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3. 연중28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28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항상 먼저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섬겨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성경》은 받기를 좋아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고단한 인생들에게 ‘먼저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먼저 사랑으로 섬겨주시는’ 하느님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항상 더 많은 것을 ‘먼저 풍성하게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을 증언합니다. 이 성찬례에서 우리의 마음이 열려 이 진실을 온전히 깨달은 지혜자가 되어 마땅한 찬미와 감사를 하느님께 바치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주 하느님, 주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께서 베푸시는 모든 일에 감사하며, 언제나 주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열왕하 5:1-15
  • 시편 – 111
  • 2독서 – 2디모 2:8-15
  • 복음서 – 루가 17:11-19

연중 28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항상 먼저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섬겨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1독서는 나병이 치료된 ‘나아만’ 장군 이야기를 전하는 《열왕기하》입니다. ‘나아만’은 시리아 왕의 총애를 받던 ‘군사령관’이었습니다. 그는 수행하는 모든 전투에서 승리할 정도로 탁월한 지략가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나병’(심한 피부병)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나병’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언제 그 병이 자신을 집어 삼킬지 알 수 없는 절망적인 처지였습니다. 다행이 지금은 병의 진행이 멈추었지만 언제 진행되어 나갈지 두렵기만 했습니다. 이 같은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이 ‘군사령관’이라는 영예도 재물도 덧없게 느껴졌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이스라엘에 쳐들어갔다가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아 아내의 하녀로 삼았습니다. 그 소녀로부터 ‘사마리아’에 있는 예언자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예언자는 나병쯤은 쉽게 고쳐줄 수 있다”는 깜짝 놀랄만한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정보’를 듣자 갑자기 ‘나아만’의 가슴에 삶의 의욕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습니다. 적국의 포로로 끌려온 어린 소녀에 불과했지만, 그 소녀는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조차도 그런 ‘믿음’을 갖지 못했지만 소녀는 엘리사가 ‘하느님의 예언자’라는 정확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엘리사를 사용하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경외’하는 ‘지혜’에서 나왔습니다.

‘나아만’이 사정 이야기를 하자 시리아 왕은 ‘이스라엘 왕’(여호람, BC 849~842) 앞으로 많은 선물과 함께 ‘친서’를 써서 보내 주었습니다. 그 ‘친서’를 본 이스라엘 왕은 자기 옷을 찢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신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달라고 하니, 이것은 그가 나에게 싸움을 걸려고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 분명하다. 그대들은 이 점을 분명히 살피시오. – 열왕하 5:7

이스라엘 왕은 그 친서가 전쟁을 거는 수작이라며 깊은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전혀 ‘지혜’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사람을 보내어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도록 요청합니다.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그에게 알려주겠다.”고 전하게 합니다(8절). ‘나아만’이 집 앞에 도착하자 엘리사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에게 전합니다. 그 말씀은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시오. 그리하면 새 살이 나서 깨끗하게 될 것이오.”였습니다.(10절). 나아만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 화가 치밀어 발길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막아서는 부하들 덕택에 그는 예언자 엘리사가 전해준 ‘하느님의 말씀’대로 따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새 살이 돋아 그의 몸은 마치 어린아이 몸처럼 깨끗해졌습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엘리사’가 ‘하느님의 참 예언자’임이 드러났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나아만을 끔찍한 병으로부터 치료해 주었고, 그의 생명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엘리사에게 돌아와 이렇게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밖에는 온 세상에 신이 없습니다. 소인이 감사하여 드리는 이 선물을 부디 받아주십시오. – 열왕하 5:15

이것이 예언자 엘리사가 적국의 군사령관이 왔는데도 나가지 않고 단지 ‘하느님의 말씀’만 전달한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나아만도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 고백을 통해 ‘지혜자’로 거듭났습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혜를 소유하는 일이야말로 나병이 치유되는 일보다 더 소중합니다.

예수님은 나아만의 치유가 ‘이방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말씀하십니다(루가 4:27). 흔히 교회에서는 ‘복종의 미덕’에 관해 가르칠 때 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물론 그 ‘복종의 대상’은 성직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성직자는 다만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병’이 치료된 나아만 장군 이야기는 나병환자 열사람의 치유이야기가 등장하는 복음서의 배경 역할을 합니다. 1독서와 복음서 둘 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며, 감사를 바친 지혜의 사람이 유다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라는 점이 돋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아직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려는 온전한 진리는 아닙니다.

1독서 《열왕기하》의 이어지는 부분을 읽어보면(열왕하 5:16~27), 엘리사는 나아만이 바치는 ‘감사의 선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받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오해를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은 받기를 좋아하시기에 우리가 무엇을 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찬미와 감사와 존귀와 영광을 드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하느님은 받기를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라 ‘먼저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항상 더 많은 것을 ‘먼저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인간이 ‘신’(神)을 향해 ‘바치는 정성’을 강조할지 몰라도 그리스도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으로부터 찬미와 감사를 요청하는 하느님을 증언하기보다는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도 아낌없이 ‘내어 주시고’, ‘구원이 필요한 우리를 종처럼 섬겨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증언”합니다(로마 8:32, 마르 10:45). 이것이 진실입니다. 이것까지 꿰뚫을 때 진정한 ‘지혜자’입니다.

《시편》은 하느님이 인간들을 위하여 ‘먼저 행하신(베푸신, 섬겨주신)’ 위대한 일들을 찬미하는 <111편>입니다. 흔히 ‘지혜시’라고 불립니다. ‘할렐루야’(하느님을 찬미하라)로 시작된 다음부터 각 절의 첫 머리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릅니다. 크게 두 단락으로 나뉩니다.

전반부(1~3절)는 하느님이 먼저 행하신(베푸신, 섬겨주신) 위대한 일들을 ‘공적 예배’에서 회고하면서 자신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자는 초대입니다. 시인은 홀로 있을 때만이 아니라 ‘공적 예배’의 자리에서 ‘마음을 다 쏟아’ 하느님이 ‘먼저 베푸신(행하신, 섬겨주신) 은총’에 ‘감사’드릴 것임을 선포합니다(1절). 이 선포는 우리를 ‘공적 예배의 자리로 부르는’ 초대입니다. 자신처럼 하느님이 먼저 베푸신 풍성한 은총에 ‘온 마음으로 감사하자’는 초대입니다. 우리도 공적 예배인 성찬례를 바치러 왔습니다. 이 성찬례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행하신(베푸신, 섬겨주신)’ 위대한 구원의 일을 기념합니다. 다른 이들이 하느님께 감사(찬미, 사랑)드리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하느님께서 베푸신 그 은총(사랑)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먼저’ 하느님께서 베푸신 그 크신 은덕에 ‘마음을 다 쏟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시인은 하느님이 ‘먼저 행하신(베푸신, 섬겨주신)’ 일들이 위대하고, 영광과 위엄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의로우심이 영원하다고 찬미합니다(2~3절).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찬미 받기에 합당하시듯, 하느님이 인생들을 위해 ‘먼저 행하신(베푸신, 섬겨주신)’ 위대한 일들 역시 찬미를 받아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창조 세계를 ‘숙고하는’(알고 싶어 하는) 과학자와 예술가들에게는 참된 지식과 아름다움의 문이 열리고, 그들 앞에 펼쳐진 창조세계를 통해 구원의 신비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2절).

후반부(4~10절)는 하느님이 그들 역사에서 ‘먼저 행하신(베푸신, 섬겨주신)’ 위대한 일들에 대한 묘사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먼저 행하신(베푸신, 섬겨주신)’ 놀라운 일들을 ‘축제일’(과월절, 맥추절, 추수절)에 드리는 ‘공적 예배’를 통해 ‘기념’하게 하십니다. ‘공적 예배’를 통해 하느님이 얼마나 ‘자비롭고 인자하신 분’인가를 ‘기억’하게 하십니다(4절). ‘공적 예배’를 통해 하느님이 인생들에게 ‘먼저 행하신(베푸신, 섬겨주신)’ 그 놀라운 일들은 다시금 ‘생생한 현재’가 됩니다. 성찬례가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념함으로써 ‘자비롭고 인자하신’ 하느님의 구원사건은 지금 이 자리에서 생생한 현재가 됩니다.

시인은 하느님이 행하신 일들 속에서 ‘자비와 인자’가 드러난 구체적인 사건들을 언급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계약’(창세 12장의 아브라함과 그 자손과 맺은 계약, 출애 24장의 시나이산 계약)을 기억하시고 광야 생활 중에 이스라엘을 먹이십니다(5절). 오늘날도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계약’을 영원히 기억하십니다. 그 양식이란 무엇입니까? 영원한 하늘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성찬례에서 주님이 주시는 살과 피를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먹습니다. 하느님이 영원히 기억하시는 그 ‘계약’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로 맺으신 ‘새 계약’, 즉 ‘사랑의 계약’입니다.

시인은 하느님께서 ‘가나안땅’을 그들에게 유산으로 주시어 당신이 행하시는 일의 ‘능력’을 보여주신다고 찬미합니다(6절).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들에게 ‘영원한 하느님 나라’인 ‘새 하늘과 새 땅’을 허락하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먼저 손수 하시는 일들’은 정의와 진리입니다(7절a). 이렇게 하느님이 ‘먼저 행하신(베푸신, 섬겨주신)’ 위대한 일들은 하느님의 ‘신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이 주신 그 모든 법은 진실하고(7절b), 영원히 흔들리지 않도록 진리와 정직으로 제정되었습니다(8절). 따라서 이처럼 ‘훌륭한 법’을 따라 사는 이들에게 ‘보상’은 영원히 ‘보장’됩니다(시편 1:2-3,6).

시인은 하느님께서 ‘몸값’(속전)을 내어 그들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히 지킬 ‘계약’을 명령하신다고 찬미합니다(9절a). 하느님의 ‘먼저 행하신(베푸신, 섬겨주신)’ 가장 위대한 일은 당신의 백성을 죄악과 억압으로부터 구원(해방)하시고, ‘계약’에 기반 해 구원사건을 행하신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계약의 하느님’입니다. 이렇게 당신이 세우신 ‘계약’에 끝까지 ‘충실’하신 ‘하느님의 이름’은 두렵고도 거룩합니다(9절b). 사람들은 이름 앞에 ‘직함’을 붙이길 좋아하고, ‘명예’(名譽)를 추구하지만 그 어떤 인간의 이름도 결코 ‘거룩하지’ 않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십니다(마태 6:9).

결론으로 시인은 하느님이 ‘먼저 행하신(베푸신, 섬겨주신)’ 이러한 위대한 업적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지 찬미합니다.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요, 그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친 사람이다. – 시편 111:10

그의 결론은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의 근본’ 개념을 가르칩니다(욥기 28:28; 잠언 1:7; 9:10; 전도 12:13).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창조주를 향한 피조물의 올바른 태도는 ‘경외’입니다. 이 시작점이 우리에게 바로 설정되어야 비로소 ‘지혜’는 자라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지혜’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정보’와 ‘쾌락’을 누리는 일에 더 관심합니다. 상급 ‘교육’을 받고, ‘지식’을 쌓는 일에 더 관심합니다. 지혜를 추구하는 일은 우리 시대에 결코 대중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지혜시’가 <전례독서>로 배정되었을까요? 그것은 1독서의 응답이자 복음서의 길잡이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야기에서 밝히겠지만 1독서의 어린 소녀와 나아만처럼,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를 표현한 ‘사마리아 사람’도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어린 소녀는 엘리사가 ‘하느님의 예언자’라는 정확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엘리사를 사용하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경외’하는 ‘지혜’에서 나왔습니다. 나아만은 처음에는 나병을 나을 수 있다는 ‘정보’에 이끌렸지만, 나중에는 “이스라엘 밖에는 온 세상에 신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함으로써 하느님을 경외하는 ‘지혜자’로 거듭났습니다. 복음이야기의 사마리아 사람도 예수께 돌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지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몸의 치유를 통해 깨달아보니 ‘예수님’은 ‘하느님’이셨습니다. 아홉 사람은 사제에게 감사예물을 바쳐 공동체로 회복되는 ‘옛 율법의 세계’로 돌아갔지만, 그는 ‘나아만’처럼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고 지혜자임을 증명했습니다. 물론 그 하느님은 인간으로부터 감사와 섬김을 받으려 하시기보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항상 먼저 섬겨주시고 풍성히 은총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2독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권고하는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입니다. 연중시기에 낭독하는 2독서는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와의 연결이 느슨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진실하지 못해도 그분은 언제나 진실하시니 약속을 어길 줄 모르시는 분이시다”(13절)라는 말씀은 ‘항상 먼저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섬겨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증언하는 다른 <전례독서들>과의 연결이 빛납니다.

먼저 사도 바울로는 자신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증언합니다(8절). 그가 전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이 복음을 전파하다 그는 ‘고난’을 당하고 죄인처럼 ‘투옥’되었습니다(9절). 이 편지를 쓸 때도 그는 ‘투옥’ 중이었습니다(2디모 1:8). 고난과 투옥, 복음 전파의 결과치고는 너무나 가혹합니다. 하지만 바울로는 어째서 자신이 그런 복음 전파의 결과를 참고 견디는지를 밝힙니다(10절). 그것은 “하느님께서 뽑으신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과 영원한 영광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난을 당하고, 옥에 갇힌 것조차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2디모 1:12).

사실 복음을 전파하다 보면 예수께서 겪으신 운명, 즉 고난과 죽음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마르 8:34~38). 그러나 고난과 죽음이 전부는 아닙니다. 복음이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다 고난을 겪는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일입니다(로마 8:17b; 2고린 1:5~7; 갈라 2:19b~20; 필립 3:8~11). 그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이들은 죽더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이고, 종국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이러한 고백이 바울로뿐 아니라 박해시절을 살던 초대교회 신자들의 공통의 고백이라고 곳곳에서 전합니다(2고린 1:5~7). 그래서 바울로는 초대교회가 세례 때 사용한 믿을만한 말씀인 ‘교리문’을 통해 자신이 전한 ‘복음의 진리’를 다시금 강조합니다(11~13절). 이 교리문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이들이 누리는 ‘부활의 믿음’을 간단하지만 아주 효과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의 신비’를 바울로가 깨닫고 보니 복음을 전파하다 투옥 중인 일이 자신에게는 오히려 영원한 기쁨의 원천입니다(2디모 2:12; 골로 1:24). 그 어떤 것도 그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고난’을 겪는다는 사실도(2디모 2:9), ‘죄수’라는 사실도(2디모 1:8; 2:9), 동료들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도(2디모 1:15) 그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반대나 박해, 심지어 ‘죽음’마저도 그를 막아설 수 없습니다(2고린 4:7~11).

분명 바울로가 그 모든 고난들을 참고 견디게 하는 유일한 힘은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2고린 4:15). 이것이 바울로뿐 아니라 모든 사도들이 서 있는 ‘믿음의 토대’였고, 박해시절을 살던 그리스도인들이 간직한 위대한 ‘구원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야말로 구세주이시고, 그리스도이시며, 죽음의 권세를 없애고, 불멸의 생명을 드러내 보이신 ‘부활의 주님’이시라는 ‘한 믿음 위에’ 서 있었습니다(2디모 1:10).

끝으로 사도 바울로는 가장 중요한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계속해서 그 일에 집중하라고 아들 디모테오에게 권고합니다. 가장 중요한 일이란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입니다(15절). “아무런 이익도 없고 듣는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말을 가지고 논쟁”을 벌일 일이 아닙니다(14절). 그 논쟁이란 바울로가 전한 복음의 반대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두고 시비를 거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바울로는 인간의 ‘말재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것이 아님을 경고한 바 있습니다(1고린 1:17). 그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복음은 하느님을 잘 믿는다는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린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1고린 1:23). 그리스도께서 ‘몸을 가지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은 지혜를 찾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인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1고린 1:18,22~23). 그러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몸을 가지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메시아’이시고,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1고린 1:24). 디모테오는 가장 중요한 일인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더욱이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이 사명에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이고 집중함으로써 하느님께 인정받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15절). 이러한 권고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신 이야기인 《루가복음》에서 배정했습니다. 열 사람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치유’(구원)되었지만,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한 사람이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를 받던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점은 충격적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향해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구원을 선물하십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그 한 사람의 ‘믿음’과 특히, 그의 믿음에서 우러나온 ‘감사’가 돋보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주제를 ‘은총에 대해 감사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라고 곧바로 연결할 분들도 있습니다. 더욱이 지난 주 복음이야기가 주인은 ‘명령’하고, 종은 ‘수행’할 뿐이라는 ‘종의 의무’였기에(루가 17:7~10) 본문에 나오는 ‘감사’란 단어는 더욱 돋보입니다. 그러나 전례독서들과의 관계를 묵상해 볼 때, 더 중요한 주제가 그 바탕에 흐르고 있음을 우리는 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늘은 그런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루가는 본문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 루가 17:11

예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입니다. 갑자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하늘에 오르실 날’(십자가 수난과 부활)이 가까워지시자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에 정하셨습니다(루가 9:51). 한 차례 사마리아 사람들로부터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당하신 바 있으신(루가 9:52~53) 예수님 일행은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경계)를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갈릴래아는 예수의 사명이 시작된 곳이고 예루살렘은 그 사명의 목적지이며, 사마리아는 그 두 땅의 ‘사이’에 위치하는 지역입니다. 문지방은 바깥도 아니고 안쪽도 아닌 ‘사이’(경계)입니다. 예수께서 그 ‘사이’를 지나가신다는 표현은 예수님을 ‘경계’에 서신 분으로 전하려는 의도일까요? 사실 예수님은 사이에 서신 분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시요, ‘참 인간’이자 ‘참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그 사이가 갖는 상징은 무엇일까요?

우선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갈릴래아’(GALILEE)는 어떤 땅이었습니까? 지리적으로 ‘갈릴래아’는 ‘비옥한 곡창지대’였습니다. 주변국들은 이 땅을 호시탐탐 노렸습니다. 기원전 10세기 솔로몬 왕의 사후, 통일왕정이던 이스라엘은 10개 지파 연합의 ‘북왕국 이스라엘’과 유다 지파 중심의 ‘남왕국 유다’로 갈라졌습니다. 기원전 8세기 중후반,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 불리는 고대근동의 패권은 ‘아시리아 제국’이 쥐고 있었습니다. 아시리아의 ‘살마네셀 5세’는 서진(西進) 정책을 펼쳐서 기원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시킵니다(열왕하 17:1~6). 이때부터 ‘갈릴래아’는 남왕국 유다로부터 더욱 고립되고 소외됩니다. 점령군들은 ‘사마리아 지역’에 여러 민족을 이주시키는 ‘혼혈정책’을 폈고(열왕하 17:24~41), 그 여파는 사마리지역 위쪽에 있는 ‘갈릴래아’에까지 미쳤습니다. 이로 인해 남왕국 유다 사람들로부터 ‘이방인의 갈릴래아’라 낙인찍힙니다. 그 땅에 살던 백성들은 고아처럼 버려져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살려가는 일뿐 아니라 다른 민족의 문화와도 싸워야하는 ‘한(恨)’ 많은 지역으로 변합니다.

남왕국 유다마저 바빌론제국에 망하고, 그리스제국을 거쳐 로마제국이 팔레스틴을 통치하고 있을 무렵 ‘갈릴래아’는 ‘로마’와 ‘기득권자’(대지주들)에게 ‘살림’이 거덜 난 이들이 찾아드는 땅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킬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을 ‘예루살렘’에 살던 기득권자들은 ‘죄인’이라 규정하고 ‘멸시’했습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던 가난한 사람들은 대지주들의 착취에 항거해 자주 ‘봉기’하곤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갈릴래아’는 로마로부터 ‘독립운동’을 하던 ‘열혈당’(젤롯당)의 본거지였습니다(루가 13:1). 열혈당원들은 ‘암살자’로도 활약했는데, 예루살렘에 살던 대지주들, 즉 왕족이나 대사제들 같은 기득권자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따라서 ‘갈릴래아 사람’이라고 하면 ‘기득권자들’ 눈에는 ‘불순분자’나 ‘반란자’와 동의어처럼 쓰이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갈릴래아’는 ‘수탈’과 ‘절망’, ‘멸시’와 ‘천대’, ‘약자’와 ‘소외’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어떤 취급을 받았습니까? ‘사마리아’(SAMARIA)는 유다와 갈릴래아 사이에 위치한 땅이기에 빨리 왕래를 하려면 당연히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합니다. 하지만 갈릴래아나 유다로 여행하는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에 발을 들여 놓기보다는 ‘요르단 강 동쪽 베레아’를 통해 서로 왕래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처럼 ‘반목’하며 ‘원수’로 지내왔습니다.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 된 것일까요?

그들이 서로에게 ‘적대감’을 가졌던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역사적으로 복잡한 ‘민족적, 종교적, 정치적’ 배경들이 깔려 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시킨 아시리아의 ‘살마네셀 5세’는(열왕하 17:1~6), 그 땅에 ‘이주민 정책’을 펼쳤습니다(열왕하 17:24~41). 이름 하여 ‘사마리아인’들의 시작입니다. 세월이 흐른 후, ‘남왕국 유다’에 살던 백성들은 ‘사마리아 지역’에 살던 이들을 ‘피의 순수성’을 잃어버렸다면서 ‘냉대’했습니다. 민족적으로 ‘혼혈’이라는 차별입니다. 또 ‘남왕국 유다’가 바빌론제국에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온 후에도 귀향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배척’했습니다(에즈 4:2~3). 어떤 유다인도 사마리아인과 결혼 할 수 없었습니다(에즈 9:1~10:17).

종교적으로도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단’ 취급을 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경전을 가지고 있었고 야훼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고,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 산’이 아니라(신명 12:5) ‘그리짐 산’을 하느님이 원하시는 예배장소로 여겼습니다(요한 4:20). 유대교 신앙에 필수적인 ‘예루살렘’에 사마리아인들은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단자’로 여겼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민족적, 종교적, 정치적 적대감은 예수님 당시까지 8세기 이상 이어져 왔습니다.

이렇게 갈릴래아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적대적이기도 하지만 공통점도 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자신들을 민족적으로,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유다인’이라 여겼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예배 전통을 따르며 자신들을 사마리아 사람들과 구별 지었습니다. 한마디로 자신들은 민족적으로,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사마리아 사람들과 다르다는 주장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갈릴래아 사람들의 주장일 뿐입니다. 세계화된 도시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로부터 ‘이방인의 갈릴래아’로 ‘멸시’를 받았다는 점에서 그들은 오히려 ‘사마리아 사람들’과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가난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갈릴래아 출신이신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우호적이었다는 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냉대’를 당하고 ‘화’를 내는 제자들을 예수께서는 꾸짖으셨습니다(루가 9:51~56). 유대인인 율법교사와의 대화에서 이웃 사랑의 모범으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예수께서는 등장시킵니다(루가 10:25~37). 오늘 본문도 감사드리러 온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다고 보도합니다. 그야말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사마리아, 갈릴래아 사이에 존재하는 민족적(인종적), 종교적, 문화적 편견을 깨도록 ‘화해자’로 ‘사이’에 서 주신 분입니다.

그 사이를 지나 ‘어떤 마을’에 들어서는 길에 예수께서는 ‘멀찍이 서서’ 자신을 부르는 사람들을 만나십니다. 그들은 ‘나병환자들’(한센병)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크게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 루가 17:13

고대 세계에서는 ‘병’을 하느님께서 죄인들에게 내리는 ‘징벌’로 여겼습니다. 특히 나병(한센병)은 가장 두려운 질병이었고, 종교적으로도 천형 즉, 하늘이 내린 ‘벌’로 여겼습니다. 나병환자(한센병자)는 부정한 사람 취급을 받았고(레위 13:3), 전염된다고 여겼기에 깨끗한 사람을 더럽히지 않도록 ‘격리’ 당했습니다(레위 13:45~46). 그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병의 고통’ 뿐 아니라 ‘가난’과 ‘슬픔’ 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레위 13~14장). 역사기록에는 ‘예루살렘 성문 동편 밖’에 ‘한센병’ 의심을 받는 이들의 ‘격리 지역’(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나병환자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거부당하고, 공동체로부터 쫓겨났으며, 하느님의 백성이라 불릴 수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나병환자 스스로도 자신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저주받은 사람’이라 여기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나병환자는 신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영적으로도 고립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나병환자들은 누구에게도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레위 13:45). 이것이 그들이 ‘멀찍이 서서 외친’ 이유입니다. 그들은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외쳤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들을 신체적으로 회복시켜서 공동체로 복귀시켜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대단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주시라”는 간청은 고쳐달라는 뜻이기에 그렇습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놀랍게도 그들 속에는 ‘사마리아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고통은 모든 차별과 다름을 뛰어넘어 서로를 하나로 묶는 공감의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울부짖는 그들의 외침 앞에 멈추어 서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셨습니다.

본문에 ‘보다’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이돈’(ἰδὼν)은 ‘인지하다, 지각하다, 주의를 기울이다’라는 ‘오라오’(ὁράω) 동사의 부정과거형(영어의 과거형과 같습니다)입니다. 이 단어는 단지 ‘육체의 눈으로만 보는’ 차원이 아니라 은유적으로 ‘마음으로 보는 차원’, 즉 ‘내적인 눈’, ‘영적인 눈으로 지각’(인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 그들을 ‘눈여겨보셨다’는 뜻이고, 진정으로 그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아픔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깊이 보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한 맺힌 심장’에 ‘공감’하셨습니다. 그들의 ‘피 흘리는 심장’에 ‘주목’하셨습니다. 그들이 ‘멀찍이 서서’ 자비를 외칠 때, 그들의 ‘고통스런 심장의 외침’을 깊이 들으셨습니다. 자신의 문제에 매몰된 사람은 다른 이들의 ‘한(恨) 맺힌 심장’을 보는데 실패하지만 예수님은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지나치게 빠진 사람은 다른 이들의 심장에서 울부짖는 그 외침을 듣는데 실패하지만 예수님은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고통과 울부짖음을 못 보고 못 들을 때가 많지만 예수님은 결코 실패하시지 않으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감사와 희망의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는 왜 그들이 그토록 울부짖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정에서, 마을에서,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었고, 전염된다며 격리당해야 했습니다. 한마디로 보기 싫다며 내쫓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을 아프게 한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 부정’입니다. 누구도 그들의 존재를 ‘보고자’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한 ‘격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가정으로부터, 마을로부터, 관계들로부터, 사회로부터 보기 싫다며 분리되고, 단절된 채 머물러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도움이 가장 절실한 때에, 공동체의 도움이 가장 절실한 시기에 그것을 받지 못한 채 그들은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사람 취급받는 그 설움, 분명히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받는 그 피맺힌 ‘한’(恨)을 누가 풀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께서는 그들의 깊은 고독을 ‘보셨고’, 그들 심장을 꽉 채우고 있는 피눈물을 ‘보셨습니다.’ 분명 고통의 소리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 루가 17:14

그들은 단지 이 ‘한 말씀’만 들었을 뿐인데도 사제들에게 몸을 보이기 위해 갑니다. 예수님의 치유 말씀의 능력을 믿는 대단한 ‘믿음’입니다. 1독서의 나아만이 떠오릅니다. 처음에 그는 “엘리사가 나와서 자기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부분을 손으로 만져 고쳐줄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습니다. 오히려 엘리사는 이렇게 명령합니다.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시오. 그리하면 새 살이 나서 깨끗하게 될 것이오. – 열왕하 5:10

단지 그것뿐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이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라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런 나아만과 대조적으로 나병환자 열 사람은 “가서 사제들에게 몸을 보이라”는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사제’만이 악성 피부병 환자들의 사회 복귀 여부를 ‘진단’할 수 있었습니다(레위 14:1~32). 놀랍게도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깨끗해졌다’(정화되다)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카타리조’(καθαρίζω)입니다. 문학작품이나 영화의 절정 장면을 보면서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 말이 여기서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루가복음》 기자는 ‘치료하다’, ‘고치다’라는 뜻의 ‘쎄라퓨오’(θεραπεύω)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이 단어를 쓴 이유는 외적인 몸뿐 아니라 그들의 깊은 내적 아픔도 치유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그들 몸에 치유가 일어났을 때 ‘아홉’은 계속해서 가던 길을 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 전통’에 순종하기 위해 계속해서 달려간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들 중 ‘한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기 병이 ‘나은 것’[여기 쓰인 그리스어 ‘이아오마이’(ἰάομαι)는 ‘영적으로 치유하다’는 뜻도 있습니다]을 보고 가던 길을 멈추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전통적인 율법에 순종하기를 멈추었다는 뜻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유대교 사제’에게 간다고 해도 그를 받아 줄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다소 밋밋하게 다가오지만 본문에서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구절은 듣는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리는 ‘일침’(一針)입니다.

그는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영광을 돌리면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오는 동안 찬양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흐르는 기쁨의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돌아가야 할 곳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는 예수께 돌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발 앞에 엎드렸다’는 것은 ‘하느님께 바치는 경배’(예배)를 예수님께 드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았다’는 뜻입니다. 그 순간 그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 순종’하는 사람의 상징이 됩니다. 율법보다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는 것이 인류의 희망임을 드러내는 상징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의 행동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 – 루가 17:17~18

그렇습니다. 그는 분명 ‘이방인’(다른 민족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행하신 일에 대해 반응하는 긍정적인 모범으로 그를 ‘드높여’ 주십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어째서 예수께서는 ‘아홉’에 대해 물으셨을까요? 그들의 ‘배은망덕’(背恩忘德)을 꾸짖는 것일까요?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렇게 속단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찬찬히 음미해 보면 그들 역시 배은망덕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시간 차이는 있지만 결국은 그들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요?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이유는 ‘공동체’로 회복되기 위해서입니다. 그 회복을 위해서는 사제들로부터 병이 나았다는 ‘진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때 그들은 ‘감사예물’을 바치도록 율법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 역시 ‘공동체로 회복’되기 위해서 마을마다 있는 사제을 찾아가서 그와 함께 ‘하느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참 사제’이신 당신에게 와서 감사하지 않아서 섭섭한 마음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건 너무 속 좁은 분으로 예수님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감사 받기 위해서’ 치유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보답을 바라서’ 말씀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보상을 기대해서’ 하느님 나라 일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이야기의 핵심은 우리가 흔히 알듯이 ‘감사 요청’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복음이야기의 핵심은 이어서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 루가 17:19

이 구절은 예수님이 받기보다 한없이 주시는 분임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 열 사람이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라고 요청했을 때 기꺼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무엇’(감사)을 바라서가 아닙니다. ‘무상’(無償)으로 자비를 베푸는 일은 《성경》이 증언하는 ‘하느님의 성품’입니다. 다시 말해 한없이 주시는 일은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의 ‘기쁨’입니다.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생명을 회복시키며, 주고 또 주며, 더 많이 주시는 일이 예수님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들을 연중 24주일 설교, ‘잃어버린 양과 은전을 되찾는 이야기’를 통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혼자 있게 되거나 고립(격리)되지 않도록 찾아주시고, 공동체로 회복시켜주십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왕처럼 높은 보좌에 앉아 섬김을 받기보다 ‘종’처럼 섬기려 오신 분입니다(마르 10:45). 한마디로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로 오신 ‘종’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야기와 《성경》 전체의 핵심입니다. 연중 27주일 설교도 우리를 식탁에 앉히시고 종처럼 섬겨주신 하느님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창조주 하느님이 먼저 피조물을 돌보고 섬겨주시는 분으로 증언합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아니 보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나’의 구원을 위해 먼저 봉사해 오신 ‘섬김의 종’으로 증언합니다(요한 13:12~17). 우리는 이 진실을 가슴에 잘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돌아온 그를 따뜻이 환대하십니다. 그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키시며 ‘용기’를 주시고 ‘구원’도 선물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더 많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사도들이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루가 17:5) 요청했을 때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이라고 대꾸하셨는데, 예수님을 ‘하느님’(주님)으로 알아 본 그에게는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탄복하십니다. 이 표현은 루가복음에 네 번 등장합니다(루가 7:59; 8:48; 17:19; 18:42). 하나같이 ‘사회적 약자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주님)으로 알아보는 믿음’에 대한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도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복음이야기는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이야말로 ‘죽어가는 인생들’이 하느님의 능력인 ‘생명’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병들고 절망한 인생들’에게 ‘치유와 회복’을 먼저 베풀어주시어 유일한 분임을 증언합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한숨이 노래로 바뀌게 해 주시는 유일한 분임을 증언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 수 있는 유일한 하느님이심을 증언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실을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이 알아보는 믿음의 눈, 즉 지혜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구원’까지도 선물하십니다. 우리도 그런 지혜의 사람으로 거듭나 일평생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복될까요?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늘도 주님은 감사성찬례에 나온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별반 잘 살아오지도 않았는데도 단지 우리가 이 자리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너 왔니? 잘 왔다. 고맙다.” 이렇게 다정하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들은 어디 갔느냐?”고 염려 섞인 목소리로 물으시면서 우리가 바치는 감사를 기쁘게 받아주시고,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지금도 주시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받기를 좋아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고단한 인생들에게 ‘먼저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먼저 사랑으로 섬겨주시는’ 하느님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항상 더 많은 것을 ‘먼저 풍성하게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을 증언합니다(요한 10:10). 다른 종교들은 ‘바치는 정성’을 강조하는지 몰라도 그리스도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으로부터 찬미와 감사를 요청하는 하느님을 증언하기보다는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도 아낌없이 ‘내어 주시고’, ‘구원이 필요한 우리를 종처럼 섬겨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증언”합니다(로마 8:32, 마르 10:45). 이것이 진실입니다. 이것까지 꿰뚫을 때 진정한 ‘지혜자’입니다. 참으로 지금도 진행 중인 주님의 섬김 덕택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즘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닮겠다고 따라나섰습니다. 우리도 상처 받은 사람들 안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한 맺힌’ 심장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졌습니까? 고통스러운 심장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를 가졌습니까?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단절과 외로움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습니까? 찬찬히 고상 십자가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주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먼저’ 봉헌하셨습니다. 죄인들과 병자 어루만지시던 그 치유의 손을,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던 그 복음의 발을, 온통 사랑으로 가득 찬 그 거룩한 심장을 우리를 위하여 ‘먼저’ 바치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진실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행하신 그 ‘사랑과 용서’는 결코 무효화되지 않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그 거룩한 보혈을, 그 거룩한 심장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생생히 깨닫게 될 그 ‘봄의 날’을 기다리며, 성당마다 십자고상을 높이 내걸고 우리에게 고요히 말을 걸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에 응답해야 합니다. 어쩌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진짜 도전은 서로를 ‘실제로 보는 것’입니다.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내면의 아픔’을 ‘공감’하는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멀찍이’ 거리를 두고 싶은 사람이 나에게 다가왔을 때, 우리는 과연 곁을 내주고, 그를 ‘예수의 심장’으로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섬길’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에게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이제 이 성찬례에서 우리는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먼저 섬겨주시는’ 하느님의 자비 속에서, 우리의 삶이 살아지는 것임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지혜자’가 되면 우리가 드릴 것은 ‘감사’ 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지혜자가 되지 못해도, 우리는 진실하지 못해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새 계약’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진실하시고, 우리를 향한 구원의 약속을 충실히 지켜나가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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