이 났습니다(창세 32:7~8). 분명 에사오는 야곱을 환대하러 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만남’에 대비한 ‘계책’(計策)을 세웁니다. 일행과 가축을 두 패로 나누었습니다. 에사오가 한 패를 치면, 나머지 한패라도 피하게 해야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기도’를 바칩니다(창세 32:10~13).

저를 형 에사오의 손에서 건져주십시오. 에사오가 와서 어미들과 자식들까지 우리 모두를 죽여 버리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 창세 32:12

그의 기도는 ‘형에 손에서 살려 달라.’는 애원이었습니다. 기도 끝에 그가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찾아낸 술책은 ‘선물’(사실은 뇌물) 공세였습니다(창세 32:14~20). ‘선물들’을 보고 마음이 풀어진 다음 ‘만날’ 참이었습니다(창세 32:21). 정말 잔머리 대왕입니다. ‘선물들’을 앞서 보내고 그 날 밤을 ‘천막’에서 묵었습니다. 여기까지가 1독서 전체 이야기의 배경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바로 그 날 밤, 그는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데리고 야뽁 나루를 건넜다. – 창세 32:23

고대로부터 도시는 ‘강’을 끼고 형성되고, 도시 사이의 경계도 ‘강’이 기준이 됩니다. 또 ‘강을 건넜다’는 것은 신화적으로 한 인물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섰다’는 상징입니다. 후대에 그가 건넜던 강의 이름은 ‘야뽁’(קֹבַּֽי, Yabboq)이라 불립니다. 이 단어는 ‘먼지를 일으키다, 먼지를 뒤집어쓰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바크’(בקַאָ abaq)와 자음이 같습니다. 먼지를 일으키고 뒤집어 쓸 정도로 몸을 격렬하게 움직이는 경우는 어떤 때입니까? ‘씨름’을 하거나 ‘싸울 때’입니다. 따라서 그곳의 유래는 ‘어떤 격렬한 싸움’(씨름)과 관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단어의 히브리어 기원을 ‘바카크’(בקק ,baqaq)에서 찾습니다. ‘바카크’는 한동안 ‘안’에 숨기고 있던 어떤 것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와서’(토해져서) 속이 ‘비워지고’, ‘허사가 되고’, ‘완전히 무효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야뽁’(씨름하다)이라는 말에도 이런 의미가 녹아져 있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곳(후대에 ‘브니엘’이라고도 불리는)에서의 ‘씨름’(내면의 영적투쟁)을 통해 ‘야곱’이 평생토록 간직해 온 ‘옛 자아’가 폐기되고(토해지고, 비워지고, 회개하게 되고), ‘이스라엘’이라는 ‘새 존재’로 그의 속이 채워집니다.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남을 속이고, 빼앗으며 살아온 ‘야곱’이라는 ‘옛 자아’가 송두리째 ‘허물어지고 비워’집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새 존재’로 ‘거듭나는’ 체험을 합니다. 이런 대전환의 ‘영적싸움’이 일어났던 곳이기에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 ‘야뽁’입니다.

야곱은 일행과 함께 ‘나루’를 건넌 다음 ‘혼자’ 뒤떨어져 있습니다. 그 밤은 야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요르단 강 동쪽’(오늘날의 요르단 지역)에서 보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혼자 뒤떨어져 있었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자신’을 ‘직면’해야 하는 ‘절대고독’의 시간입니다. 아마도 그는 도망자였던 20년 전의 자신과 ‘베델’에서의 밤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더니 많은 물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을 쳐다보는 자신이 처량하기만 합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자신이 직면한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합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는 정말 끝까지 치사합니다. 아니 철저히 자기중심적입니 다. 혹시라도 앞서 간 가족들과 가축들이 형에게 몰살당하면 도망칠 속셈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속셈은 빗나가고 이제부터 바야흐로 ‘야뽁’(영적투쟁)이 일어날 차례입니다. ‘자신’이라는 ‘괴물’과 ‘직면’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이 야곱을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일행들로부터 그를 떼어놓으셔야 했습니다.

그 날 밤, 야곱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을 체험합니다. 에사오를 만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만남’이라는 사실이 곧 밝혀질 것입니다. 느닷없이 ‘어떤 분’이 나타나 ‘동이 트기까지’ 그와 ‘씨름’(야뽁)을 했습니다. 발현한 ‘어떤 분’(֙אישׁ ,ִish/사람 man)을 두고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천사’(호세 12:4), 성육신 이전의 ‘성자’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야곱이 원해서 시작된 ‘씨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분’(사람)이 야곱에게서 원하는 어떤 것이 있어서 시작한 ‘씨름’입니다.

‘동이 트기까지’ 먼지를 뒤집어쓰는 ‘씨름’(영적투쟁, 기도)이 진행됩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다는 ‘야곱의 욕망’, 그분과의 ‘씨름’에서 ‘물러서지 않으려는 야곱의 치열함’이 작동했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야곱의 ‘성정’(性情)을 생각해 볼 때, ‘씨름’에서 이기기 위해 온갖 ‘편법’을 동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계략’(計略)을 써서 자신의 ‘적수’를 구슬려내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대등한 씨름’처럼 보였습니다. ‘밤새도록 오래’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애초부터 대등할 수 없는 ‘씨름’(싸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그분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사용해서 쉽게 ‘씨름’(싸움)을 끝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이 트기까지’야곱과 씨름을 계속하신 이유는 그분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은 지금까지 해 온 방법으로는 “야곱을 이겨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 표현은 일종의 ‘과장법’입니다. 그만큼 ‘야곱이 이기려는 마음을 크게 갖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야곱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물론이려니와 그 때까지 살아오면서 ‘경쟁’(싸움)에서 이기려는 마음이 병적으로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열등감’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태어난 순서만 제외하고, 그는 모든 ‘경쟁’(싸움)에서 늘 이기는 수단과 방법(그것이 속임수라 하더라도)을 동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비상수단’을 사용합니다. 야곱의 ‘엉덩이뼈를 만지십니다.’ 그 ‘만짐’으로 야곱은 ‘환도뼈’를 다치고 생애 처음으로 깊은 ‘패배감’을 느낍니다. ‘엉덩이뼈’[허벅지 관절, ‘카프(כּף ,ַkaph/the socket)-야렉’(ָרך ,ֵyarek/thigh)]의 위치를 두고 논란이 있습니다. 저는 이 뼈의 위치가 ‘생명 탄생의 자리’와 관련 있기에 남성의 ‘생식기’에 대한 ‘완곡어법’이라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가령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똥’을 ‘매화’라고도 했듯이 말입니다. 사실 그곳은 ‘급소’ 중의 ‘급소’입니다.

또 《공동번역 성서》는 ‘엉덩이뼈를 쳤다’라고 번역하고 있기에 우리는 ‘강하게 때린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번역한 히브리어 ‘나가’(געַנ ,ָnaga)는 ‘손을 댔다’(to touch, reach, strike)는 정도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동이 트기까지’ 계속된 ‘지난한 씨름’이 결판납니다. 야곱은 ‘환도뼈’(엉덩이뼈)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다’(out of joint the socket of the hip)는 뜻입니다. 더 이상 그의 ‘옛 자아’에서 출발한 ‘수단과 방법들’은 그 분에게 통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야곱의 ‘옛 자아’를 ‘완전히 짓눌러’ 정복하셨습니다.

이렇게 ‘야뽁’은 야곱이 그분에게 ‘정복당한 곳’입니다. 동시에 ‘야뽁’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도달해야할 ‘기도의 자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정복하시는 ‘승리의 자리’입니다. 그 정복당함을 다른 말로 ‘회개’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의 씨름이야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누구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전전긍긍하는 ‘우리와 씨름’하시는 하느님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느님의 적수’라도 되는 냥 ‘기도’ 중에 ‘자기 뜻을 고집’하며 결코 물러설 기세를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마음을 만지시는’ 하느님의 그 부드러운 ‘손길’에 압도당합니다. 우리의 뜻을 내려놓고 회개하며, 정복당합니다. 신앙생활은 ‘내 뜻’, ‘내 방식’, ‘내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방식’, ‘하느님의 시간’을 구하고 실천하는 삶입니다.

야곱은 그제야 그분이 ‘신적 존재’임을 알아차립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 위에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보다 위대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정복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정복하셔야지 희망이 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정복당해야지(회개해야지) 거짓 마음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야곱에게 이제 ‘씨름이 끝났다’고 알려줍니다. “동이 밝아오니 이제 그만놓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울며 ‘복’을 애걸합니다(호세 12:3~5). 그분이 ‘신적 존재’임을 알았기에 “자기에게 ‘복’을 주지 않으면 놓아드릴 수 없다고 떼를 썼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을 받지 못할 바에는 여기서 죽겠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정복당했음을 알았지만, 다시 말해 죽기 직전까지 내몰렸음을 알았지만, 그 위대한 분에게 필사적으로 ‘복’을 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변화의 메시지’를 얻습니다. 그것은 그분과 씨름하고 난 뒤 ‘야곱’의 기도 제목이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그분과 씨름하기 전 야곱의 기도 제목은 ‘형의 손에서 목숨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창세 32:12). 그러나 ‘영적씨름’을 하고 난 뒤 그의 기도제목은 “자기에게 ‘복’을 빌어주지 않으면 놓아드릴 수 없다”로 바뀌었습니다(창세 32:27). 그가 ‘하느님의 복’(福)을 사모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내 뜻’, ‘내 방식’, ‘내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방식’, ‘하느님의 시간’을 좋아하는 삶으로 마침내 ‘그가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이야기가 ‘기도생활의 끈기’를 교훈하는 복음 이야기의 배경으로 배정된 이유를 발견합니다.

야곱은 도대체 어떤 ‘복’을 빌어달라는 것일까요? 그가 원하는 ‘복’을 ‘재물’로 생 각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가질 만큼 가졌습니다. 저는 그가 원했던 ‘복’이 ‘한 말씀 듣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모든 인생들은 ‘자신을 살리는 한 말씀 듣기’를 원합니다. ‘듣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 보다 먼저 ‘질문’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특히 어떤 질문은 다른 모든 질문들보다 무게를 갖습니다. 그것을 ‘궁극적 질문’이라 합니다. 가령,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그 ‘궁극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은 사람’은, 즉 ‘한 말씀’ 들은 사람(깨친 사람)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한 말씀’이란, 우리를 ‘신적 생명력’으로 부르시는 ‘초대’입니다. 사실 하느님만이 다른 무엇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에 대해 말씀’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하느님만이 가지도 오지도 않는 ‘영원한 현재’이십니다. 하느님만이 오늘 <시편 121편>처럼, 모든 피조물을 보호하시고 도와주시는 ‘생명의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에 대해 ‘누구’라고 말해야 하는지 그 ‘정체성’을 알기 위해 평생을 ‘씨름’해 왔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평생을 ‘씨름’해 왔습니다. 형 그림자에 가려진 ‘2인자’라는 운명이 아니라 자신이 가야할 더 높은 세계를 찾아 평생을 ‘씨름’해 왔습니다. 그분이라면 자신이 씨름해 온 평생의 그 ‘궁극적 질문들’에 대해 ‘한 말씀’ 들려 줄 것만 같았습니다. 그 복을 받는다면, 그 깨달음을 갖게 된다면, 지금 여기서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야곱의 이러한 변화에 감동한 그분은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 창세 32:28a

고대인들은 ‘이름’(שׁם ,ֵshem/name)에는 한 존재의 본질적 속성과 운명이 담겨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름’은 개인의 기질과 성격을 드러내며, 부모나 공동체의 기대 등을 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순간 ‘야곱’은 고민 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발뒤꿈치’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사기꾼, 거짓말쟁이, 얌체, 비열한 악당, 약탈자’이라는 뜻도 있습니다(창세 25:26; 27:36). 결코 ‘좋은 뜻’을 가진 이름이 아닙니다. 더욱이 자기 입으로 그런 이름을 밝힌다는 것은 그동안 자신이 형과 아버지와 장인을 속이며 살아온 인생임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는 무엇을 택합니까?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 – 창세 32:28b

평생 최초로 ‘진실’(정직)을 택합니다. 자신의 실존(實存), 즉 ‘어두운 진실’에 직면합니다. 자신이 ‘사기꾼’으로 인생길을 걸어왔음을 솔직히 털어놓고 ‘인정’합니다. 자기 이름과 존재에 대한 고백에는 그가 ‘빛’이신 하느님과 대면하여(하느님을 보고) 스스로의 어두운 진실을 직면한(본) 사람, 즉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속이는 자로 살아온 그의 과거를, 그런 자신의 추함을 더 이상 외면치 않고, 온전히 ‘인정’하고, ‘수용’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스스로의 ‘인간됨’을 솔직히 ‘인정’하고, ‘고백’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압니다.

그가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고백’하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자신과의 화해’가 일어납니다. 사실 우리는 남을 ‘속이기’에 앞서 항상 ‘먼저 자신을 속입니다.’(그럴 수밖에 없다고 합리화 합니다). 남에게 잘못을 저지르기에 앞서 항상 ‘먼저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릅니다. 따라서 ‘신적 생명력’으로 초대하시는 ‘한 말씀’을 ‘듣고’, ‘복 있는 새 삶’을 살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에게 용서’를 청하고, ‘자신과 화해’를 이루는 일이 가장 소중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대면하여 ‘자신의 어두운 진실’을 ‘본’ 사람은 더 이상 그 누구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렇게 말씀 합니다.

너는 하느님과 겨루어냈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긴 사람이다. 그러니 다시는 너를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여라. – 창세 32:29

놀랍습니다. 여기서 야곱이 누구와 씨름한 것인지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우선 그 분은 ‘하느님’입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는 사람과도 ‘겨루어 이긴’(경합하고 다스린)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처음에는 자신이 겨루어 이겨야할 사람이 ‘자기 밖’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 자궁에 있을 때부터 경쟁해온 ‘에사오’나 장인 ‘라반’과 그의 아들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동이 밝아올 무렵’ 그는 선명히 깨달았습니다. 그가 겨루어 이겨야할 사람은 자기 ‘밖’이 아니라 이미 ‘안’에 있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그 사람이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혀 온 괴물임을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어려서부터 ‘자기 안’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자신을 괴롭혀 온 그 ‘괴물’은 ‘야곱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생존전략처럼 만들어낸 ‘옛 자아’라는 부정적인 괴물에 평생 놀아났음을 마침내 발견했습니다. ‘동이 밝아 올 때까지’ 이어진 ‘깊은 기도’ 중에 이 발견을 인정했고, 이름에 대답함으로써 ‘야곱’으로 살아 온 자신을 마침내 보듬어 안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야곱과 ‘화해’하였습니다. 그러자 ‘새로운 차원의 삶’이 열립니다.

하느님은 ‘새 이름’을 그에게 지어주십니다.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입니다. ‘새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것은 ‘하느님과도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또한 ‘새 인간’이 탄생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느닷없이 하느님이 그 밤에 찾아오신 진짜 목적(의도)’입니다. ‘동이 트기까지 하느님이 야곱과 씨름을 끈질기게 계속하신 이유’입니다. 하느님이 야곱에게 주신 이름인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뜻하는 ‘엘’과 ‘계속해서 힘을 다해 싸우다, 다스리다’는 뜻의 ‘이스라’의 합성어로 ‘하느님이 다스리신다.’, ‘하느님이 싸우신다.’는 뜻입니다.

이제부터는 이것이 그의 ‘정체성’입니다. 그가 ‘거짓 마음’이 부리는 ‘속임수’에 다스림 받는 인생이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는 ‘겸손한 인생’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옛 자아’의 본성에 지배받는 인생이 아니라 ‘하느님이 빚어주시는 인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다스리시고(싸워주시는), 빚어주시는 인생이 되었으니 더 이상 에사오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계약의 주인공’이 되는 길로 나아갑니다. ‘생명 탄생의 자리’인 ‘생식기’를 다치는 ‘고통’을 입었지만, 야곱은 마치 ‘산모’처럼 끝까지 참아내며 자신을 ‘이스라엘’로 낳았습니다. 사실 모든 존재는 스스로에게 있어서 진정한 자신을 낳는 ‘어머니’입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자신에게 그 같은 ‘이름’을 지어주시는 분이 누구인지 알기 원해서 ‘이름’을 물었습니다. 고대에는 ‘신의 이름’을 알면 ‘주술’(呪術)처럼 그 이름을 불러 ‘신의 능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이름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대신 그분은 이루어야 할 ‘목적’을 ‘영적씨름’을 통해 ‘다 이루었기’에 야곱을 축복하며 떠나갑니다.

이처럼 1독서는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부터 ‘은총’으로 야곱을 ‘선택’하시고, ‘언제나’ 그를 ‘선대’해 오신 하느님을 증언합니다. 하느님은 이제 ‘가나안’으로 들어오려는 야곱과 ‘끈질기게 대면’하시어 마침내 그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스라엘’로 빚으십니다. 다시 말해 야곱은 ‘하느님’(자신)과의 ‘끈질긴 영적씨름’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선물 받습니다.

야곱은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낸 이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 불렀습니다. 브니엘은 ‘하느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빛이신 신의 얼굴’을 대면하고도 목숨을 건진 그의 내면은 온통 ‘빛’으로 가득했습니다. 비록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에사오를 만나기 위해 ‘브니엘’을 떠나고 있었지만 이미 그의 마음에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이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야곱을 ‘창조’하신 하느님, 이스라엘을 ‘빚어’ 가시는 하느님 덕택에 어느 새 그는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성스러운 마음의 소유자’로 우뚝 서 있었습니다(창세 33:24). 이렇게 ‘브니엘’에서 일어난 ‘끈질긴 영적씨름’은 ‘기도생활의 끈기’를 가르치신 복음이야기와 상응합니다.

《시편》은 ‘순례자의 찬미’인 <121편>입니다. ‘늘’(언제나, 항상) 보호하시고 도와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빛납니다. 구구절절이 창조주 하느님의 동행하심이 그림처럼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지는 정말로 아름다운 시입니다. <121편>을 윤색(潤色)하여 임성숙님이 가사를 쓰고, 서울대성당 음악 감독인 이건용 교우가 작곡한 <성가> 243장은 성공회 신자들이 애창하는 찬미입니다.

어느 날 시인은 지구상에서 가장 거룩한 곳, 영혼의 고향이라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떠났습니다. 관광이 아닌 모든 순례가 그렇듯이 인생에서 들어야할 ‘한 말씀’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따가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사막과 강도들이 위협이 있는 골짜기를 지납니다. 낮과 밤의 교차 속에 드디어 저 멀리 목적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자신의 고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루살렘 성전이 위치한 ‘성전산’(시온산)의 ‘위용’(威容)과 ‘배경’이 되는 하늘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집니다. 특히 그 성전산의 ‘견고함’과 ‘든든함’은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견고한 곳에 세우시고, 그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지키시며 도와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그들 역사에서 야곱, 즉 ‘이스라엘’에게 주신 축복대로 ‘한없는 은총’을 당신의 백성에게 ‘늘’(항상) 베풀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성전산’이 견고히 서 있는 그 땅을 그들이 차지한 것은, 그들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느님의 선택과 은총’ 덕택입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의 신실하심’(끈질김) 덕택입니다.

그런 생각을 길어 올리자 지쳤던 몸에 갑자기 생기가 돕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후예인 자신에게도 ‘늘’(항상) 그와 같은 ‘선택과 은총’으로 동행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의 순례 길도 목자가 되시어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에게 구름기둥을 보내시어 광야의 태양으로부터 보호해 주신 것처럼, 차가운 달빛의 미신적인 두려움에서 불기둥으로 보호하신 것처럼, 자신과 ‘늘’(항상) 동행해 주셨습니다. 낮의 해도, 밤의 달도 자신을 해치지 못하게 ‘늘’(항상) 보호하셨고, 어떤 재난도 그를 덮치지 못하도록 ‘늘’(항상) 지켜주셨습니다. 그의 피가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찬미가 저절로 나옵니다.

시인은 성전 경내에 들어가 경신례를 바칩니다. 가까이서 보니 성전을 둘러싼 그 성전산의 ‘견고함’과 ‘든든함’이 더욱 피부로 와 닿습니다. 덧없는 인간 생명과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성전산’이 그럴 수 있다면 그 산의 기초를 놓으신 하느님의 견고함과 든든함은 참으로 영원할 것입니다. 어느덧 그는 1독서의 야곱처럼, 피조물 속에서 창조주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영성가’로 거듭났습니다. 하느님은 인생들이 진정으로 의지할 견고한 분이시며, ‘은총’ 속에서 ‘이스라엘’로 선택한 이들을 ‘지금부터 영원히’ 지켜주시는 든든한 분이심이 믿어집니다.

경신례를 마칠 무렵 그는 드디어 순례길 동안 ‘끈질기게’ 바쳐왔던 기도의 응답, 즉 ‘한 말씀’을 받습니다. 자신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어디에 있든지 ‘늘’(항상) 하느님의 보호와 도우심 속에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응답입니다. 이것이 “나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궁극적 질문’과 함께 순례 여정에 올랐던 그가 깨우친 ‘응답’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성지순례는 그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하는 깨달음으로 이끌었습니다. 이 마음, 이 믿음으로 그가 살아가는 어디든 하느님이 ‘늘’(항상) 동행하시고 현존하시는 ‘성지’임을 이제는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가 발견한 이 ‘정체성’은 예수를 그리스도 영접한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 계약의 완성자’이시며,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참 성전’이십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 우리는 영적인 ‘새 이스라엘’이 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느님, 즉 ‘임마누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순례자인 그가 응답받은 ‘한 말씀’은 성령을 모신 ‘성전’이자 영적인 ‘새 이스라엘’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늘’(항상) 보호하시고 도와주시는 하느님께 감사 찬미를 바칩시다.

2독서《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입니다. 바울로에게서 배운 진리, 즉 ‘부활의 신앙’을 굳게 지켜나가라는 권고입니다. 고난을 견디어 내며 ‘하느님의 말씀’, 즉 ‘복음의 심오한 진리’를 가르치고 전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사명을 완수하라는 권고입니다. 연중시기에 낭독하는 2독서는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와의 연결이 느슨합니다. 그렇지만 다음의 말씀은 ‘끈질긴 영적씨름’과 ‘늘’(항상)이라는 태도를 핵심 주제어로 하는 다른 <전례독서>들과의 연결이 빛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하시오. … 고난을 견디어내며 복음 전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그대의 사명을 완수하시오. – 2디모 4:2,5

사도 바울로는 먼저 자신을 ‘복음전파의 모범’으로 디모테오에게 ‘겸손히’ 제시합니다(14절). 자신이 ‘복음 전파’를 위해 얼마나 ‘충성’했는지는 영적 아들인 디모테오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워 ‘신앙의 전통’에 접촉해 있는 디모테오에게 바울로는 《성경》이 증언하는 ‘복음의 심오한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바울로는 그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했고, 교회의 봉사자로 안수하여 사목을 맡겼습니다. 바울로는 디모테오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후견인’이었습니다.

우리도 ‘교회’가 물려준 ‘전통’을 유산으로 간직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사도들과 그 후예들인 복음전도자들이 물려 준 ‘전통’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성경》은 직접적으로는 ‘70인역 구약’(셉투아진트)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성경》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증언하는 ‘구원의 책’이고, 인생들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 ‘생명의 책’인지를 디모테오에게 분명히 밝힙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 이 책으로 하느님의 일꾼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 2디모 3:15~17

디모테오는 《성경》에 대한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부활 신앙’을 ‘계속해서 끈기있게’, ‘항상’ 잘 지켜 나가야 합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로는 아들 디모테오에게 ‘사명을 완수’하라고 엄숙히 명령하고 당부합니다. 그 사명은 하느님의 말씀’, 즉 ‘복음의 심오한 진리’를 ‘꾸준히 전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바울로가 보기에 이 세상은 ‘참된 말씀’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의 말씀’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복음의 심오한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쳐 왔지만 ‘늘’(항상) 좋은 열매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언젠가는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듣기 싫어 할 때가 올 것이게 더욱 열심히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2디모 4:3a). 심지어 교회 안에도 자기네 귀를 만족시키기 위해 마음에 맞는 교사들, 즉 이단을 끌어들이는 이들이 생겨날 것입니다(2디모 4:3b). 진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며낸 이야기에 마음을 팔며 신앙을 저버리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2디모 4:4).

그러나 디모테오를 비롯한 ‘복음 전도자들’은 그런 일로 결코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수록 더욱 사도들의 가르침을 새기고 《성경》이 증언하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전파해야 합니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 즉 ‘복음의 심오한 진리’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그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디모테오에게 당부합니다. 이러한 당부는 오늘의 우리에게서도 성취되어야 합니다.

복음이야기 《루가복음》에서 배정했습니다.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뜻으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언제나”로 번역한 단어는 ‘늘’(항상), ‘반드시’, ‘마땅히’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용기를 잃지 말라”로 번역한 문장은 ‘낙심하지(지치지, 마음을 잃지) 말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기도생활의 끈기’를 가르치신 비유입니다. 이를 위해 ‘고약한’(불의한) 재판관을 ‘늘’(항상) 찾아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올바른 판결’을 요청하는 ‘과부’를 예로 드십니다. 그 과부의 ‘끈기’, ‘집요함’, ‘물고 늘어짐’은 마침내 ‘재판관’으로부터 ‘대가’를 얻습니다. 예수님은 비유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 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두실 것 같으냐?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 루가 18:6b~8a

어떤 이들은 이 비유를 가지고 ‘기도 응답’에 적용합니다. 우리의 ‘소원’을 위해 과부처럼 ‘밤낮으로 끈질기게’ 부르짖으면 하느님께서 다 들어주신다고 말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잘못된 적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밤낮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신다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올바른 판결’(공의, 정의)을 내려주시는 하느님을 더 강조하여 소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공의’(정의)를 바라는 사람들의 ‘끈질긴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결코 지체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공의’를 세우는 일 뿐 아니라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기를 좋아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입니다. 과부의 인격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처럼 자녀들의 애간장을 태우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편이 되어 주시는 자비하신 아버지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올바른 판결’(공의, 정의)을 호소하면서도 종종 ‘인내심’도 없고, 야곱만큼의 ‘끈기’도 없습니다. 우리는 ‘참고, 기다리기’보다 ‘그 즉시 일의 결과’를 얻기 원합니다. 우리의 이러한 ‘조급함’은 시대상과도 닮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참고, 견디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패스트푸드’는 이제 옛말이고, 택배도 ‘로켓배송’이 등장했을 정도입니다. 정보 처리 속도가 지금보다 빠르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컴퓨터나 스마트폰은 선전해 댑니다.

예수님은 ‘기도생활’에 진정으로 ‘필수적인 일 두 가지’를 격려하십니다. 하나는“언제나 기도하는 일”입니다. 먼저 ‘언제나 기도하라’는 말씀은 사도 바울로가 가르친 ‘늘 기도하라’는 말씀과 같습니다(1데살 5:17). ‘언제나’는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기도 자세를 취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기도의 정신’으로 데려갑니다. 우리가 가야할 ‘기도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입니다(마태 6:33). 우리의 기도는 이 ‘정신’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용기를 잃지 않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기도하다 용기를 잃는 경우도 많다”는 점을 전제합니다. 다시 말해 기도는 ‘열성적인 노력이 필요한 힘든 일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로도 다른 이들을 위해 “언제나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인 에바프라”를 소개했습니다(1골로 4:12). 바울로가 그를 기도하는 사람으로 특별히 소개한 이유는 ‘기도가 그만큼 열성적인 노력이 필요한 힘든 일’임을 인정한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기도를 시작했다가, 쉽게 낙심하고, 쉽게 그만 두어버립니다. 더욱이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하기를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기도는 ‘최우선 순위’를 갖기보다 마지막에 가서나 두 손을 모으는 ‘후순위의 일’인 경우도 많습니다. 이럴 때 가장 좋아하는 존재는 ‘악마’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기도하며’, ‘사셨다’고 전합니다. 지금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히브 7:25).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기도할 뿐 아니라 기도하는 일에 용기를 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예가 ‘가나안 여인’(시로페니키아 여인)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으로부터 ‘강아지’라는 인격적인 모독을 당하면서도 ‘기도’하기를 결코 그치지 않은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딸과 자신을 구원하였습니다(마태 15:21~28; 마르 7:24~30). 1독서의 야곱도 환도뼈를 다쳐 절뚝거리기까지 ‘기도의 샅바’를 놓지 않아서 결국 위대한 신앙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수적인 일 두 가지는 ‘기도와 믿음’입니다. 그것을 알아들으라고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대로 ‘언제나(늘, 항상, 반드시) 기도의 정신’으로, 또 ‘용기를 갖고 기도’할 수 있다면 ‘하느님이 진정 원하시는 일’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조급하게 우리의 시간표대로 해 달라고 조르지 않고, ‘하느님의 시간표’를 고요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게다가 ‘하느님의 시간표’대로 일이 진행될 수 있도록 ‘오늘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차례로’ 해 나갈 수 있습니다. 낙심하지 않고, ‘용기’를 간직한 채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이 해야 할 ‘오늘의 일들’은 소홀히 한 채 하느님께 ‘상황 보고’를 드리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자신이 해야 할 ‘오늘의 일들’은 찾지 않은 채 모든 일은 하느님이 알아서 하시라는 투로 ‘졸라대기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시간표는 또 늦추어집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바라고, 아버지께서 올바르게 여기시는 일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자신은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과는 상관도 없는 엉뚱한 행보를 보이기도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느님은 당신이 하셔야 할 일을 우리가 상기시켜 드려야 할 만큼 건망증이 심하신 분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건망증이 심한 것은 우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하셔야 할 일을 ‘끈기 있게’ 상기시켜드리면서도 정작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곧잘 ‘잊어’버립니다. 기도하면서도 정작 ‘끈기’는 없습니다. ‘오늘’은 의욕적으로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써 가며 기도를 ‘시작’하고 있지만, 얼마 못 가서 응답이 없다며 ‘낙심’합니다. ‘응답’이 지연될 때는 하느님을 불의한(고약한) 재판관으로 여겨 성가시게 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지연’된다고 하느님을 성가시게 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가 ‘지연되는 시간’은 하느님을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시간’입니다. 그 ‘지연의 시간’은 우리 내면에 하느님의 마음을 건축하는 시간입니다. 욕심과 어리석음과 분노로 갈라터진 우리 마음 밭에 하느님 사랑의 물길이 흘러들어오는 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말’이 얼마나 ‘거룩’하고, ‘표현’이 얼마나 품격 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도는 자신이 소원하는 있는 일들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브니엘’에서 하느님과 ‘기도의 샅바’를 잡았던 야곱은 자기중심적인 기도제목에서 자신을 찾아오신 하느님 중심으로 기도제목이 바뀌었습니다. 더욱이 ‘기도’는 입술보다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하느님과 이웃과의 연대’입니다.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께서 올바르게 여기시는 일’에 ‘행동으로 연대’하고, ‘이웃사랑’에 자신을 ‘행동으로 연대’하는 일이 ‘기도’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도”할 수 있고, 즉각적인 응답이 없더라도 “항상 용기를 간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결코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분명 불의한 재판관은 불공정했고, 과부의 순수한 외침이 아니라 자신의 이득을 위해 응답했습니다. 그는 과부에 대해 인격적인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반면에 우리 하느님은 ‘공정’하시고, 당신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 지체 없이 기도를 들어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하느님은 순례자 시편의 노래처럼, ‘새 이스라엘’로 불러주신 우리를 ‘보살피시고 도와주시는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런 ‘믿음’으로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간직할 수 있겠습니까?”,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내며 복음 전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자신에 대해 ‘누구’라고 말해야 하는지 그 ‘정체성’을 알기 위해 평생을 ‘씨름’한 야곱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평생을 ‘씨름’해 왔습니다. ‘2인자’라는 운명이 아니라 자신이 가야 할 더 높은 세계를 찾아 평생을 ‘씨름’해 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미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부터 ‘은총’으로 그를 ‘선택’하시고, ‘언제나’ 그를 ‘선대’해 오셨습니다. 이제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려는 그와 하느님은 ‘끈질기게 대면’하시어 마침내 그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스라엘’로 빚으십니다. 야곱은 ‘하느님’(자신)과의 ‘끈질긴 영적씨름’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선물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한량없는 ‘은총’으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하느님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이스라엘’로 삼아주셨습니다. 자녀인 우리를 ‘늘’(언제나, 항상) 보호하시고, 도와주시며, 동행하시는 ‘임마누엘’입니다. ‘복음의 심오한 진리’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거룩한 사명’이 우리에게서 성취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라”고 우리를 격려해 주십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기도의 소원’이 있습니까?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소중하고 꾸준히 기도하는 것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정신’과 ‘믿음’을 새기십시오. 하느님은 우리가 입을 벌리기도 전에, 우리의 소원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속히 당신의 마음을 바꾸시도록 졸라대는 떼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지성(知性), 감정(感情), 의지(意志)를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에 맞추는 ‘연대’(連帶)입니다. 참으로 기도는 ‘입술’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지는 하느님과 이웃과의 ‘연대’(連帶)입니다. 그렇게 ‘연대’(連帶)하는 만큼 우리는 ‘언제나 기도’할 수 있고, 즉각적인 응답이 없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항상 용기를 간직’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기도합시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사람으로 살게 하는 길’입니다. ‘아버지의 시간표’를 신뢰합시다. ‘기도의 정신’, 즉 ‘연대’(連帶) 속에서 바치는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이루어집니다. 오늘 자신이 해야 할 하느님과 이웃 사랑의 ‘연대’(連帶)를 용기 있게 수행합시다. ‘야곱’이었던 우리를 ‘선택’하시고, ‘은총’ 속에서 ‘새 이스라엘’로 빚어 가시는 하느님께 찬미를 바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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