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29.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들. 대한성공회 설립기념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26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그대야말로 하느님의 ‘천사’임을 복음전파를 통해 드러내시오”입니다. 오늘은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들’을 기념하는 ‘주요축일’이자 ‘대한성공회 설립 129주년 기념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명령을 수행’하여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모든 천사들’을 기념합니다. ‘하느님 나라 복음 선교’를 위해 성령의 권능으로 이 땅에 파송되어 ‘천사’처럼 헌신한 선교사들의 기도와 노고를 기억합니다. 그들 뿐 아니라 우리 역시 ‘하느님 나라 복음’을 위하여 살도록 파송된 ‘선교의 일꾼’임을 재확인합니다. 이 땅에 성공회를 세우신 하느님의 목적에 맞게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선교의 열정’으로 불타오르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영원히 살아계신 하느님, 천사와 인간들에게 거룩한 직분을 정하시고 행할 임무를 맡기셨나이다. 구하오니,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거룩한 천사들이 항상 하늘에서 주님을 섬기고 경배하듯 이 땅에서도 우리를 돕고 보호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28:10-17
  • 시편 – 103:19-22
  • 2독서 – 묵시 12:7-12
  • 복음서 – 요한 1:47-51

연중 26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그대야말로 하느님의 ‘천사’임을 복음전파를 통해 드러내시오”입니다.

연중 26주일인 오늘은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들’을 기념하는 ‘주요축일’이기도 합니다. 한국성공회는 ‘주요축일’을 연중주일보다 우선하여 기념합니다. 전례독서들도 그동안 배정해 온 차례에서 벗어나 축일에 어울리는 본문에서 배정합니다. 또한 오늘은 우리 성공회 신자들에게는 뜻깊은 기념일입니다. 1890년 9월 29일 인천 제물포항에 ‘존 코프’(Charles John Corfe, 한국명 고요한) 주교가 당도하여 ‘조선 성공회’ 선교의 첫 발을 내딛은 날입니다. 사람도, 공기도, 물도, 산도, 빛도 설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인 ‘조선’(朝鮮)에 성공회 방식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겸손히 무릎을 꿇고 이 땅에 입을 맞춘 날입니다. 우리는 이 복된 날을 성공회 선교가 이 땅에 시작된 ‘대한성공회 설립기념일’로 지킵니다. 한마디로 ‘since 1890’입니다. 이렇게 주요축일과 기념일이 포개진 오늘입니다.

성찬례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명령을 수행’하여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모든 천사들’을 기념합니다. ‘하느님 나라 복음 선교’를 위해 성령의 권능으로 이 땅에 파송되어 ‘천사’처럼 헌신한 선교사들의 기도와 노고를 기억합니다. 그들 뿐 아니라 우리 역시 ‘하느님 나라 복음’을 위하여 살도록 파송된 ‘선교의 일꾼’임을 재확인합니다. 이 땅에 성공회를 세우신 하느님의 목적에 맞게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선교의 열정’으로 불타올라야 함을 재확인합니다. 주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이 땅에 세워진 ‘사랑의 공동체’들을 통해 더욱 빛나야 함을 다짐합니다. 하나이요,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온 공교회인 우리 ‘성공회’가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하느님의 집, 쉼을 주는 십자가 나무’임을 드러내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그런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1독서 《창세기》는 사기꾼이자 도망자 ‘야곱’이 꿈에 본 ‘땅에서 하늘까지 닿는 층계’ 이야기입니다. “층계가 땅에서 하늘까지 닿았다”는 것은 ‘하늘이 열렸고’, ‘땅과 하늘이 이어져 하나’가 되었다는 은유입니다. 고대인의 세계관에 따르면, 지상의 어떤 곳은 ‘신성’(神聖)합니다. ‘신’(神)이 ‘현현’(顯現)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천사’(天使)들은 바로 이곳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신의 명령’을 수행하거나 세상을 감시합니다. 이처럼 야곱이 누워 잠든 곳은 속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거주지인 하늘과 이어진 ‘성소’(聖所)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봅니다. 하늘의 역사, 즉 천사들의 활동을 눈으로 직접 보는 소수의 특별한 사람이 되는 순간입니다.

바로 그때, 하느님이 야곱의 옆에 나타나십니다. 하느님은 야곱이 약속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 축복하십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즉 땅과 후손과 축복의 약속을 되풀이하십니다. 집을 떠나기 전 ‘이사악’으로부터 받은 축복의 확인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은 다른 차원에서 보자면, 야곱이 ‘소명’(召命)을 받는 장면입니다. 이 소명은 자기존재에 대한 수치심과 열등감으로 살아온 사기꾼 야곱을 한순간에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깨달았습니다. 이 험한 세상에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진실을 말입니다. 자기 삶에 ‘진정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과거의 자아가 사라지고 새로운 자아로 부활했습니다.

동시에 이 ‘소명 체험’은 뭔가 ‘숭고한 감정’, 즉 ‘두려움’을 그에게 불러일으켰습니다. 자신이 누워 있는 곳에 대한 발견 때문입니다. 사실, ‘새로운 영적 삶의 단계’로 진입하는 모든 기반에는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대한 재인식’이 자리합니다. 그곳에 하느님이 현존하심을 깨닫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이렇게 외칩니다.

참말 야훼께서 여기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 문이로구나. – 창세 28:16-17

이전까지 그는 ‘하느님’을 자기 아버지가 살던 곳에만 거주하는 ‘부족 신’(神)으로 알았습니다. 자신이 있는 그곳에 현존하실 줄은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분명 거기서 하느님을 만나리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을 만날 것을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형, ‘에사오’로부터 달아나는 일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가야할 곳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그의 이런 자아도취적 세계에 놀라운 방법으로 개입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찾지 않았는데도 그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을 향해서는 자신의 세계를 ‘닫아’놓았는데도 하느님은 그에게 자신의 세계를 ‘열어’ 보이셨습니다. 순전히 ‘은혜’였습니다.

1독서 본문은 여기까지만 배정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베고 자던 돌을 세워 ‘석상’, 즉 ‘기념비’로 삼습니다. 석상의 꼭대기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히브리어로 ‘베델’(בית אל 하느님의 집), 즉 “하느님이 계신 곳”이라 명명합니다. 야곱은 이제 어제까지의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층계’의 첫 번째 칸에 ‘첫 걸음’을 올려놓습니다. 지금까지 남의 눈치만 보며 2인자로 살아온 인생이 ‘하느님과 동행’하는 ‘새 출발’을 시작합니다.

《시편》은 다윗이 지은 <103편>의 마지막 단락을 배정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와 ‘은혜’를 기리면서 찬미하는 ‘감사 시’(詩)입니다. 시인(詩人)은 자신과 그들 역사에 베풀어진 하느님 ‘사랑’(자비와 은혜)의 ‘영원성’을 찬미합니다(1~13절). 억눌린 이들을 향한 하느님 ‘사랑’(자비와 은혜)의 ‘보편성’을 찬미합니다(1~13절). 다음으로 ‘인생들의 무상함’을 경고합니다(14~16절). 이 ‘무상(無常)함’에 비교하여 하느님 ‘사랑’(자비와 은혜)의 ‘영원성’과 ‘보편성’을 다시금 찬미합니다(14~17절). 본문은 여기에 이어지는 마지막 부분입니다. 시인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와 ‘은혜’를 찬미하도록 ‘천사들’과 모든 ‘피조물’을 소환합니다. 무엇을 말씀하려고 이 본문이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들’ 축일에 <전례독서>로 배정되었는지는 아래에서 ‘천사의 직무’를 다룰 때 말씀 드리겠습니다.

2독서 《요한묵시록》은 ‘대천사 미카엘’과 ‘큰 용’의 형상을 한 ‘사탄’ 사이에 있었던 ‘하늘 전투’입니다. 축일에 맞게 천사의 거룩한 ‘직무’가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미가엘’은 인류를 ‘무고’(誣告)하던 ‘큰 용’(악마, 사탄, 늙은 뱀)을 이기고 ‘하늘’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마’와 그 졸개들이 이 세상에서 여전히 활동하면서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야기 《요한복음》은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만남’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가장 소중한 ‘보화’로 발견한 이들은 한결같이 ‘신앙고백’으로 자신의 ‘찾음’을 마무리합니다(요한 1:36,39,41,45,49). 그런 다음에는 ‘절친한 친구’에게 다가가 자신이 발견한 그 ‘보화’를 체험하도록 초대합니다(요한 1:41,45). ‘초대 방식’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와서 보라”입니다(요한 1:39,46).

‘필립보’와 ‘나타나엘’ 사이에 있었던 ‘초대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필립보의 초대에 부정적이었지만 나타나엘은 결국 그의 초대에 응합니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타나엘은 그 초대로 인해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바뀔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 – 요한 1:47

예수님은 나타나엘을 한 눈에 꿰뚫어 보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사람을 찾고 계시며 기뻐하시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직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나타나엘’은 1독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사기꾼 ‘야곱’과 너무나 비교됩니다. 야곱은 자신의 이름처럼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복’을 가로챈 ‘부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창세 27:18~29). 자신의 속임수가 형에게 발각되어 도망가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창세 27:32~36,41~45; 28:5). ‘나타나엘’은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지 묻습니다.

필립보가 너를 찾아가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 – 요한 1:48

전부터 ‘나타나엘’을 보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그 대답 앞에서 그는 모든 경계를 풀고 맙니다. 마치 자신의 깊은 속내를 들키기라도 한 듯 즉시 옷매무새와 마음가짐을 정돈합니다. 도대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그런 것일까요?

세계 거의 모든 종교에는 ‘성스러운 나무’라는 상징이 있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주기적’(週期的)으로 ‘생명의 순환’이라는 ‘우주의 속성을 재현 한다’고 고대인들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나무’는 ‘재생과 풍요’를 넘어 하늘, 땅, 지하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우주의 중심축’(우주목), ‘신’(神)이 세속과 접하는 ‘매개’, 성스러움이 내려오는 ‘통로’로 발전합니다. 따라서 ‘나무’ 또는 ‘나무 아래’는 중요한 상징을 갖습니다.

가령 도교(道敎)는 ‘복숭아나무’를 ‘이상향’(理想鄕), ‘선계’(仙界)의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불교(佛敎)는 ‘보리수나무’를 ‘붓다’의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어떻습니까? ‘원죄’의 빌미가 되었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무화과나무’(일부 고대 랍비들은 아담과 이브가 금지된 무화과나무를 먹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창세기》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세 2:9), 즉 지식의 나무라고 말합니다), ‘포도나무’, ‘종려나무’를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특히 십자가(十字架)를 ‘십자가 나무’라고 부르며 경배합니다. 언제 그렇게 하냐고요? 성주간 전례 중 성금요일 구주수난 예식에서 ‘십자가’를 높이 들면서 사제가 이렇게 초대합니다.

구세주께서 달리신 십자가 나무를 보라.

그 ‘십자가 나무’는 ‘구원’을 상징합니다. 초대교회 교부였던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에도, 그의 회심의 계기가 된 장소가 ‘무화과나무 아래’였다고 전해집니다.

우리 문화는 어떻습니까? ‘단군신화’에는 ‘신단수’(神壇樹)가 등장합니다.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지상으로 처음 강림한 나무가 ‘신단수’(神壇樹)입니다. 또 과거에는 마을 어귀마다 나무로 만든 ‘장승’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과 근대화에 밀려 요즘은 보기가 쉽지 않지만, 한 때는 신목(神木), 신수(神樹)라 불리는 ‘당산(堂山)나무’를 마을마다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조상들에게 ‘신단수’(神壇樹)나 ‘당산(堂山)나무’는 ‘성스러움의 통로’였던 셈입니다. 이처럼 ‘나무’, 또는 ‘나무 아래가 갖는 상징’은 ‘이상향’(理想鄕), ‘깨달음’, ‘구원’, ‘성스러움의 통로’입니다.

복음이야기로 돌아가서 “무화과나무 아래”에 좀 더 집중해 봅니다. 이스라엘에서 잎이 가장 크고 그늘을 짙게 잘 만드는 나무는 단연 ‘무화과나무’입니다. 또 무화과는 익어가면서 달콤한 향내를 풍깁니다. 유대인들은 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합니다. 그 아래에서 ‘율법을 공부’하거나 ‘기도’를 하였습니다. 특히 랍비 문헌에는 “율법을 전심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간사하지 않은 사람이다”라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따라서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구절은 그가 《시편 1》에서 노래하듯이 ‘율법’(성경)을 ‘연구’하고 ‘되새기며’, 그 ‘깨달음’대로 ‘정의롭게 살고자 노력해 왔다’는 뜻입니다. 특히 ‘메시아’가 가져올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기를 ‘기도’해 왔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그는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하는 어떤 신비체험’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의 ‘기도’ 중에 체험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나타나엘에게 있어서 “무화과나무 아래”는, 1독서 《창세기》의 야곱처럼, 거룩하신 하느님을 만나는 ‘하느님의 집’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무화과나무 아래”는 ‘나타나엘’의 속마음이 하느님을 만나는 ‘성전’과 같은 ‘성소’(聖所)였습니다.

예수님은 나타나엘의 이러한 ‘속마음’가 그의 ‘삶의 태도’를 단박에 알아보셨습니다. “네가 율법을 통해 연구하고 깨달으며 기다리던 그 메시아가 바로 나요, 네가 전심으로 기대하고 기다리던 그 하느님의 나라가 이제 나를 통해 시작되었다”라고 답변하신 셈입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간절한 염원과 깨달음과 갈망을 한 눈에 알아보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그는 압도당하고 맙니다. ‘나타나엘’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 요한 1:49

이제야 예수님에 대한 ‘진짜 앎’이 시작된 그에게 예수님은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밝혀주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는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요한 1:51

이 말씀은 듣는 이들에게 1독서 《창세기》의 ‘야곱의 꿈’을 생각나게 만들었습니다. 꿈에 야곱은 “땅에서 하늘에 닿는”(하늘이 열렸다는 뜻) ‘층계’를[종교학에서는 이 층계를 ‘우주목’ 또는 ‘신수’(神樹)의 상징으로 봅니다.] ‘오르내리는 천사들’을 봅니다. 놀라는 그의 옆에 하느님이 나타나 ‘복’을 약속하십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그의 삶에 개입하시어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도망자 야곱의 생애가 돌연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꿈에서 깨어난 야곱은 베고 자던 돌을 세워 ‘석상’을 삼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어 ‘베델’(하느님의 집)이라 명명하며, 하느님께 세 가지를 ‘서약’합니다(창세 28:21~22).

예수님은 ‘야곱의 꿈’ 이야기를 가져다 그 만남의 자리에 있던 그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본 것(깨달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느님의 위대한 역사를 ‘나타나엘’(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따르는 이들)도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어제까지의 자기 그 이상의 존재가 되는 길이 예수를 통해 그들에게 펼쳐질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사는 새로운 공동체가 되는 길이 예수님을 통해 그들에게 열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잘 들어두어라”(원문에는 ‘아멘’으로 시작됨)로 시작하실 정도로 이 약속을 확실히 ‘보증’하십니다.

다음으로 “하늘이 열렸다”는 뜻은 “무화과나무 아래”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나타나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는 일종의 ‘성소’(聖所) 같은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늘과 땅을 잇는 새 베델’, ‘참된 성전’이신 분이 앞에 계시기에 ‘나타나엘’은 더 이상 ‘무화과나무 아래’를 찾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그리스도)로 따르는 이들, 더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 나무 아래’로 나오는 이들은 ‘야곱’ 같은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나타나엘’ 뿐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우리에게도 주시는 ‘약속’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야말로 ‘하느님과 소통하는 성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은 다른 장소나 시간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정해진 시간’에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성전 기득권 세력들은 하느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통하여서만 백성들을 만나신다고 제한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파괴되었고 후에 ‘재건된 성전’이나 ‘증축된 성전’도 더 이상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진짜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원형’ 앞에서 ‘모형’(그림자) 노릇하던 지상의 성전은 사라져야 합니다(마태 24:1∼2).

“상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시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543

《요한복음》 기자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성육신’하신 ‘참된 성전’이 나타났다고 증언합니다(요한 2:19~22). 그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을 ‘임마누엘’(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라 부르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은 사라졌습니다. 하느님은 성전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들과 항상 함께 하십니다.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모든 인류는 하느님과 영원토록 연결됩니다.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교제는 구체화됩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엘’에게 하신 약속은 참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 나무’를 통해 이루실 ‘구원’ 역사에 대한 암시입니다. 그 ‘십자가 나무 아래’ 있는 이들, ‘예수’라는 ‘성전 안에’ 있는 이들이 누리게 될 ‘영광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로에 따르면 전혀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 1고린 6:19

우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셨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도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축복은 너무나 놀랍습니다. 본래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우리는 하느님(하느님의 뜻, 말씀)을 무시하고 내 뜻, 내 욕심만 고집하며 살던 이들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삶을 ‘죄’라고 가르칩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1독서 《창세기》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믿음’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집’이 되는 ‘존재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령의 강림과 내주하심’을 통해서 말입니다.

여기까지가 <전례독서>의 내용풀이입니다.

이제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들’ 축일에 이들 <전례독서>가 배정된 이유를 설명할 차례입니다. 함께 살펴 본 것처럼, <전례독서들>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천사’(天使) 이야기가 공통으로 등장합니다. 그동안 들어 온 <전례독서들>을 떠올려 보아도 4개 본문 모두에 ‘천사’(天使)가 언급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문득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천사’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아니 여러분은 ‘천사’의 존재를 믿으십니까? ‘천사’를 보신 적은 있으십니까? 우리는 ‘천사’라는 말을 들으면 그림을 많이 보아서인지 ‘날개 달린’ 모습의 ‘통통한 어린이’나 ‘빛나는 옷’을 입은 ‘멋스럽고 아름다운’ 자태의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주변에 사는 ‘마음씨 고운 이웃’을 떠올립니다. 사랑에 빠진 청년은 아마도 자기 ‘애인’을 ‘천사’라고 부를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사랑받고 사랑할 때는 상대방이 천사처럼 보이는 법입니다. 《성경》은 어떻게 말씀할까요?

1독서 《창세기》에서 ‘천사’(天使)로 번역한 히브리어 ‘말아크’(מַלְאָך)는 문자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메신저’(messenger), ‘사자’(使者), ‘심부름꾼’, ‘전령’(傳令)이라는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보냄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천사’(天使)는 흔히 생각하듯이 날개달린 모습이나 비물질적인 영적 존재라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역할’(직무, 임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주신 ‘특정 직무’(소임)를 수행하기 위해 파송되는 존재를 부르는 명칭이 ‘천사’(天使)입니다. 조선시대 역사기록에 따르면 명나라에 보낸 사신을 ‘천사’(天使)라고 했습니다.

‘천사’들은 ‘언제’ 창조되었을까요? 아쉽게도 모든 것의 ‘기원’(起源)을 알려주는 《창세기》 조차도 침묵합니다. 다만 우리는 천사들이 ‘하느님의 피조물’이고, ‘물리적 세상 이전’(또는 세상과 인간의 창조 그 사이)에 창조되었음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참고, 이사 14:12~17; 에제 29:11~19). 《욥기》에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새벽별들이 떨쳐 나와 노래를 부르고 하늘의 천사들이 합창을 불렀다”(욥기 38:7)라고 가르치면서 ‘천사가 인간보다 먼저 창조’되었음을 말씀합니다. 또 《창세기》에는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이때 이미 타락한 천사인 ‘사탄’은 뱀 뒤에 숨어 있습니다)과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는 ‘거룹들’(그루빔=케르빔 Cherubim)이 언급됩니다(창세 3:17; 24). 이 말씀들에 따르면, 천사들은 분명 인간보다 ‘먼저 창조된 영적 존재’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천사들의 ‘본성’이나 ‘기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천사’(天使)란 말이 가리키는 ‘직무’(소임, 역할)입니다.

오늘 《시편》도 천사들의 ‘직무’(소임, 역할)를 들려줍니다. ‘시인’(詩人)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를 찬미하도록 ‘천사들’과 ‘모든 피조물’을 소환합니다. 천사들은 “하늘에 옥좌를 차리시고 온 누리를 다스리시는” ‘임금이신 하느님을 섬기며 찬미’하는 “하늘 궁전의 신하들”입니다(19, 21절). 그들은 “하느님 말씀과 뜻을 전하고 수행”하는 특별한 ‘심부름꾼들’(종들, 일꾼, 전령)입니다(20절). 다시 말해 ‘특별 임무’를 맡은 하느님의 ‘대리인’(사자, 중재자, 거룩한 이들, 하느님의 아들들)으로 인간과 교류하는 ‘영적 존재’입니다(창세 16:7~11,13; 19:1~22; 22:11; 31:11,13; 출애 3:2; 23:20~23; 민수 22:22~35; 판관 2:1; 6:12; 13:3; 시편 104:4; 욥기 1:6; 말라 3:1). 그들은 하느님의 ‘옥좌’를 둘러서 지키는 힘찬 ‘천군’(영적 군대들, 하늘의 권세들, 만군)입니다(21절, 열왕상 22:19; 호세 12:6; 아모스 3:13).

게다가 구약성경에 따르면, <성가 23장>으로 찬미하듯이, ‘거룹들’(그루빔=케르빔 Cherubim, 창세 3:24; 이사 37:16; 에제 10:10~14; 참고: 히브 9:5)과 ‘스랍들’(스라빔=세라핌 Seraphim, 이사 6:2) 같은 특별한 단위의 천사들도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그들의 이름’까지 똑똑히 아는 ‘천사’가 있습니다.

먼저 좋은 소식과 축복과 위로를 전하는 천사 ‘가브리엘’을 압니다(다니 8:16~17; 9:21). ‘가브리엘’은 ‘하느님은 강하시다’는 뜻입니다. 또 이스라엘 수호천사이자 ‘용’의 형상을 한 ‘사탄’과 싸우는 ‘하늘 군대의 지휘자’인 천사 ‘미가엘’을 압니다(다니 10:13~21; 12:1). ‘미가엘’은 ‘하느님과 같은 자는 누구인가?’라는 뜻입니다. 교회력으로는 ‘미카엘’이라고 표기하지만 <공동번역성경>에는 ‘미가엘’로 표기했습니다. 또 ‘외경’(外經)에 속하는 《토비트》를 읽어본 분들은 천사 ‘라파엘’을 압니다(토비 3:17; 5:4). ‘라파엘’은 ‘하느님이 치유하셨다’는 뜻입니다.

비록 《토비트》가 ‘외경’(外經)에 속하고, 주전 200년경에 쓰인 일종의 ‘소설’이지만, 천사 ‘라파엘’ 이야기가 다른 천사들에 비해 감동스럽게 펼쳐집니다. ‘라파엘’은 기도하는 두 사람 ‘토비트와 사라’(둘은 나중에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가 됩니다)의 고민을 풀어주기 위해 하느님이 파송하신 ‘천사’(메신저)입니다(토비 3:16~17; 12:12~15,18,20). 지상에 파견된 ‘라파엘’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아자리아’라는 이름으로 행세합니다. 그는 토비트의 아들 ‘토비아’가 ‘메대’까지 안전하게 다녀오는 ‘길동무’가 됩니다(토비 5:4~17). ‘메대’는 오늘날의 ‘이란’ 북서부에 자리한 고대국가 ‘메디아’를 말합니다. ‘바빌론제국’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 ‘고레스’가 바로 이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입니다(역대하 36:22~23). 이렇게 역사적 지명이 나오긴 하지만 《토비트》는 역사서가 아니라 ‘교훈’을 위한 일종의 ‘지혜문학’입니다.

‘아자리아’(라파엘)는 ‘불운한 사라’를 괴롭혀 온 귀신 ‘아스모데오’를 토비아가 퇴치하여 아내로 맞이하게 합니다(토비 6:7~9,16~18; 8:1~3). 여정을 끝내고 안전하게 귀향한 ‘아자리아’(라파엘)는 토비아의 아버지 ‘토비트’의 시력이 치유될 수 있게 해 줍니다(토비 11:4,7~13). 하느님이 맡기신 모든 ‘직무’(소임, 역할)를 완수한 ‘아자리아’(라파엘)는 마침내 자신의 정체가 “영광스러운 주님을 시중드는 일곱 천사 중의 하나인 라파엘”이라고 밝힙니다. 그런 다음 자신을 파견한 하느님께로 올라갑니다(토비 12:11~20).

《토비트》는 성공회가 교리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 ‘외경’(外經)에 속하는 책이지만 여러 ‘교훈’(특히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종, 자선, 부모공경, 기도와 단식, 결혼생활, 죽은 이에 대한 존중)을 얻을 수 있으니 한번쯤 《토비트》를 꼭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강조하는 이유는 그런 교훈들 외에도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과 ‘부활논쟁’을 벌이며 예로 든 ‘7형제를 남편으로 두었던 불운한 여인’(마태 22:23~32)이 《토비트》에 등장하는 ‘사라’의 ‘판박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개인적인 이름을 아는 천사들이 있지만 오늘은 특별히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들’ 축일입니다. 《성경》은 ‘미카엘’에게만 ‘대천사’(大天使 Archangel)라는 명칭을 붙입니다(유다 1:9). 그리스어로 ‘아크(arch)는 ‘첫째의’(first), ‘우선하는’(primary), ‘가장 높은’(highest)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교회 전통에서는 ‘가브리엘’, ‘라파엘’, ‘미카엘’도 ‘대천사’라고 불러왔습니다. 그 외에도 ‘외경’(外經)인 《토비트》에서 밝히듯이 ‘일곱 대천사’(토비 12:15)를 기념하는 전통도 있으며, ‘위경’(僞經)인 에녹서(Book of Enoch)에 나오는 ‘우리엘’(Uriel)을 ‘대천사’로 부르는 교회 전통도 있습니다.

전통이 다소 차이가 나더라도 분명히 지적할 점이 있습니다. ‘천사’(天使)라고 번역한 ‘말아크’는 하느님을 모시는 영적 존재만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의 ‘전령’(傳令, 메신저)인 예언자, 하느님의 말씀을 ‘심부름’하는 ‘인간’(특사)에게도 적용되었다는 점입니다(하깨 1:13).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천사들’은 하느님과 인간을 중재하는 ‘심부름꾼’(메신저)으로 사람을 처벌하기도 하고, 인도하기도 하며, 보호하기도 합니다(창세 19:1~22; 24:7, 민수 22:22~35; 시편 91:11). 천사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하늘 궁전의 신하들’이자, ‘용’의 형상을 한 ‘사탄’과 그 졸개들과 싸우는 ‘하늘의 군대’입니다. 때로는 ‘하느님’을 대신하는 ‘발현’이라고 믿어지기도 했습니다(창세 16:10, 출애 3:2).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런 천사 사상은 신약성경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신약성경에서 ‘천사’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앙겔로스’(Άγγελος)입니다. 영어 ‘에인젤’(angel)도 여기서 왔습니다. 그리스어로 ‘앙겔리아’(αγγέλια)는 ‘소식’(message)이라는 말인데 ‘앙겔로스’(Άγγελος)는 ‘소식’(기별)을 전달하기 위해 보냄 받은 ‘메신저’(messenger), 즉 ‘사자’(使者), ‘심부름꾼’, ‘전령’(傳令)이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복음’(福音, 기쁜 소식, Good News)으로 번역한 그리스어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은 ‘좋은’, ‘기쁜’, ‘반가운’의 뜻을 갖는 ‘유’(εὐ)와 ‘소식’(기별)을 뜻하는 ‘앙겔리아’(αγγέλια)의 합성어입니다. 특히 <복음서>는 ‘천사’의 ‘직무’를 왕의 ‘시종’, ‘대리자’, ‘군대’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곳곳에서 묘사합니다. ‘천사 이야기’로 시작하는 <마태오>와 <루가복음>도 이것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주의 천사’는 ‘메신저’(전령, 심부름꾼)입니다. 요셉에게 ‘할 일을 알리기’ 위해 ‘천사’는 꿈에 나타납니다(마태 1:20; 2:13,19,22). 나중에 ‘주의 천사’는 무덤의 돌을 굴려내고 여인들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알리는 ‘메신저’(전령, 심부름꾼)로 다시 나타납니다(마태 28:2~7). 천사들은 악마의 시험을 이기신 왕이신 예수님께 ‘시중’을 드는 ‘종들’입니다(마태 4:11; 참고 마르 1:13). 세상 끝날 ‘만왕의 왕’이신 예수께서는 천사들을 거느리고 재림하시어 구원 얻을 자를 추려내는 ‘대리자’로 쓰실 것입니다(마태 13:39,41,49; 16:27; 24:31; 25:31). 예수님은 사두가이파 사람들과의 부활논쟁에서 천사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죽지도 않는다고 가르쳐주십니다(마태 22:30). 따라서 ‘생로병사’ 하는 인간과 달리 천사의 숫자는 늘거나 줄지 않는다고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천사들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마태 28:2), 예수님의 지휘를 받는 ‘군대’입니다(마태 26:53).

《루가복음》은 천사의 ‘직무’를 어떻게 증언합니까? 하느님을 모시는 ‘시종 가브리엘’ 천사는 ‘즈가리야’와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하러 방문한 ‘메신저’(전령, 심부름꾼))입니다(루가 1:11,13,26~38). 목자들에게 구세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알리러 방문한 ‘메신저’(전령, 심부름꾼)도 천사입니다(루가 2:9~10). 수많은 ‘하늘의 군대’와 ‘천사’는 구세주 탄생의 기쁨에 젖어 함께 이렇게 하느님을 찬양합니다(루가 2:13).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 루가 2:14

<공동번역>에는 생략되었지만 어떤 사본에는 천사들이 ‘올리브산’(게쎄마네아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힘을 북돋아 드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개역개정, 루가 22:43~44). 또한 천사들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알리는 ‘메신저’(전령, 심부름꾼)입니다(루가 24:23). 여기까지가 《루가복음》을 통해 알 수 있는 천사들의 ‘직무’(소임, 역할)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를 전하는 《요한복음》은 어떻습니까? 천사들은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며 ‘메시지’를 전달”하는 ‘전령’(messenger, 심부름꾼)입니다(요한 1:51). 천사들은 ‘생명의 왕’이신 예수를 모시는 ‘시종’ 역할을 합니다(요한 20:12~13). 2독서 《요한묵시록》은 사탄인 ‘용’과 그 부하들을 무찌르는 천사 미가엘과 부하 천사들을 ‘하늘의 군대’라 전합니다(묵시 12:7; 참고 유다 1:9). 이 외에도 신약성경에는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돕는 ‘천사’와 재림 때 주님이 거느리고 오실 ‘천사들’에 대한 언급들이 곳곳에 등장합니다(사도 5:19; 8:26; 10:3~7; 12:7~11; 27:23~24; 1데살 4:16; 2데살 1:7; 유다 1:14~15).

《성경》에 ‘천사들’에 대한 언급이 이토록 많다는 점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들립니까? 영적 존재인 ‘천사’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의할 점은 《성경》은 ‘천사들’을 소개하려는 책이 아니라는 점입니다(1고린 6:3; 골로 2:18). 오히려 《성경》은 천사들도 보고 싶어 했던 우리 구원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입니다(요한 20:31; 갈라 1:8; 히브 1:4~7; 2:7~9; 1베드 1:12). 우리가 ‘경배’할 분이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언하는 책입니다(요한 20:28; 묵시 22:8~9). 십자가에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신 예수께서 천사들과 세력과 능력의 천신들을 당신에게 복종시키셨다고 증언하는 책입니다(로마 8:38~39; 1고린 15:24~25; 에페 1:20~21; 필립 2:10; 골로 2:15; 히브 2:5,7~9,14; 1베드 3:22; 2:10; 유다 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어떤 권세나 세력보다 더 높으신 분이라 증언하는 책입니다(골로 2:10).

그렇습니다. 《성경》은 천사의 정체성과 직무에 대해 이렇게 명백히 증언합니다.

천사들은 모두 하느님을 섬기는 영적인 존재들로서 결국은 구원의 유산을 받을 사람들을 섬기라고 파견된 일꾼들이 아닙니까? – 히브 1:14

우리는 이 축복의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성경》은 ‘먼지’에 불과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와 ‘은혜’를 증언하는 책임을 기억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을 보살펴 주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들인 우리’를 보살펴 주십니다(히브 2:6,9~16,18). 천사는 결코 인간의 숭배 대상이 아닙니다(골로 2:18; 묵시 22:8~9).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천사는 하느님의 피조물이자, 하느님을 섬기는 영적 존재들”입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실행하는 고마운 ‘메신저들’(심부름꾼, 전령)”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묵시 1:1; 22:6,16). 천사들을 시켜 당신의 몸인 교회와 성도들의 기도를 돌보고 지키게 하십니다(묵시 1:20; 2:1,8,12,18; 3:1,5,7,14; 8:3~4). 천사는 바로 이 ‘직무’에 충실할 때 불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명칭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늘은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들’을 기념하는 ‘주요축일’입니다. 아울러 ‘129주년을 맞는 대한성공회 설립기념일’입니다. 모든 ‘천사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받들어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메신저들’(심부름꾼들, 사자, 전령)입니다. 하느님의 ‘메신저’이기를 거부하고 자기 메시지를 퍼뜨리는 이는 ‘천사’가 아니라 ‘악마’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주신 ‘직무’(소임, 역할)를 충실히 받들고 수행하는 영적 존재가 ‘천사’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명령인 ‘복음 선교’를 위하여 일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천사’입니다. 129년 전 오늘, 하느님의 ‘메신저’로 이 땅에 입 맞춘 ‘천사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천사’처럼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심부름’에 순종하여 기꺼이 이 땅을 위해 ‘한 알의 밀알’로 자신들을 ‘봉헌’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작금의 성공회 선교의 결실이 빈약하다고 비판합니다. 판단은 하느님의 영역이고, 단지 우리는 ‘하느님의 천사’로 오늘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살필 뿐입니다. 하느님의 ‘천사’로 묵묵히 오늘의 소임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할 뿐입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그 선교의 결실이 미미해 보인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께서 ‘성육신’하심으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 땅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오늘도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임마누엘).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 사람이 함께 만나기 때문에 예수님은 ‘참된 성전’이십니다. 하느님은 성전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들과 언제 어디서든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는 차별 없이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으로 연결됩니다.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영원한 교제(천사가 오르내리는)가 구체화됩니다.

분명 예수님이 ‘나타나엘’에게 하신 약속은 참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 나무’를 통해 이루실 ‘구원’ 역사에 대한 암시였습니다. 그 ‘십자가 나무 아래’ 있는 이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된 성전’ 안에 있는 이들이 누리게 될 영광의 암시였습니다. 더욱이 이제는 ‘성령 강림과 내주하심’을 통해 우리 역시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1독서 《창세기》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집’이 되는 ‘존재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하늘이 열려 있는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의 ‘기도’(나의 질문)를 가지고 하느님께 ‘올라가고’, 천사들이 하느님의 ‘대답’(메시지, 한 말씀)을 가지고 ‘내려오는’ 우리가 바로 ‘하늘이 열린 성전’입니다. 이렇게 오르내리는 ‘소통’ 속에서 하느님과 더욱 ‘일치’하여 살아가는 삶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물론 그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성전’이 되도록 ‘성령’을 보내시기 위해 하늘로 오르신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시작과 완성 사이’에 살아가고 있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완성될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이자 이 땅에 살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특사들’(메신저, 전령, 심부름꾼)입니다. 이 땅의 시민이 아니라 ‘하늘의 시민’입니다. 반드시 완성될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소망하며 예수께서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이웃에게 전파할 ‘사명’(소임)을 받은 ‘천사들’입니다.

우리는 고단한 인생들이 ‘십자가 나무 아래’에서 영혼의 쉼을 얻도록 초대해야 할 ‘전령들’입니다.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의 기쁜 소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어야 할 ‘심부름꾼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수행해야 할 ‘하느님의 군대들’입니다. 인생들을 하느님과 소통하는 ‘거룩한 집’으로 삼아 주신 그 크신 은총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할 이 땅의 ‘천사’들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천사’로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129년 전,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입을 맞추고 ‘생명의 호흡’을 전해준 선교사들의 은혜를 보답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들’, 그리고 ‘대한성공회 설립기념일’인 오늘 우리가 되새겨야 할 숭고한 다짐입니다.

그대가 하느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천사’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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