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 6. 연중27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27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믿음의 근원이시고, 완성자이신 주님만을 바라봅시다.’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간직한 ‘믿음’은 우리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왔습니다. 더욱이 우리 속에는 ‘믿음의 근원’이시고, ‘완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종’인 우리를 불러 ‘생명의 식탁’에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종’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있는 그 ‘믿음’을 보시고 ‘자리’에 앉히시고 기꺼이 섬겨주십니다. 이 같이 크신 자비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불멸의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전도자의 삶을 살아가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신실하신 하느님, 주님은 부족한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믿음을 더하여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의 능력을 믿고, 담대하게 주님을 드러내며 변함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하바 1:1-4, 2:1-4
  • 시편 – 37:1-9
  • 2독서 – 2디모 1:1-14
  • 복음서 – 루가 17:5-10

연중 27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믿음의 근원이시고, 완성자이신 주님만을 바라봅시다.’입니다.

1독서는 ‘바빌론의 침공’과 ‘유다 멸망’을 예언하는 《하바꾹》입니다. 유다왕국이 마지막을 향해 폭주하던 무렵(BC 609~600, 여호아킴 왕 시절), 예언자 ‘하바꾹’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포옹하다’, ‘껴안다’ 뜻을 가진 동사(히브리어 카바크, chabaq)에서 왔습니다. 그 이름처럼 그는 어려운 질문들을 껴안고 씨름함으로써 ‘확고한 믿음’을 얻은 예언자입니다. 그는 이전의 예언자들이 백성들을 상대로 호소했던 것과 달리 ‘하느님’을 상대로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고충’(苦衷)을 토로합니다.

그가 보기에 유다왕국은 ‘무법천지’입니다. 파괴와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송사와 분쟁으로 들끓은 세상, 율법은 마비되고 공의가 무너진 세상, 악인이 착한 사람을 등쳐먹는 세상, 인권이 짓밟히는 세상입니다. 한 마디로 ‘최악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하느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아시더라도 관심이 없으시고, 바로 잡을 생각조차 없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런 행동도 하시지 않는 하느님 때문에 그의 마음은 괴로워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그는 어째서 하느님이 이런 세상을 ‘심판’하시지 않고 내버려두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님께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행동하실지 그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갔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 자신을 짓누르는 ‘고충’(삶의 문제)을 하느님께 질문합니다. 요약하면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님, ‘언제’까지 당신은 지체하실 것입니까?”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 왜 ‘그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까?”입니다. 마지막은 “주님, 이런 최악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입니다. 이렇게 하바꾹은 자신을 짓누르는 ‘질문’(삶의 문제)에 하느님께서 ‘대답’(한 말씀)해 주시기를 호소합니다. 자신을 짓누르는 ‘짐’(삶의 문제)에서 속히 해방시켜 달라고 기도 중에 토로합니다.

그의 기도를 묵상하다 보면, 그의 처지나 오늘의 우리나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도 하바꾹처럼 공평과 정의가 무너진 세상을 삽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삶의 질문들’을 붙들고, 하느님이 주시는 ‘한 말씀’을 듣기 위해 ‘씨름’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찬례는 ‘내 영혼을 살리는 한 말씀’을 듣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기도 중에 그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은 환상 속에서 그의 ‘질문들’에 차례로 ‘말씀’(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은 결코 ‘지체’하시지 않을 것입니다(5절). 이것이 그가 제기한 ‘언제’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의 ‘생전’에 일어나고야 말 놀랍고 질겁할 일, 귀를 의심할 만한 일이 일어나는 ‘환상’을 봅니다. 그 환상은 하느님이 ‘바빌론’을 일으켜 ‘유다’를 ‘심판’하시는 장면입니다(1:5~11).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바빌론은 남의 보금자리를 빼앗으며 천하를 주름잡습니다(1:6). 바빌론은 제 힘을 믿고 멋대로 법을 세우는 무섭고도 영악한 족속입니다(1:7). 제 힘을 하느님처럼 믿는 족속입니다(1:11). 표범보다 사납고, 늑대보다도 날카로우며, 독수리 보다 빠른 ‘바빌론 군대’의 ‘힘’과 ‘속도’에 유다는 ‘초토화’됩니다. 한마디로 ‘바빌론’은 마음이 부풀어 오를 대로 올라 영혼이 바르지 않은 ‘자만심’과 ‘거만함’의 대명사입니다.

하바꾹은 어째서 하느님이 ‘다른 방법’이 아니라 그 방법을 택하셨는지 의아해 합니다. 유다보다 더 ‘사악’한 그들을 ‘심판의 도구’로 삼으시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1:12~17). 왜 ‘겸손’과는 거리가 먼 ‘거만하고 자만한 바빌론’을 들어 최악의 세상인 유다를 심판하시는지 다시 ‘질문’합니다. 그는 자신이 제기한 이 ‘두번째 질문’(고충)에 하느님이 어떤 대답을 하실지 ‘결연한’ 태도로 기다립니다. 요새(초소)를 지키는 병사처럼, 망대에 올라선 파수꾼처럼 눈에 불을 켜고 ‘서서’ 기다립니다. 자신을 짓누르는 ‘삶의 문제’에 대한 ‘대답’(말씀)을 반드시 듣고야 말겠다는 ‘간절함’이 돋보입니다.

그 순간 하느님이 ‘말씀’하십니다. 그가 받은 ‘대답’(한 말씀)을 누구나 알아보도록 ‘판’에 새겨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가 제기한 질문들과 들은 대답들을 ‘글’로 남겨두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준비를 먼저 시키신 셈입니다. 그가 들은 ‘한 말씀’은 이렇습니다.

멋대로 설치지 마라. 나는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 – 하바 2:4

이것이 그가 제기한 어째서 하느님이 ‘다른 방법’이 아니라 바빌론이라는 방법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시는지에 대한 대답입니다. 동시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하느님의 ‘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지체하시지 않고 그의 살아생전에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것으로 ‘언제’에 대한 그의 질문에 답변하셨습니다. 심판의 방법은 ‘바빌론’이 될 것입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겸손’과는 거리가 먼 ‘거만하고 자만한 바빌론’을 들어 ‘유다’(최악 세상)를 심판하시는 것이 불합리한 것 같아도 하느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은 항상 옳습니다. 감히 인간이 멋대로 설치며 항변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아십니다. 특히 ‘거만한(자만한) 사람’(바빌론)을 다루는 법을 잘 아십니다. 사람이 세상이 돌아가는 일을 보고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세상사에 대해서 하느님을 원망하며 멋대로 설칠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아도 ‘정하신 때’에, 인간의 생각을 넘어서는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역사에 개입하시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기억할 것은 ‘멋대로 설치는 이들’(이들도 ‘거만한 사람들’과 마찬가지입니다)과 대조적으로 ‘의로운 사람들’도 있다는 점입니다. ‘의로운 사람들’의 삶의 원리는 ‘신실함’(진실함), 즉 ‘믿음’입니다.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자만심’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도 되는 냥’(1:11) 까불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하거나 우쭐 거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향하여’ 겸손히 마음을 우러릅니다. 우리가 ‘성찬응답송’(Sursum corda)으로 바치는 ‘마음을 드높이’가 생각납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의로운 사람들’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굳게 지키고’ 벗어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상황’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신실하게’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사람입니다. ‘상황’이나 ‘스스로’에게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만 ‘희망의 근거’를 두는 사람입니다. 참된 믿음은 항상 겸손히 하느님을 우러르지만 자만한 사람은 제멋대로 설치고 항상 스스로를 높이 두고 우러러 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진실하게 살아가는 ‘의로운 사람’은 바빌론의 침공이라는 환란 속에서도 살아남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하바꾹이 직면하고 있는 ‘최악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하느님의 ‘한 말씀’입니다.

하바꾹이 기록해서 남겨 준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는 이 짧은 문구는 《신약성서》에 인용된 《구약성서》의 말씀 중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갈라 3:11; 히브 10:38). 특히 사도 바울로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 율법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되는’(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구원 얻는) ‘복음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습니다(로마 1:17). ‘마틴 루터’도 이 말씀에 사로잡혀 타락한 중세교회 개혁의 선봉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기감정이나 상황에 따라 살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결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 11:6).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결정적으로 행하신 ‘구원사건’을 흔들림 없이 진실하게 믿는 사람은 ‘의롭다 인정함’을 받습니다(로마 1:17; 갈라 3:11). 장차 도래할 ‘마지막 심판’에서 살아남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것입니다(히브 10:36~39). 하바꾹처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최악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야함을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서 1독서는 ‘믿음’과 ‘종’된 이들의 태도를 교훈하는 복음이야기의 배경이 됩니다.

《시편》은 ‘하느님만 믿고 살도록’ 격려하는 <37편>에서 발췌했습니다. 믿음으로 살 것을 권고하는 1독서에 대한 응답(찬미)입니다. 노년에 이른 시인이(25절) 인생 경험을 격언 형식으로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원문으로 보면 두 줄로 구성된 각 연의 첫머리가 히브리어 알파벳 22자의 차례를 따라 지어진 ‘시’(詩)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가’ 이렇게 운을 떼고 ‘가’로 첫머리를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형식이다 보니 내용의 짜임새가 느슨하고, 반복이 자주 나타납니다. 하느님을 향한 기도나 찬미가 없기에 ‘성전 예배용’이라기보다는 교훈을 위한 ‘지혜문학’의 전형으로 분류합니다.

하바꾹처럼 시인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훈합니다. 특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현실을 향해 던지는 중요한 질문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공의(정의)’ 말입니다. 우리는 악한 자가 잘 되고, 불의한 자가 여전히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목도합니다(1절). 그럴 때마다 “도대체 하느님은 어디 계십니까?”라고 ‘믿음 없는’ 소리를 내뱉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자신은 ‘완전히 의롭게’ 살아 온 사람이라도 되는 냥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이 싫어하시는 ‘자만심’ 가득한 사람이 됩니다. 시인도 젊은 시절엔 이런 고민에 시달렸나 봅니다. 때로는 몹시 화를 내었고, 하느님께 불평을 토로했었나 봅니다(8절). 이제 노년에 이른 시인은 ‘하느님의 공의’를 물으며 격분하는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대답합니다. ‘불평’이나 ‘화’를 내는 것은 자신에게 해로울 뿐이라며 이렇게 교훈합니다.

야훼만 믿고 살아라… 네 즐거움을 야훼에게서 찾아라… 그에게 앞날을 맡겨라… 고요하게 지내라… 조금만 기다려라, 악인은 망할 것이다. 아무리 그 있던 자리를 찾아도 그는 이미 없으리라. – 시편 37:4~5,7, 10

“주님만 믿고 살아라.” 이것이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온 노인의 지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살아계시고, 하느님의 시간에 개입하시며, 모든 일을 알아서 하신다는 교훈입니다. 문제는 믿지 못하고 호들갑을 떠는 우리의 ‘조급함’입니다. 심판의 시간을 우리 마음대로 정해 놓습니다. 심판의 방법도 우리 뜻대로 정해 놓습니다. 우리가 정한 시간과 방법대로 되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어쩌면 자비하신 하느님은 우리가 ‘원수’처럼 여기는 ‘악인’이라 할지라도, ‘불의한 자’라 할지라도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시간’을 주시며 지금도 기다리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풀처럼 삽시간에 시들고, 푸성귀처럼 금방 스러지기를” 기도하기보다 구원의 길로 ‘초대하라’고, 우리에게 그런 일을 해 보라고 지금도 세상으로 파송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쪼록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성취되기를 끈기 있게 기다리면서, 세례 때 맺은 계약대로 ‘믿음의 길’을 잘 달려가기를 축복합니다.

2독서는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입니다. 담대한 믿음으로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잘 수행하라고 권고합니다. 연중시기에 낭독하는 2독서는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와의 연결이 느슨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은 ‘믿음의 삶’을 교훈하는 다른 <전례독서들>과의 연결이 빛납니다.

바울로는 지금 복음을 전파하다 ‘옥중’에 갇혀 있습니다(8절). 그는 디모데오를 향한 사랑과 축복의 인사말로 편지를 시작합니다. 디모데오와 함께 하던 시절의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다시 만나기를 고대합니다. 디모테오가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믿음’을 잘 간직하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이 주신 은총의 선물인 ‘성령’을 생생하게 간직하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야 말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한 마음’으로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는 ‘힘’과 ‘사랑’과 ‘절제’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복음’이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없애버리시고 ‘불멸의 생명’을 환하게 드러내 보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은 ‘불멸의 생명’, 즉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자신이 전도자와 사도와 교사로 임명 받았다고 확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울로가 복음전파의 사명을 다하도록 끝까지 지켜주실 것이기에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처럼 디모데오도 복음전파의 ‘담대한 일꾼’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구원의 계획과 은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복음의 ‘충실한 종’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끝으로 믿음과 사랑의 삶의 모본이신 그리스도를 본받고, 바울로에게 들은 건전한 말씀을 생활원칙으로 삼아 살아갈 것을 권고합니다. 우리 안에 살아계신 성령의 도움을 받아 맡은 바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오로지 성령을 따라 살 때야 만이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에 ‘충성’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복음이야기는 ‘믿음의 힘’과 ‘종의 의무’를 교훈하는 《루가복음》입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앞 이야기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루가 17:1~4).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악의 유혹’을 경고하십니다(루가 17:1~2).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낫다”는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남’이란 누구입니까? 그들은 사회로부터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취급을 받는 이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부자들이 잔치에 초대하기를 꺼려하는 ‘가난한 사람’, ‘장애인’입니다(루가 14:13).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당하던 ‘세리’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었기에 ‘죄인들’이라 불리던 이들입니다(루가 15:1). ‘라자로’ 같은 업신여김을 받던 가련한 인생들입니다(루가 16:19~30). 당대에 의롭다고 자부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로부터 정죄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을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돌보시는 분으로 증언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편애’(偏愛)하시는 분으로 증언합니다. 따라서 그들을 업신여기고 죄짓게 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향하여 도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거스르는 이들을 ‘심판하시는 불’이십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죄짓게 하는 이들은 그 무서운 하느님께 처단을 받기 전에 제 스스로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하느님께서는 ‘사회적 약자들 편’이십니다. 사실 가난한 사람들은 믿음이 부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부자들을 향해 《야고보서》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을 부요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해 주신 그 나라를 차지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 야고 2:5

또 예수님은 ‘형제용서’를 말씀하십니다(루가 17:3~4). 심지어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 형제가 ‘그 때마다’ 잘못했다고 ‘용서’를 청하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일곱 번’은 의미적으로 ‘완전히’를 뜻하고 ‘그 때마다’는 ‘계속해서’를 뜻입니다.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르는 형제가 있을 리는 없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공동체가 ‘옳고 그름’의 ‘율법적 기준’과 ‘도덕적 범주’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토대’ 위에서 살아가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에서는 세상의 모든 가치 기준이 ‘전복’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공동체는 세상의 다른 공동체와는 달라야 합니다. 예수의 공동체는 ‘보잘 것 없는 자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잘 났다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환대받는 은총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예수의 공동체에서는 ‘용서와 화해’가 매일 매일 자연스러운 질서여야 합니다. 이 일들을 통해 예수의 공동체는 자신들이 예수와 함께 시작된 ‘하느님 나라’에 속했음을 증명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던 제자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사랑에 기반 하는 용서보다는 미움과 증오로 넘쳐납니다. 생각 끝에 사도들은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지금 그들이 가진 것보다 훨씬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요청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 루가 17:5

그들은 이 요청을 누구에게 합니까? ‘주님’에게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자신들을 도울 수 있는 ‘더 큰 믿음’을 선물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은 여전히 속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지금보다 ‘뭔가를 더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요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더 증가시키고 가져야 한다.’고 요청하는 것은 ‘세상의 방식’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쌓아올려야 행복하다”고 계속해서 ‘유혹’합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안전하다”고 계속해서 ‘선전’합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크고, 더 많고, 더 강해져야 성공할 수 있고,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계속해서 ‘부축’입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더하여 갖지 못하면 결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없다”고 계속해서 채찍질 합니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더하여 쌓지 못하면 결코 사랑받을 수 없다”고 계속해서 귓가에 속삭입니다. “실패자가 되지 않으려면 더 많은 것을 쌓고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속삭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말하는 그런 ‘유혹’과 ‘선전’, ‘부축임’과 ‘속삭임’에 중독되고 속아서 ‘더 많이 쌓기’ 위해, ‘더 많이 갖기’ 위해, ‘더 많이 증가시키기’ 위해 자신을 몰아가고, 피 흘리도록 ‘경쟁’합니다. 우리 마음이 타인의 시선과 말에 온통 지배를 받으며 ‘더’, ‘더’, ‘더’ 움켜쥐기 위해 경쟁합니다. 그러다 그 경쟁 속에서 하나 둘 쓰러지고 탈진해 갑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전혀 행복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합니다. 분명 그 전보다 더 많은 것을 ‘더하여’ 쌓았고, 그 전보다 더 많은 것을 ‘더하여’ 갖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세상의 유혹과 선전, 부축임과 속삭임은 처음부터 거짓이었다는 점입니다. ‘더 갖는 것’으로 우리는 결코 행복(안전)해지지 않습니다. 행복은 ‘더 갖는 것’에서 오지 않습니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더 가져야 한다’고 거짓으로 유혹하는 사기꾼들을 우리 사회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더 가져야 한다’는 착각, 허상, 망상, 공상에 빠뜨리는 허탄한 생각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존재의 진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이미 ‘충분’합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괜찮고, 사랑스럽습니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굳이 필요한 일을 말씀해 달라면 ‘더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덜어내는 일’입니다. ‘더 적게 갖는 일’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는 일’입니다.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을 《필립비서》는 이렇게 교훈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 필립 2:6~8

‘자기비허’(자기비움)라고 일컬어지는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더 많은 것을 쌓고, 더 많이 갖는 것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덜어내고 비우는’ 데서 오는 참 행복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어 인류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진실을 아셨던 예수님은 제자들의 요청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 루가 17:6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지금 그들의 착각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스스로’로부터 출발한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 속에서 출발한 그 믿음이 ‘증가’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출발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냉정해 보이지만 이것이 진실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믿음’은 인간에게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 히브 12:2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근원’이시며 ‘믿음의 완성자’이십니다. 모든 믿음은 예수님에게서 옵니다. 믿음조차도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사도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믿음이 없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들이 가진 믿음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만일 그들 자신들로부터 믿음이 출발하고, 그들이 결정해서 생겨난 믿음이었다면 그들은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하시는 예수님께 모욕당한 셈입니다. 그러나 모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은 그들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온 선물’로서의 ‘믿음’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에게서 온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사도들은 다른 믿음을 간구할 것이 아니라 이미 그들에게 ‘선물된 예수님의 믿음’에 주목해야 했습니다. 사실 믿음은 ‘더하는’(증가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측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크기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덜 중요합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믿음’ 그 자체입니다. 단지 그들에게 예수님에게서 온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크고 작고가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그 믿음만 있으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놀라운 일들, 가령 “뽕나무가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지는 일도” 평범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물하신 ‘그 믿음’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더욱이 이제 우리 안에는 ‘겨자씨’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크기의 믿음이 있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라는 ‘믿음’입니다(요한 1:12). 지난여름 휴가차 ‘고성’에 있는 ‘문암 해변’을 갔었는데, 바다에서 자라나고 있는 ‘뽕나무’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 쪽 동네 교회 사람들은 예수님이 선물하신 믿음이 없어서일까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설명하시면서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심겨져라 말해도 그대로 된다”는 예를 드셨습니다. 어째서 예수님은 다른 것도 많은 데 굳이 ‘뽕나무’를 예로 드셨을까요? 고요히 묵상해 보았습니다. 흔히 우리는 믿음이 극적이고 기적적으로 행사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욱이 그런 기적적인 믿음을 행사하려면 사도들이 요청한 것처럼 ‘큰 믿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도들처럼 착각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믿음’이 일으키는 ‘가장 큰 기적’은 뽕나무가 바다에 심겨져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보다는 살면서 보니까 ‘관계의 회복’이야말로 믿음이 일으키는 가장 큰 기적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뽕나무’는 ‘돌무화과나무’(히브리어로는 ‘쉬케모레아’, 그리스어로는 ‘쉬카미노스’)입니다. ‘돌무화과나무’는 주로 건축목재로 쓰였는데, 뿌리가 강해서 몇 백 년 된 것들도 당시에는 수두룩했습니다. 돌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오래도록 용서하지 못하는 ‘증오와 원한’의 돌무화과나무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통해 그 나무는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심겨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 안에 심겨진 오래된 ‘증오와 원한’의 나무가 뿌리째 뽑히고 그 자리에 ‘십자가’라는 ‘용서와 사랑’의 나무를 새로 심는 일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시간은 어제까지의 오래된 ‘증오와 원한’이 오늘의 ‘용서와 사랑’으로 바뀌는 지금 이 순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공간은 어제까지의 오래된 ‘증오와 원한’이 오늘의 ‘용서와 사랑’으로 바뀌는 곳입니다. 그곳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마음’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이렇게 용서하는 마음이야말로 예수님(성령)의 선물인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 일으키는 가장 큰 기적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 일으키는 가장 큰 기적입니다. 정말 예수님에게서 온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다면 그런 일들이 우리 속에서 일어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나에게 얼마나 큰 믿음이 있느냐 보다는 어떤 종류의 믿음인가와 더 관련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온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용서’라는, ‘사랑’이라는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도들이 받기를 기대하는 ‘보상’에 대한 도전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가르치기 위해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종’을 예로 듭니다. 주인은 ‘종’이 힘든 일을 하고 돌아왔다고 해서 칭찬하거나 밥상을 차려주거나 안마를 해주거나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인은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면서 종에게 또 일을 시킵니다. 주인은 ‘종’이 명령대로 수행했다고 해서 결코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종이라면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께 명령받은 일을 수행해야 합니다. 잘 했다고 해서 주님으로부터 ‘보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 실패하더라도 책임은 주님이 지실 것입니다. 주님은 명령하시고 그들은 그저 수행할 뿐입니다. 어떤 ‘보상’도 주님으로부터 당연한 것으로 기대될 수 없습니다. 그저 그들은 항상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종인 우리에게도 주님을 섬기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항상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방법을 통해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루 일곱 번의 용서’와 관련해 말씀드린다면 우리에게는 아직도 용서해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도전해야 할 위대한 일, 즉 복음 전파의 일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그런 일들을 잘 하고 있다고 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상’해야 한다고 요청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씀 드려야 합니다.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 루가 17:9

이것은 우리가 겸손해서 하는 고백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 크신 ‘구원의 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어떤 ‘일’도 주님이 먼저 베푸신 그 은총에 대한 지극히 미약한 ‘상환’일 뿐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하여 하는 어떤 ‘봉사’도 주님이 먼저 베푸신 은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과 우리가 주님(교회)을 위해서 하는 봉사는 태양과 촛불로 비교하는 것도 과분합니다. 정말이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용서’와 ‘섬김’은 ‘순수한 사랑’에서 나온 일이고,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하는 봉사는 단지 ‘감사’에서 나온 ‘믿음’의 일일뿐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복음’인 이유가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상해 주실 것을 요청하면서 주님의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기쁘게도 주님은 우리를 ‘칭찬’하시고 ‘보상’해 주신다고 《성경》은 약속합니다. 우리가 그런 칭찬과 보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보잘 것 없는 종’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 마태 25:21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늘 <전례독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임을 증언합니다. 더욱이 우리의 ‘믿음’은 우리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왔습니다. 더욱이 우리 속에는 ‘믿음의 근원’이시고, ‘완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종’인 우리를 불러 ‘생명의 식탁’에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종’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있는 그 ‘믿음’을 보시고 ‘자리’에 앉히시고 기꺼이 섬겨주십니다.

하느님은 이 시간도 우리가 배불리 먹고 마시도록 ‘생명의 식탁’을 차려 주십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동안 성삼위 하느님은 우리의 시중을 들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몸을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십니다. 당신의 피를 우리를 위한 참된 음료로 내어주십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의무라고 성삼위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섬기기 위해 지금 여기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정말이지 세상 어느 종교가 ‘신’(神)이 인간을 섬겨주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그리스도교만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종처럼 부리는 폭군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느님은 당신과 멀어진 인간과 화해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성자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하시고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봉헌물로 바치셨습니다. 우리 안에 살아계신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불멸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빛나게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오늘도 생명의 주님을 전파하러 힘차게 세상에 나아갑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항상 풍성히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믿음의 근원’이시고 ‘완성자’이신 주님,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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