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9.29. 연중26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주 하느님, 성자께서는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베푼 자선도 주님께 행한 것이라 말씀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이웃의 어려움을 늘 살피고, 주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늘의 상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아모 6:1상, 4-7
  • 시편 – 146
  • 2독서 – 1디모 6:6-19
  • 복음서 – 루가 16:19-31

연중 26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가난한 사람들을 편애하시는 하느님 편에 서라’입니다.

1독서는 ‘사회 불의’에 저항한 《아모스》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 중에서 ‘아모스’만큼 ‘사회 정의’(특히 경제적 정의)를 열정적으로 부르짖은 사람도 없습니다. 사회에 만연한 ‘불의’(부패)와 ‘우상숭배’ 때문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경고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멸망을 외치던 시절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는 ‘물질적(경제적) 번영’을 누렸습니다. 문제는 그 ‘물질적(경제적) 번영’이 일부 계층에게로 편중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수탈당했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 남왕국 유다에 살던 ‘아모스’를 북왕국 이스라엘까지 보내어 사회에 만연한 이러한 ‘경제적 불의’와 ‘우상숭배’를 꾸짖으셨습니다. 하지만 ‘부자’로 대변되는 ‘향락’에 빠진 ‘사회의 강자들’은 그 ‘경고’(하느님의 말씀)를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정치, 경제, 종교, 어느 것 하나 부패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회에 만연한 ‘경제적 타락상’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아모스’만큼 타락한 부자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상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예언자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당시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은 수탈을 당해 죽을 지경에 처했습니다. 그런데도 ‘부자들’은 가난한 동족들을 돕고 생활 조건을 개선시키려 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향락’을 누렸습니다. ‘아모스’는 이렇게 온갖 사치를 부리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부자들’을 향해 멸망을 경고합니다.

예언자 ‘아모스’가 활동하던 시대나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나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저만의 착각일까요? 시대의 과제인 ‘분배의 정의’를 구현해내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도 북왕국 이스라엘처럼 희망이 없습니다. 실제로 북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 제국에게 멸망당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향락’에만 몰두했던 그들은 종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렇게 1독서는 복음이야기의 배경역할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의 대명사인 ‘라자로’의 고통을 외면하고 날마다 호화로운 생활을 한 ‘부자’가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하느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가난한 사람들’은 사람들로부터는 도움을 받을 수가 없어 ‘오직 하느님으로부터만 도움을 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부자는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라자로의 형편’이 나아지도록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 그의 가장 큰 잘못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부자는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겪어야 했고,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시편》은 사회적 약자들이 참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하느님’을 찬미하라는 <146편>입니다. 흔히 《시편》의 마지막 다섯 편(146~150편)은 ‘대송영’(the Great Doxology)이라 불립니다. 이유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용기를 북돋는 “할렐루야”(야훼를 찬미하라)로 시작하고 끝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편》 1~150편은 여러 세기에 걸친 ‘인생살이의 다양한 면들을 공동체의 기도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기쁨, 애가(哀歌), 감사, 희망, 탄원, 확신, 회상, 지혜, 왕의 통치 등 그 상황도 다양합니다. 따라서 《시편》의 히브리어 제목인 ‘테힐림’(Tehillim, 찬가)이라 부르기에 어색한 시(詩)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다섯 편은 그 제목에 가장 잘 어울립니다.

먼저 ‘시인’(詩人)은 하느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온 자신의 행복을 노래합니다(1절). 한평생 자신을 인도해 주신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찬미합니다(2절). 권력가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3절). 권력가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정치인, 고위공직자, 재벌입니다. 그들은 ‘부’(富)와 ‘권력’을 움켜쥐고 언론을, 제도를 쥐락펴락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위세’를 부려도 숨 한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경고합니다(4절; 참고, 전도 12:7; 창세 2:7; 3:19). 진정으로 믿고 의지하며 희망을 둘 분은 오로지 ‘하느님’이라고 찬미합니다(5절). 왜냐하면 온 우주의 진정한 주권자는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6~10절).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창조주’이시고(6절a), 언제나 ‘신의’(信義, 믿음과 의리)를 지키시는 분입니다(6절b). 하느님은 저 멀리 하늘에 계시지 않고, 특히 지금 여기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현장에 현존해 계시며, 구원을 일으키시는 참된 임금이십니다(7~9절). 이렇게 시인은 하느님의 ‘권능’과 ‘사랑’과 ‘자비’의 보살핌을 선언합니다. 하느님은 억눌린 자들을 위해 지금 여기서 ‘정의’(권익)를 집행하시는 분입니다(7절a, c). 굶주린 자, 장애인, 나그네, 고아와 과부로 대변되는 ‘사회적 약자들’을 지금 여기서 먹여 살리시는 분입니다(7절b, 8~9절).

역사에서 권력가들은(특히 정치인들은 선거철이 아니면) ‘가난한 이들’을 무시하지만 하느님은 ‘보잘 것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이들을 언제나 지독히도 ‘편드시는’(편애하시는) 자비하신 분입니다(9절). 하느님은 의인을 사랑하시나(8절c) 악인들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9절c). 참으로 하느님은 ‘사회적 약자들’을 ‘편애’하시는 영원히 찬미 받으실 ‘신의’(信義) 가득한 온 세상의 참된 통치자이십니다(10절). 이렇게 1독서 아모스 예언자가 외친 ‘정의의 하느님’을 오늘 《시편》에서 만납니다. 시인이 찬미하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신의’(信義)와 ‘사랑’과 ‘자비’는 복음이야기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2독서는 ‘만족(자족)할 줄 아는 신앙생활’과 ‘믿음의 싸움’을 권고하는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배정했습니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경건한 설교의 마지막 부분인 셈입니다. 연중시기에 낭독하는 2독서는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와의 연결이 느슨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은 ‘돈(재물, 부富)과 권력’에 ‘의지’하려는 인생들의 어리석음을 경고한다는 점에서(7절, 9~10절, 17절) 다른 <전례독서들>과의 연결이 빛납니다.

사도 바울로는 ‘영원한 생명’(참된 생명)의 ‘보장’은 ‘돈’(재물, 부富)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 있음’을 사목자인 디모테오에게 마지막으로 교훈합니다(12절). 이것을 똑똑히 새겨두라고 그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당시 교회 안에서 고백되던 짧은 신앙고백문을 이용해 들려줍니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고 복되신 주권자이시며 왕 중의 왕이시고 군주 중의 군주이십니다. 그분은 홀로 불멸하시고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며 사람이 일찍이 본 일이 없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영예와 권세가 영원히 그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아멘. – 1디모 6:15~16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참된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돈’(재물)으로 ‘영원한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참된 생명)은 ‘그리스도의 건전한(온전한) 말씀들’을(1디모 1:11) 받아들이고, 경건한 생활원칙(가르침)을 따라 사는 하느님의 일꾼들이 ‘차지’합니다(1디모 6:3). 특히 ‘하느님의 일꾼들’은 “정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며, 세례 때 한 고백처럼 자신이 하느님께 속했음을 증명해 가야합니다(11절). 그것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쌓아야 할 ‘영적인 부(富)’인 셈입니다. 또 ‘영원한 생명’(참된 생명)은 가진 것에 ‘만족’(자족)하는 생활(6절, 8절)을 통해 자신이 ‘돈’(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배 아래’(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있음을 증명해 간 사람들의 ‘몫’입니다(17절). 결국 ‘영원한 생명’(참된 생명)을 소망하는 이들은 “착한 일을 행하고, 좋은 일(선행)을 많이 행하며(풍부히 쌓고), 아낌없이 베풀고(관대함), 기꺼이 나누어 주는 삶”을 통해 자신들의 미래를 위한 든든한 기초를 쌓아갑니다(18절). 여기 언급된 자선, 선행, 관대함, 나눔은 오늘날 교회가 양극화에 시달리는 이 사회를 향해 요청하는 ‘분배의 정의’(사도 2:43~47), 즉 ‘하느님의 경제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돈’이 ‘신’(神)처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의 세상에서 사도 바울로의 권면처럼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로조차도 그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생활태도를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말씀할 정도였습니다(12절). 한마디로 ‘영원한 생명’(참된 생명)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통해 자신을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증명해 간 사람들의 ‘몫’입니다. 특히 ‘분배의 정의’(사도 2:43~47)가 그렇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바이지만 디모테오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해 따라야 할 위대한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3절). ‘자신의 몸’을 하느님과 인류의 ‘화해’를 위하여 기꺼이 ‘희생 제물’로 봉헌하시어 ‘평화의 기쁜 소식’이 되어주신 우리 구세주이십니다(에페 2:11~19). ‘성찬례’ 속에서 ‘빵과 포도주’를 ‘성령’을 통해 ‘당신의 몸으로 축성’하시고, ‘생명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나누어주시며’, 우리가 어떻게 ‘분배의 정의’를 실천해야 하는지 모든 ‘나눔의 기준’을 보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하여 ‘하느님 나라’를 일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워 나가야겠습니다(14절). 입술만이 아니라 몸으로 그 싸움을 훌륭히 살아내야 합니다. 그런 이들은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영원한 상급’을 얻을 것입니다.

복음이야기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전하는 《루가복음》입니다. ‘부자와 거지’, ‘부와 가난’에 대한 단호한 대비가 두드러집니다. 사실 ‘루가’는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을 통해 이미 이 주제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루가 6:20~26). 다른 <전례독서들>에서도 살폈듯이 ‘가난한 사람들’을 방치한 채 ‘혼자’만 쌓아올린 ‘부’(富)의 허망함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경제방식’을 ‘죽음의 세계’(스올, 하데스)에서 고통 받고 있는 ‘부자’를 통해 교훈합니다.

물론 교회사에서는 본문을 가지고 ‘천국과 지옥’ 교리 체계화 작업의 근거로 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후세계’(죽음의 세계) 대한 본문의 생생한 묘사는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은유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록 본문에 당시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던 ‘사후세계’에 대한 신앙이 다소 반영되어 있더라도 ‘천국과 지옥’ 교리로 나가는 것은 ‘루가’의 편집 의도에서 많이 빗나간 셈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은 ‘재물’을 의지하는 ‘부자들’을 향해 경고하는 다른 <전례독서들>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던 루가의 ‘재물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루가 12:13~21,33~34; 14:12~14,16~24; 16:19~31). 다시 말해 ‘루가’의 일관된 주제 중 하나인 ‘부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루가 14:33; 16:13; 18:22~25).

실제로 본문은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혹은 우리들)을 대상으로 연속해서 말씀을 해 오신 비유의 적절한 결론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현장에 있던 그들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비웃었다고 ‘루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루가 16:14). ‘루가’는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께서 최종적인 결단을 요구하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께서 지금껏 말씀해 오신(루가 15장의 잃어버린 양, 은전, 아들과 16장의 약삭빠른 청지기) ‘하느님 나라’ 앞에서 어떻게 결단할 것인지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고집 부리며 계속해서 그 나라 밖에 있을 것인지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루가’는 이 비유 바로 앞 단락에서 ‘율법과 하느님 나라’를 언급합니다(루가 16:16).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토록 목을 매온 ‘율법’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온전해지고,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했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져서 모두가 거기로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율법과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메시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아버지)이다’(루가 3:8)라고 말하면서도 ‘세례자 요한’이 증거 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를 거부했고, ‘예수님의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복음이야기의 후반부(27~31절)는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느님 나라에 ‘함께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그런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해 ‘루가’가 내리는 적절한 결론적 편집인 셈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가지고 ‘천국과 지옥’ 교리의 근거로 삼기 보다는 예수와 함께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도래 앞에서 우리가 가진 ‘돈과 재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교훈하시는 말씀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더욱이 성공회는 성찬례에서 ‘네 개’의 <전례독서>를 통해 말씀을 선포합니다. 연중시기 2독서는 계속독서이기에 간혹 다른 전례독서들과의 연결이 느슨할 때가 있더라도 최대한 다른 전례독서들과의 관련 속에서 ‘말씀 나눔’을 진행해야 합니다. 결국 오늘 복음이야기는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경제생활’, 즉 ‘사회적 약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분배의 정의’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사도 2:43~47). 우리의 돈과 재물을 가지고 지금 무슨 일을 하며 생활하고 있는지가 우리가 누구에게, 어느 나라에 속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결국 그 생활은 자신의 ‘든든한 미래’하고도 직결됩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 루가 16:19

이 짧은 몇 마디 묘사로 그가 얼마나 부자인지가 생생히 드러납니다. 요새는 옷차림만 가지고는 생활상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지만 고대에는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화사하고 값진 옷’으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자주색’ 옷과 ‘고운 모시’로 만든 옷을 뜻합니다. 일반인들은 평생토록 입기 어려운 채색된 옷이고 옷감입니다. 그는 1독서 ‘아모스’가 고발하던 부자들처럼, 날마다 사치스럽게 먹고 마시는 ‘호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반면에 ‘라자로’라는 가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그 부자집 ‘대문 옆’에 내던져진 ‘거지’였습니다. ‘내던져졌다’(공동번역 성서의 ‘들어다 놓은’은 너무 점잖은 표현입니다)는 것은 ‘내버려졌다’는 뜻입니다.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이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그의 피부는 ‘옷감’이 아니라 ‘종기’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이런 처지만으로도 가련한 사람인데 율법은 그를 ‘부정(不淨)한 사람’으로 선고했습니다.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기를 ‘열렬히 원했지만’ 지나는 개들과 경쟁해야 했습니다. 개들은 몰려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죽지 못해 겨우 살아가는 ‘불행한 인생’일 뿐 아니라 개들에게까지 ‘괴롭힘’과 ‘모욕’을 당하는 비참한 처지였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가장 불쌍한 인생의 대명사가 ‘라자로’입니다.

얼마 뒤에 그 ‘거지’(가난한 사람)가 죽었습니다. 그를 위해 애도해 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깁니다. 부자도 죽었습니다. 그를 위해 울어주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호화로운 장례식과 함께 바위를 파서 만든 굴에 그는 매장되었을 것입니다. ‘라자로’에게는 ‘묻혔다’는 말조차 없습니다. ‘거지’에게는 그 일마저도 사치라고 사람들이 여겼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 ‘거지’는 자신을 괴롭히고 모욕해 온 지긋지긋한 개들로부터 마침내 갈라졌습니다. 천사들과 합류하여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습니다.

호화로운 장례식과 함께 매장된 부자는 어디로 갔을까요? 부자는 ‘죽음의 세계’(개역개정은 ‘음부’로 번역)로 갔습니다.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흔히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듯이 부자는 ‘지옥’으로 갔고, 거지는 ‘천국’으로 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루가’는 부자가 ‘죽음의 세계’로 갔고,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다고 기록했습니다. 둘 다 죽긴 죽었는데 가 있는 곳이 다릅니다. ‘죽음의 세계’는 어디일까요?

구약성경은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예외 없이 가는 곳’인 ‘사후세계’를 ‘스올’이라고 표현합니다(시편 16:10). ‘스올’은 요구하다란 뜻의 ‘솨알’에서 왔는데, 죽은 사람을 한 곳으로 불러 모은 장소라는 뜻입니다. 일차적으로는 사람을 매장하는 ‘무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올’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the unseen world), ‘눈에 보이지 않는 거처’(the unseen place)로 ‘죽은 자들이 임시로 머무는 곳’입니다. 한마디로 ‘죽음의 세계’(the realm of the dead)인데 구약성경은 그 세계를 ‘누구도 돌아올 수 없는 어둡고 암울하고 적막한 곳’이라 묘사합니다(욥기 10:21,22; 시편 94:17; 115:17; 143:3). 죽고 나면, 즉 ‘스올’에 거하는 이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욥기 14:21; 전도 9:5). ‘무덤 속’에 매장된 ‘죽음의 상태’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떠오릅니다.

‘사후세계’를 표현하는 히브리어 ‘스올’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면서 가장 비슷하다고 옮긴 말이 본문에 ‘죽음의 세계’로 번역한 ‘하데스’(hadés)입니다. ‘하데스’는 ‘아니다’(not)라는 부정접두어 ‘하’(A)와 ‘보다’(see)라는 동사 ‘이데인’(idein)의 합성어로 단순히 ‘보이지 않는 거처’(the unseen place)라는 뜻입니다. ‘죽은 이들 모두가 임시로 머무는 세계’입니다. 문제는 ‘하데스’를 굳이 윤리적 가치를 부여하여 ‘지옥’[‘죽음’으로도 번역됨, 마태 16:18(죽음의 힘); 루가 16:23(죽음의 세계); 사도 2:27,31(죽음의 세계)]으로 잘못 번역해서 생긴 오해입니다(마태 11:23; 묵시 20:13~14;).

‘하데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불순종한 불신자들’이 최종적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는 그런 ‘최종적 지옥’이 아닙니다.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는 최종 결말의 ‘지옥’에 해당하는 단어는 ‘게헨나’(마르 9:43∼48)와 ‘불바다’(불과 유황의 바다, 불 못, lake of fire. 묵시 19:20; 20:10, 14~15)라는 별도의 단어가 신약성경에 있습니다. 참고로 마르코복음에서 ‘지옥’으로 번역한 ‘게헨나’는 ‘게 벤힌놈’(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왔습니다(열왕하 23:10). 어째서 그 골짜기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는 ‘최종적 지옥’을 뜻하게 되었는지 단어의 유래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유다 왕 ‘요시아’(BC 639-609년)가 종교개혁을 벌이기 전까지 백성들은 ‘벤힌놈’ 골짜기에 있는 ‘도벳’ 산당에서 ‘불의 신(神) 몰록’에게 자신의 아이들을 산 채로 제물로 바쳤습니다(예레 7:31~32). ‘요시아’가 그 산당을 무너뜨린 뒤에는(열왕하 23:10) 장례가 허용되지 않은 ‘부정한’ 시체(나병과 같은 부정한 질병으로 죽은 자, 부랑자, 처형당한 죄수, 반역자 등)나, 동물의 사체, 쓰레기 등을 태우는 ‘소각장’으로 쓰였습니다. 냄새는 물론 ‘시체’와 ‘쓰레기’를 태우는 불과 유황불이 항상 타올랐습니다. 특히 불에 타들어가는 ‘구더기들’은 저주받은 운명에 대한 생생하고 효과적인 시각적 이미지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당시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를 뜻하는 히브리어 ‘게 벤힌놈’과 그리스어 번역인 ‘게엔나’(영어식으로는 게헨나)는 죄인들이 벌 받는 영원한 저주의 장소(이사 66:24), 즉 ‘지옥’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벤허>에서는 ‘게엔나’ 남쪽 절벽에 나병환자 집단거주지가 있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곳이 나병에 걸린 유다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숨어살던 곳입니다.

이제 ‘불바다’를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묵시록은 ‘죽음’(그리스어로 ‘타나토스’)과 ‘지옥’(하데스)이 ‘불바다’(불못)에 던져지며, ‘생명의 책’에 ‘이름’이 올라 있지 않은 사람은 ‘불바다’에 던져졌다고 최종적인 영원한 심판을 말씀합니다(묵시 20:14~15). 이 ‘불바다’(불못)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사탄’(악마)과 타락한 천사들, ‘불순종한 불신자들’이 최종적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는 ‘최종적 지옥’입니다(묵시 20:10). 따라서 ‘하데스’(스올)는 ‘최종적 지옥’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은 이들이 마지막 부활과 심판을 기다리는 현재의 임시 거처’(중간 상태), 즉 ‘죽음의 세계’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따르면 ‘죽음의 세계’(하데스, 스올), 즉 사람이 죽었을 때 가는 ‘사후세계’는 크게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 얻을 자들이 최후 부활을 기다리며 현재 임시로 거하고 있는 ‘위로와 행복의 세계’(거처)입니다(묵시 20:11~15). 본문의 ‘라자로’가 인도를 받아 가 있는 ‘아브라함의 품’이나 십자가의 예수께서 강도에게 약속하신 ‘낙원’이 여기에 해당합니다(루가 23:42~43). 다른 하나는 본문의 부자처럼, 세상을 떠난 불신자들이 최후 심판이 있을 때까지 현재 임시로 거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불행과 저주의 세계’(거처)입니다. ‘죽음의 세계’(하데스, 스올)에 있는 이 두 영역은 ‘큰 구렁텅이’로 분리되고, 단절되어 있다고 ‘루가’는 기록했습니다(루가 16:26). 그리스도교파 중에는 이 ‘스올’(하데스), 즉 ‘중간 상태’를 가지고 영혼의 정화를 위한 장소인 ‘연옥’과 연결 짓는 이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나가면 복잡한 이야기가 되니 그치겠습니다.

‘죽음의 세계’가 ‘천국과 지옥’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려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본문에서 천국과 지옥 교리를 찾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고자 하셨던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예수님 비유의 주제는 대부분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전파하신 ‘하느님 나라’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이 연민에 찬 사랑으로 따뜻이 환영받고, 행복을 누린다는 사실입니다. ‘라자로’도 ‘아브라함’에게 영접을 받고, 보살핌을 받으며, 그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라자로’는 ‘위로와 행복의 상징’입니다. 반면에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부자는 ‘불행과 저주의 상징’입니다. 사실 사후세계에 가 있는 것으로 묘사된 ‘부자와 라자로’는 예수께서 ‘평지설교’에서 가르치신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표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이다… – 루가 6:20~26

이렇게 ‘하느님 나라’에서는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일상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라자로’와 ‘아브라함’이라는 특정 인물들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라자로는 히브리어 ‘엘레아자르’를 그리스어 식으로 표현한 줄임말로 ‘하느님이 도와주는 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끝까지 자기 정체성을 갖는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가난한 사람’입니다. 물론 ‘라자로’는 이름이 붙여지긴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수동적인 인물’입니다. 그가 아브라함 품에 안기기 위해서 지상에서 한 일 가운데 내세울만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지상에서 “불행이란 불행은 다 겪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사후세계에서 아브라함 품에 안겨있다는 묘사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 철저히 경고를 받습니다.

흥미롭게도 대화는 아브라함과 부자 사이에 이루어집니다.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던 부자는 “아브라함 할아버지”라고 소리를 지르며, 두 가지를 요청합니다. 하나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혀를 축이게 해 달라’는 애원이었습니다. 자비를 베풀지 않았던 사람이 자비를 간청하는 모순입니다. 여전히 ‘라자로’를 자신의 물 심부름꾼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지상에서의 삶을 회상시킵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응수합니다. 더군다나 아브라함은 ‘우리’와 ‘너희’를 구별하면서 그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어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거절합니다.

‘부자’는 자신의 처지가 바뀔 수 없음을 이해하고 세 번째 요청을 합니다. 놀랍게도 그는 지상에 있는 자기 형제들을 염려했습니다. 자기 아버지 집 형제들을 ‘경고’하기 위하여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자신처럼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형제들을 경고하는 데 ‘라자로’가 제격이라고 요청합니다. 웃깁니다. 그는 여전히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자신이 지상에서처럼 권세를 부릴 수 있는 줄 압니다. 자신이 ‘라자로’보다 위에 있고, 심부름꾼처럼 쓸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요청에 아브라함은 이렇게 응수합니다.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 루가 16:29

‘모세와 예언자들’은 《성경》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사후세계에서의 모든 일까지 이미 다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상에 있는 형제들은 《성경》을 통해 자신들이 ‘사후세계’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부자는 ‘그것’(성경)만으로는 안 된다고 호소합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찾아가야만 형제들이 회개할 것이라 호소합니다. 회개한다는 말은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삶으로 ‘설득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부자가 ‘라자로의 부활’을 언급하자 아브라함은 온 인류의 기쁜 소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언급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 루가 16:31

비유는 여기서 끝납니다. 좀 허탈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사후세계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은데 궁금증만을 남긴 채 끝납니다. 분명한 것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죽음의 세계’가 흔히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듯이 ‘천국과 지옥’ 교리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더욱이 ‘천국과 지옥’을 직접적으로 말하려는 의도로 ‘루가’가 이 비유를 편집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천국과 지옥’ 교리의 근거로 확정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런 ‘최종적 심판’의 결과로서 가게 되는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야기에서 부자와 아브라함은 ‘죽음의 세계’에서 ‘큰 구렁텅이’로 서로가 분리되어 있었음에도 여전히 의사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진짜 천국이고 지옥이라면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이 이야기는 죽은 다음에는 어떤 식으로든 ‘판정’이 따를 것임을 분명히 시사해 줍니다. ‘라자로’처럼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위로와 행복의 자리’로 가게 될 수도 있고, 부자처럼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당하는 ‘저주와 불행의 자리’로 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죽어가는 강도에게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루가 23:43)라고 하신 말씀과도 일치합니다. ‘낙원’은 ‘천국’ 자체라기보다는 ‘들어가기 위한 대기 장소’와 같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죽으면 당장 ‘천국과 지옥’으로 보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원한 거처에 대한 결정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집니다(1고린 15:23).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때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나고(1데살 4:16~17), 새로운 창조물로 변화되어 영원한 거처로 인도됩니다(1고린 15:51~53). 또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 살아남아 있는 이들도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1데살 4:17).

이렇게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직접적인 교리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이야기를 그런 교리 근거로만 좁게 보지 말고 《루가복음》의 맥락을 통해 보아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이야기는 ‘약삭빠른 청지기의 비유’ 다음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잘 들어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 루가 16:9b

주석가들은 이 구절이 예수님보다는 ‘루가’가 덧붙인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자들이 가진 ‘재물의 위험성’을 자주 경고하셨고(루가 12:13~21,33~34; 14:12~14,16~24; 16:19~31), 또 제자도로서 ‘재물 포기’를 요구하곤 하셨기 때문입니다(루가 14:33; 18:22~25).하지만 이 구절은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과 어긋나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이 구절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어긋나 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루가’는 분명 ‘세속의 재물’(불의한 맘몬)이 가진 ‘마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루가’는 재물이 가진 그 마력을 이기는 ‘힘’이 ‘자선’에 있음을 가르쳤습니다. 이 가르침은 예수님의 정신과도 일치합니다. 실제로 ‘루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자선’을 권장합니다(루가 11:41; 12:21,33a;18:22). 따라서 ‘루가’는 예수님의 비유처럼 우리가 가진 ‘현재의 자원’, 특히 ‘재물’을 사용하여 ‘영원한 집’(하느님 나라에서의 자리)을 계획할 필요가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재물’을 가지고 ‘영원의 집’이라는 개인의 종생 이후의 삶에도 관심을 기울이도록 초대합니다(루가 12:16~21; 16:19~31; 23:41~43).

유다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사람이 죽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추천서’가 필요합니다. 그 ‘추천서’는 지상에서부터 갖고 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추천서’는 우리 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져 있습니다. 그 ‘추천서’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가난한 이들’을 향해 행한 ‘자선’입니다. 지상 생애를 끝내고 ‘하늘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우리 보다 앞서 ‘하늘나라’에 들어간 ‘가난한 이들’이 우리를 ‘위하여’ 천사 앞에서 증언합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 올만한 ‘자격’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상에서는 우리가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하늘 문’ 앞에서는 우리가 그들에게 도움을 받는 셈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추천서’인 그들이 우리가 ‘하늘 문’을 통과해 들어오도록 손을 내민다는 전승입니다.

만일 ‘부자’가 거지요, 장애인이요, 피부병 환자였던 ‘라자로’를 위해 조금이라도 ‘자선’을 행했다면, 라자로는 아브라함 할아버지에게 부자가 받는 고통을 덜어달라고 요청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부자’는 지상을 사는 동안 오로지 자신의 ‘향락’에만 심취했고 ‘사회적 약자’인 ‘라자로’에게는 ‘인색’하고 ‘무정’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갈수록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어 가는 이 세상과 오늘 복음이야기는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다시 말해 도저히 그 ‘큰 구렁텅이’(간극)를 매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고, 빈부격차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결책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우리 사회와 오늘 복음이야기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1디모 6:14).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음을 믿습니다(2디모 1:10). 모든 ‘차별’과 ‘간극’을 ‘십자가’로 없애고 ‘부활’하시어 ‘불멸의 생명’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2디모 1:10).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영원토록 분리하시어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에페 2:16). 십자가와 부활로 인류를 화해시키시고 하나의 새 민족(에페 2:14~15), 하느님 나라의 한 시민, 한 가족으로(에페 2:19) 만드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영인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 ‘나눔과 겸손’을 실천하는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께 온전히 순종한다면 그 힘과 용기로 현재의 ‘큰 구렁텅이’, 즉 ‘폭력적인 경제 질서’를 끝내고 서로 함께 살아가는 ‘분배의 정의’(사도 2:43~47)를 이 땅에 꽃 피울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온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느님이 정하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나타나실 것입니다(1디모 6:15). 그 날 우리는 ‘불멸과 불사의 옷’을 입고 ‘영원한 나라’를 차지하러 들어갈 것을 믿습니다(1고린 15:52~54).

부자들처럼 자신의 ‘재물’을 ‘자기 이익과 쾌락’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영원한 집’, 즉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한 ‘수단’으로 ‘지혜롭게 사용’하십시오. 지금 자신이 가진 ‘현재의 자원’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 가십시오. 지금 자신이 가진 ‘현재의 자원’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관심을 가지셨던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의 손을 잡으십시오.

오늘날 ‘신앙’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개인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결코 개인적 차원의 일일 수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난’도 개인적 차원의 불행일 수만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에서 ‘불행을 겪는 가난한 사람들’과 끊임없이 자신을 ‘동일시’해 오셨습니다(시편 146:7~9). 고아와 과부로 대변되는 가난한 사람들을 ‘편애’하시며, 그들을 통해 당신을 보라고 예언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호소해 오셨습니다(신명 10:18; 24:11~15,17~22; 마태 25:31~46).

하느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눈, 즉 ‘공공(公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사유화’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도 ‘부’(富)를 독점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우리 시대 가난의 문제는 ‘사적’(私的) 영역이 아니라 ‘공적’(公的) 영역입니다. 부자의 ‘대문 옆’에 내버려져도 좋은 ‘이웃’은 없습니다. ‘큰 구렁텅이’로 분리되고, 단절되어 고통 속에 남겨져 있도록 내버려 두어도 좋은 ‘이웃’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야할 ‘하느님 나라의 한 식구들’입니다.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하느님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생활이며, 세속에 물들지 않은 신앙생활”입니다(야고 1:27).

정말이지 ‘교회’는 ‘부와 권력’이 아니라 하느님께 ‘희망’을 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분배의 정의’라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실천하는 하느님 나라의 전초기지입니다(사도 2:43~47). 그런 세상을 만드는 모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라자로’ 같은 우리에게 한없는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께서는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지금 여기서’부터 당신의 나라에 살게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몸소 우리를 위해 ‘분배의 정의’를 보여주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수행하기 위해 세상에 파송되는 우리입니다. 부디 우리도 ‘가난한 사람들을 편애’하시는 하느님 편에 서서 ‘분배의 정의’를 실천하는 ‘하느님 나라의 일꾼’으로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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