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9.22. 연중25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25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삶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정의와 충직한 삶의 태도를 통해 드러내시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의 주인이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그 분의 ‘청지기’임을 고백하고 세례성사를 받은 이들입니다. 건강, 재물, 지식, 재능, 정신적 능력, 직업, 직분, 가정, 어머니, 아버지로서의 삶과 관계, 생명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관리지침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정직한 청지기답게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자원’을 하느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고 지혜롭게 선용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소망하면서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주 하느님, 주님의 사랑은 감히 다 헤아릴 수 없나이다. 비오니, 우리를 모든 탐욕에서 지켜주시고 오직 주님만을 섬기게 하시어, 주님께서 맡기신 재물을 잘 관리하는 충직한 청지기로 세워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아모 8:4-7
  • 시편 – 113
  • 2독서 – 1디모 2:1-7
  • 복음서 – 루가 16:1-13

연중 25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삶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정의와 충직한 삶의 태도를 통해 드러내시오.’입니다.

1독서는 ‘사회 불의’에 저항한 《아모스》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 중에서 ‘아모스’만큼 ‘사회 정의’(특히 경제적 정의)를 열정적으로 부르짖은 사람도 없습니다. 사회에 만연한 ‘불의’(부패)와 ‘우상숭배’ 때문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경고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아모스’가 멸망을 외치던 시절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는 ‘물질적(경제적) 번영’을 누렸습니다. 문제는 그 ‘물질적(경제적) 번영’이 일부 계층에게로 편중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수탈당했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 남왕국 유다에 살던 ‘아모스’를 북왕국 이스라엘까지 보내어 사회에 만연한 이러한 ‘경제적 불의’와 ‘우상숭배’를 꾸짖으셨지만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정치, 경제, 종교, 어느 것 하나 부패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탐욕에 물든 ‘상인들’의 ‘종교생활과 경제활동의 타락상’을 보여줍니다.

‘율법’은 달(月)을 시작하는 ‘초하루’를 하느님께 드리는 ‘축제’로 지킬 것을 명령합니다(레위 23:24~25; 민수 10:10). 하느님의 언약에서 벗어난 지난달의 죄를 용서받고 새 마음으로 새 달을 시작하자는 의도입니다. 주간의 일곱 번째 날인 안식일을 지키라 명령합니다. 이 날들 만큼은 하던 노동을 멈추고 누구나 쉬어야 합니다. 그런데 상인들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초하루 축제와 안식일을 지키느라 자신들이 원하는 만큼 이익을 얻을 수 없고, 손해를 본다며 투덜거렸습니다. 더욱이 상인들은 속임수와 가격 후려치기로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부당이득을 취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즉 사회적 약자들은 ‘빚’(고리대금) 때문에 종으로 팔려가는 신세까지 되었습니다. 율법은 동족에게 ‘이자놀이’ 하는 것을 금했는데도 그들은 이런 악행을 저질렀습니다(출애 22:22~25; 레위 25:35~37; 신명 23:20~21).

‘아모스’는 그들의 이런 ‘악행들’을 하느님께서 결코 잊지 않으실 것이라 경고합니다. 실제로 북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 제국에게 멸망당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종으로 삼았던 그들도 종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렇게 1독서는 복음이야기의 배경역할을 합니다. 주인에게 불려가 하느님 백성의 자리에서 ‘해고통보’를 받는 부정직한 청지기가 그들이고, 하느님보다 재물을 더 섬긴 우상숭배자들이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사회적 약자를 굽어보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113편>입니다. 유대인들은 <113편>부터 <118편>까지를 ‘과월절 식사 자리’에서 찬미했습니다. <113편>부터 <114편>은 식자 전에, <115편>부터 <118편>은 식후에 과월절 의식의 일부로 찬미했습니다. 복음서의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이 시편들로 최후만찬 때 찬미하셨을 것입니다. 특히 ‘사회 정의’(경제 정의)에 관심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하느님은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를 돌아봐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이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정신입니다. 특히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사무상 2:7~8)와 성모 마리아의 찬가(마니피캇, 루가 1:52~53)에 나타난 사회 질서의 혁명적인 반전이 묘사되고 있습니다(7~8절). 특히 ‘경제적 평등’(분배의 정의)이라는 사회적 격변은 하느님께서 인간사에 절대적 주권을 가지신 분임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2독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고하는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배정했습니다. 연중시기에 낭독하는 2독서는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와의 연결이 느슨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주제를 내세워 세상의 청지기로 세워진 우리의 삶을 강조하는 복음이야기와의 연결이 빛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성찬례 때마다 바치는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의 원형’ 역할을 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기도하는 일이 좋은 일이며 우리 구세주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라고 교훈합니다. 특히 초대교회의 ‘신앙고백문’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 뿐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이 중재자도 한 분뿐이신데 그분이 바로 사람으로 오셨던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 1디도 2:5

교회인 우리는 성찬례로 모일 때마다 자신을 대속물로 바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오늘도 세상과 하느님 앞에 중재자로 섭니다. 이 성찬례에서 생명의 양식을 먹고 마시며 사도 바울로처럼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자로 세상에 파송됩니다. 믿음과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거룩한 일꾼으로 파송됩니다.

복음이야기는 ‘약삭빠른 청지기의 비유’를 전하는 《루가복음》에서 배정했습니다. 이 비유의 청중은 일차적으로 ‘제자들’이지만,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도 새겨야 할 가르침입니다. 나아가 우리도 그 청중에 속한다는 것을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설교자들 사이에서는 다소 어려운 본문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왜 그런지는 본문에서 설명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어떤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예나 지금이나 넓은 ‘땅’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 부자도 갈릴래아에 넓은 땅을 소유한 ‘대지주’였습니다. 그는 갈릴래아까지 다니며 일일이 관리할 수 없었기에 현지에 ‘청지기’(관리인)를 한 사람 고용했습니다. 자기 대신 소유지를 관리하면서 ‘소작료’를 거두어들이는 일이 청지기의 임무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부자’는 ‘부재지주’(不在地主)이고, ‘청지기’는 그의 재산을 위탁받아 관리하는 ‘전문경영인’입니다.

어느 날 그는 혼인 잔치에 갔다가 갈릴래아에서 온 친척으로부터 이상한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소작인들’ 사이에서 자신에 대한 ‘원성’(怨聲)이 자자하니 한 번 내려오라고 조언했습니다. 어째서 그런 소문이 퍼졌는지 물었더니 자신이 고용한 ‘청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청지기가 지나치게 높은 ‘소작료’를 책정해 농부들을 ‘착취’한다고 전해주었습니다. 심지어 동족 간에 금지한 ‘비싼 이자놀이’까지 하면서(출애 22:22~25; 레위 25:35~37; 신명 23:20~21) 재산이 자기 것이라도 되는 냥 마구 뿌리고 다닌다고 전해주었습니다. 더욱이 그런 청지기를 둔 ‘주인’은 얼마나 ‘악독한 사람’이겠느냐는 소문이 마을에 돈다고 전해주었습니다.

큰 일 났습니다. 친척의 말이 사실이라면 ‘청지기’가 오랫동안 자신을 속여 온 셈입니다. 허락된 ‘청지기 직분’을 부정직하게 사용해 자신에게 ‘손해’를 끼쳐 온 셈입니다. 이런 ‘부정’과 ‘불의’를 알고도 가만 두었다가는 자신의 ‘평판’(명예)이 더 나빠지게 생겼습니다. 그는 이 부정직하고 불충한 청지기를 소환합니다.

자네, 소문을 들었는데 그게 무슨 짓인가? 이제는 자네를 내 청지기로 둘 수 없으니 자네가 맡은 일을 다 청산하게. – 루가 16:2

부자는 청지기의 말은 들어볼 생각도 않고 다짜고짜 ‘해고통보’를 합니다. ‘청지기’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노동법’에 걸릴 사인일 수도 있습니다. 청지기가 항변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간의 행적이 다 들통 났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청산하라’는 말은 자신이 지금까지 관리 해 온 일에 대해 ‘책임 있게 설명하고 끝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경리 장부를 계산해서 넘기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대지주의 ‘해고통보’가 어떻게 다가옵니까? 성경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가 항상 명심할 일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한 말씀’이 되도록 겸손히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을 ‘청지기’라는 관점에서 성찰하도록 초대합니다. 이 세상과 우리 생명의 진정한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하느님이 선하게 창조하신 이 세상을 잘 돌보도록 세워진 ‘관리자’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생명을 창조주의 영광을 위하여 잘 피워내야 할 ‘거룩한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이것을 망각하고서 자신이 세상과 자기 생명의 주인인 것처럼 살아간다면 그것은 ‘횡령’입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파멸’(해고) 뿐입니다. 세상과 관계들로부터 하느님을 배제하고 자신을 중심에 둔다면 그것은 ‘낭비’입니다. 그 종국은 ‘불행’(영원한 죽음) 뿐입니다.

주인이 그 부정직한 청지기에게 요청한 것처럼, 언젠가 우리도 자신이 살아온 ‘인생성적표’를 들고서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건강, 재물, 지식, 재능, 정신적 능력, 직업, 직분, 가정, 어머니, 아버지로서의 삶과 관계, 생명을 어떻게 경영했는지 책임 있게 설명해야 할 날이 옵니다. 인간의 청지기 직무 중 어느 것도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언젠가 주인이신 하느님과 ‘장부’를 펼치고 계산해야 할 날이 올 것입니다.

주인으로부터 ‘해고통보’를 들은 청지기는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이 이런 처지라면 이제부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인의 재산을 돈으로 바꾸어 야반도주를 할까요? 그는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이 내 청지기 직분을 빼앗으려 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구나…. – 루가 16:3

그는 자신의 ‘청지기 직’에 대해 ‘책임’을 묻는 주인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육체노동은 몸이 감당을 못하고, 빌어먹는 일은 정신이 감당 못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청지기 직’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상황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는 정말 ‘절박한 처지’에 내몰렸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이 맡기신 ‘삶’과 ‘관계들’을 어떻게 경영했는지 책임 있게 설명해야 할 ‘그 해고의 날’이 올 수도 있다는 진실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삶’과 ‘관계’를 잘 경영해 오신 분들은 그 날이 오는 것이 기쁘겠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두려움이 앞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그 절박한 처지의 청지기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통해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가 청지기 자리에서 물러날 때 나를 자기 집에 맞아줄 사람들을 미리 만들어놓아야겠다. – 루가 16:4

그 부정직한 청지기는 정말 ‘기발한 생각’을 해냈습니다. 주인의 재산을 돈으로 바꾸어 야반도주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자원’, 즉 ‘청지기’라는 그 ‘직위’를 활용합니다. 자신의 ‘현재’를 사용해 ‘미래’를 위한 대책을 세웁니다. 이 점은 청지기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분명 교훈이 됩니다. 하느님의 영원하신 부르심을 받고 그 앞에 서기 전,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활용할 자원은 무엇이 있는지 고요히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실직’했을 때를 대비해 ‘영접’해 줄 ‘사람들’, 즉 ‘친구’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실행합니다. 물론 ‘환심’을 사려는 의도였지만 그는 ‘돈’이 아니라 ‘관계’를 택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인의 채무자들을 불러들여 ‘밀린 빚’을 줄이는 ‘장부조작’, 즉 ‘문서위조’를 합니다. 완전범죄를 노리고 ‘기름’과 ‘밀’을 빌려간 ‘채무자들’로 하여금 직접 문서에 ‘친필 서명’까지 하게 합니다. 그는 또 다시 주인을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채무자들과 끈끈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이득을 위해 공범이 되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장부조작’은 주인에게 손해가 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서는 동족 간의 ‘이자놀이’를 금했기 때문입니다(출애 22:22~25; 레위 25:35~37; 신명 23:20~21). 이 청지기는 그동안 ‘비싼 이자놀이’를 해 왔습니다. 그 일로 주인에게까지 원성이 들어갔고, 해고까지 당한 셈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그 ‘비싼 이자’를 삭감해 줍니다. 그가 삭감해 준 ‘기름 50말’과 ‘밀 20섬’은 각각 ‘5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큰 액수입니다. 1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니 거의 500일 동안 쉬지 않고 일해 모아야 하는 돈입니다. 결국 주인과 채무자 둘 다에게 손해가 가지 않는 ‘기발한 착상’을 한 셈입니다. 더욱이 주인은 더 이상 ‘악독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일도 없어졌습니다. 오히려 ‘빚이 삭감’되었기에 소작인들로부터 ‘자비로운 주인’이라는 ‘명예’를 되찾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던 ‘제자들’은 그 청지기의 ‘약삭빠른 처신’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이야기는 어떻게 끝이 납니까? 이야기를 듣던 제자들은 ‘주인’이 화를 내며 ‘사기행각’을 벌인 그 부정직한 청지기를 고발하여 옥에 처넣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갑니다. 갈릴래아로 내려온 주인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그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 루가 16:8a

‘약삭빠르게’(민첩하게)로 해석한 그리스어 ‘프로니모스’는 ‘슬기롭게’, ‘현명하게’라는 뜻도 있습니다. 분명 ‘주인’은 그 부정직한 청지기가 벌인 ‘사기행각’을 ‘승인’해 준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한 것만은 ‘영리하다’고 ‘인정’했습니다. 다시 말해 주인마저도 ‘혀’를 내둘렀습니다. 앞날을 위한 일처리의 신속함, 수단의 능숙함, 방법의 대담함은 정말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분명 사건의 ‘전말’(顚末)을 주인이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입니다.

여러분이 듣기에는 어떻습니까? 비유의 결말로 제시된 ‘주인의 칭찬’이 자연스럽습니까? 부자연스럽습니까? 아무리 주인의 ‘명예’가 회복되었기로서니 현실에 과연 이런 ‘주인’이 있을까요? ‘문서조작’까지 해가며 자신을 속이려 든 청지기를 ‘칭찬할 주인’ 말입니다. 아마도 현실에 그런 주인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부정직한 청지기를 칭찬하는 ‘주인’은 누구일까요?

사실 주인의 ‘칭찬’으로 끝나는 ‘8절a’와 이어지는 ‘9절’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신약성서학자들’도 바로 이 구절들 때문에 가장 어려운 비유 중 하나라고 꼽습니다. 특히 이어지는 ‘9절’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신약성서학자들’은 그 부정직한 청지기를 ‘칭찬한 주인’을 ‘부자’가 아니라 비유를 말씀하고 계시는 ‘예수님’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합니다(대표적으로는 불트만, 예레미야스, 김창락 등입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일반비유가 아니라 ‘종말 위기’에 처한 제자들을 교훈하시기 위한 의도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특례비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해고통보’를 받고도 철면피처럼 또 사기행각을 벌인 청지기를 칭찬할 주인은 현실에 없습니다. 물론 그런 비양심적인 사기꾼을 칭찬하는 ‘주인’을 ‘예수님’으로 보는 해석도 이상하긴 합니다. 그렇지만 ‘해고’를 앞둔 그 부정직한 청지기의 ‘신속한 위기 대책을 모범’으로 내세워 ‘종말 위기’를 앞 둔 제자들을 교훈하기 위한 한 줄 논평이라면 ‘주인’을 ‘예수님’으로 보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한 일처리의 신속함, 수단의 능숙함, 방법의 대담함 말입니다. 실제로 비유의 ‘핵심’도 거기에 있습니다. 청지기의 비양심적인 태도보다 자신의 미래를 위한 그의 ‘약삭빠르고 뻔뻔한 처신’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점만은 ‘종말 위기’를 앞두고 있는 ‘제자들(우리)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이 주장대로라면 본래의 비유는 문서조작과 친필 서명으로 끝나는 곳까지입니다(7절).

이어서 예수님은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 – 루가 16:8b

주석가들은 이 구절이 예수님의 비유가 구전되는 중에 덧붙여진 문구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비유의 첫 번째 결론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록된 한 말씀’을 통해 영적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즉 자신들이 가진 것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는 ‘빛의 자녀들’ 보다 더 ‘약다’고 하십니다. ‘약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이 약삭빠른 청지기처럼, 앞날을 내다보는 상황 판단력도 신속하고, 현명하다는 뜻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 이익과 재미’를 위해서라면 너무나 대담하고, 뻔뻔하며 능숙하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평가는 오늘날도 진실입니다. 믿음을 갖지 못한 비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이익과 쾌락’을 위해서라면 정말 ‘신속하고 능숙하며 대담하고 열정적’입니다.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처럼 자신이 처한 ‘현재의 상황을 영리하게 내다보고’ 있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의 회개’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그들처럼 ‘신속하게 행하고’, ‘담대한 열정’을 보인다면 우리 자신의 삶, 관계, 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그들처럼 교회가 분명하게 자신이 처한 ‘현재의 상황을 영리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어떻게 활동하고 있을까요?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서 교회가 그들처럼 ‘신속하게 행하고’, ‘담대한 열정’을 보인다면 이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무어라 부를까요? 아마도 이 세상은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 하느님 나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 나오고 하늘에선 정의가 굽어보는 신천신지”가 되었을 것입니다(시편 85:10~13).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은 본받지 않아도 될 것을 너무나 많이 본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었는데, 오늘날은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점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올바르게 살지 못하는 성직자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습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이익과 쾌락’을 위해 부정직한 청지기처럼 약삭빠르게 처신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는 그런 일에 미련해야 합니다. 오히려 ‘영생’을 소유한 빛의 자녀들로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하느님 나라,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개울같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 일에 보다 ‘슬기롭게’(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아모 5:24). 그렇게 해서 세상의 ‘희망’으로 일어나 다시 ‘빛’을 발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크게 셋으로 나누어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첫째, 제자들은 자신의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9절). 다시 말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둘째, 책임 맡은 사람은 맡은 일에 항상 충실해야 합니다(10~12절). 다시 말해 작은 일에 충실한 제자는 큰일에도 충실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셋째, 어느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13절).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제자는 재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아니라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따르는 자여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제자들은 자신의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9절). 다시 말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잘 들어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 루가 16:9b

주석가들은 이 구절이 예수님보다는 ‘루가’가 덧붙인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자들이 가진 ‘재물의 위험성’을 자주 경고하셨고(루가 12:13~21,33~34; 14:12~14,16~24; 16:19~31), 또 제자도로서 ‘재물 포기’를 요구하곤 하셨기 때문입니다(루가 14:33; 18:22~25).하지만 이 구절은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과 어긋나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이 구절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어긋나 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루가’는 분명 ‘세속의 재물’(불의한 맘몬)이 가진 ‘마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재물’(돈) 그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고 단지 교환수단일 뿐입니다. 하지만 ‘돈’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그때부터 길을 잃게 되고, 고통의 올무에 걸리게 됩니다(1디모 6:10). ‘돈’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재물’이 될 수도 있고, 하느님을 대적하는 ‘불의한 재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루가 16:13).

‘루가’는 재물이 가진 그 마력을 이기는 ‘힘’을 예수님의 정신에 맞추어 지금 제시합니다. 그 힘은 무엇입니까? ‘자선’입니다. 실제로 ‘루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자선’을 권장합니다(루가 11:41; 12:21,33a;18:22). 따라서 ‘루가’는 예수님의 비유처럼 우리가 가진 ‘현재의 자원’, 본문의 가르침대로 하자면 ‘재물’을 사용하여 ‘영원’(하느님 나라에서의 자리)을 계획할 필요가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재물’을 가지고 ‘영원’이라는 개인의 종생 이후에도 관심을 기울이도록 초대합니다(루가 12:16~21; 16:19~31; 23:41~43).

유다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사람이 죽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추천서’가 필요합니다. 그 ‘추천서’는 지상에서부터 갖고 갈 수 없습니다. 그 ‘추천서’는 우리 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져 있습니다. 그 ‘추천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가난한 이들’을 향해 행한 ‘자선’입니다. 우리가 이 지상 생애를 끝내고 ‘하늘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우리 보다 앞서 ‘하늘나라’에 들어간 ‘가난한 이들’이 우리를 ‘위하여’ 천사 앞에서 증언합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만한 ‘자격’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상에서는 우리가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하늘 문’ 앞에서는 우리가 그들에게 도움을 받는 셈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추천서’인 그들이 우리가 하늘 문을 통과해 들어오도록 손을 내민다는 전승입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따르면 ‘해고통보’를 받은 그 부정직한 청지기는 아직 자신에게 있는 ‘현재의 자원’을 가지고 자기를 맞아 줄 ‘사람들’(친구들)에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은 빚진 소작농들이었으니 분명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재물이 없어질 때, 즉 종말의 때 우리를 ‘영원한 집’으로 맞아 줄 진정한 ‘친구’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진실로 이것을 믿는다면, 청지기처럼 지금 자신이 가진 ‘현재의 자원’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자신의 ‘재물’을 ‘자기 이익과 쾌락’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삼지 말고 ‘영원한 집’, 즉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한 ‘수단’으로 ‘지혜롭게 사용’하십시오. 지금 자신이 가진 ‘현재의 자원’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지금 자신이 가진 ‘현재의 자원’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관심을 가지셨던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행한 우리의 ‘자선’이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일”이라 약속하셨습니다(마태 6:20; 19:21 루가 12:33). 그렇게 살아간 우리를 예수님은 영접하여 주실 것이고, 우리를 아신다 하시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오도록 손을 내미실 것입니다(마태 25:34~40).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재정을, 자원을 어디다 어떻게 투자하고 관리해야 할지 조언하는 전문가들로 넘쳐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재정을, 자원을 슬기롭게 사용하는 법을 전문가들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가장 지혜로운 재정(자원) 투자는 ‘영원한 집’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더욱이 그 ‘투자 시기’는 다음이나 나중에가 아니라 ‘항상 지금’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자신이 언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너무 늦기 전에, 아직 기회가 있을 때, ‘회개’하며(투자하며) 자신의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다음으로, 나중에로 미루다 결국 ‘하늘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늘나라에서 천사들에게 제시될 추천서들이 많으십니까?

둘째, 책임 맡은 사람은 맡은 일에 항상 충실해야 합니다(10~12절). 다시 말해 작은 일에 충실한 제자는 큰일에도 충실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충실하며 지극히 작은 일에 부정직한 사람은 큰일에도 부정직할 것이다. 만일 너희가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 데도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의 몫을 내어주겠느냐? – 루가 16:10~12

너무나 당연한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의 ‘소유’라고 할 만한 것은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아직도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이 세상도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단지 우리는 하느님의 청지기로서 맡겨주신 건강, 재물, 지식, 재능, 정신적 능력, 직업, 직분, 가정, 어머니, 아버지로서의 삶과 관계, 생명을 임시적으로 관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부정직한 청지기처럼 ‘자기 이익과 쾌락’을 위해 이 은총의 선물들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돈’(세속의 재물)을 ‘지극히 작은 것’으로 간주하셨습니다. 여러분도 동의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돈’을 ‘가장 큰 것’으로 ‘착각’하고 삽니다. 속으면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더 이상 속아 넘어 가기 않도록 그리스도인은 빛을 발하여야 합니다. 돈은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눔의 삶을 통해 정말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한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 일에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충실할 수 없다면(부정직하다면)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참된 재물’인 ‘영원한 생명’을 우리의 ‘몫’으로 내어주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이 ‘참된 재물’인 ‘영원한 생명’을 ‘몫’으로 받지 못한 이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직 그리스도의 양 무리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이들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큰 일’, 즉 하느님께서 ‘중요시 여기는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영혼을 돌보는 또 한 사람의 작은 목자들로 이 세상에서 부르심 받았습니다. 이렇게 둘째 가르침은 ‘사목직’으로 확장됩니다. 특히 저 같은 직무 사제들은 이 둘째 가르침 앞에서 스스로를 깊이 돌이켜 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영적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광야 같은 세상에서 울부짖고 있는지 모릅니다. 목자를 잃어버리고 푸른 초장과 맑은 시내를 찾아, 영적 돌봄을 찾아 방황하는지 모릅니다. 사제들은 신자들의 영혼을 돌보라고 이 시대에 세워진 ‘목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영혼의 청지기’입니다. 저 같은 사제들이 영혼을 돌보는 그 거룩한 사목을 잘 감당하도록 여러분의 기도에 저를 의탁합니다.

또한 사목직은 사제만이 아니라 신자 여러분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분명 그리스도께 선택된 “왕의 사제들”입니다(1베드 2:9). 하느님의 영광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전하여 영적 돌봄이 필요한 이들을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야 할 “왕의 사제들”입니다. 여러분이 ‘지극히 작은 것’을 선용하여 이 거룩한 책무를 자리마다에서 충실히 수행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한 영혼의 사목자’로 살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참된 재물’인 ‘영원한 생명’을 ‘몫’으로 받은 주인공들입니다.

셋째, 어느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13절).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제자는 재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아니라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따르는 자여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는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마련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 루가 16:1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정말 명백히 하고 싶으셨습니다. ‘종’은 한 명의 ‘주인’에게 절대적인 헌신과 충성을 바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하느님과 재물 둘 다를 섬길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아니다’라고 속으로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오늘 1독서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재물’이라는 자기 이득을 위해 주일성찬례 지키기를 소홀히 한다면 벌써 그는 ‘재물’을 하느님으로 섬기고 있는 중입니다. “가난은 임금님도 구할 수 없다”며 가난한 이들의 삶이 개선되는 데 ‘세금’이 쓰이는 것을 반대하거나 ‘분배적 정의’를 반대한다면, 벌써 그는 ‘재물’을 하느님으로 섬기고 있는 중입니다. ‘돈’(재물, 이득, 쾌락, 명예, 권력)을 위해서는 기꺼이 ‘신앙’을 희생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돈’을 희생하지 못한다면 이미 그는 ‘돈’을 하느님으로 섬기고 있는 중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의 이 세 번째 가르침을 듣고 자신은 ‘부자’가 아니기 때문에 결코 ‘재물(돈)의 노예’가 아니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꼭 부자만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탐욕’이 가득 차 있다면, 남의 축복을 시기하고 부러워한다면, 이미 그는 ‘재물의 노예’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억해 두십시오. 우리가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길 때 ‘재물’은 ‘유익’하게 사용됩니다. 반면에 ‘재물’을 섬길 때 올바른 삶을 위한 하느님의 요구는 우리 속에서 무시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저주는 ‘재물의 노예’가 된 삶입니다. 왜냐하면 재물이 사람의 마음을 차지해 버리는 순간 영혼의 숭고함은 구석으로 처박히거나 마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시면 영혼은 옥에서 풀려나와 숭고함을 노래합니다. 그런 이가 소유한 재물은 하느님 사랑을 나누는 천사의 날개가 됩니다. 강조하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재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아니라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따르는 영적 순례자들입니다. 주님은 재물을 단지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으로 다루셨습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의 주인이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그 분의 ‘청지기’임을 고백한 이들입니다. 건강, 재물, 지식, 재능, 정신적 능력, 직업, 직분, 가정, 어머니, 아버지로서의 삶과 관계, 생명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관리지침을 따라야 합니다. 물론, 그 지침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고백이 어긋난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을 잊고 자기 마음대로 잘못 쓰고 살 때가 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아직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 살아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부정직한 청지기의 손에 아직 회계장부가 있었듯이, 우리의 인생도 아직 ‘현재의 자원’을 이용할 기회들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진 건강, 재물, 지식, 재능, 정신적 능력, 직업, 직분, 가정, 어머니, 아버지로서의 삶과 관계, 생명을 하느님의 관리지침을 따라 선용할 기회들이 주어져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배우는 이유도, 기도생활을 실천하는 이유도 여기로 다 수렴됩니다. 오늘 성찬례에 참석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자신이 청지기로 부름 받았음을 온전히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깨달음을 통해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자원’을 하느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고 지혜롭게 선용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인이신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정의와 자선을 실천하는 착하고 충성된 청지기, 빛의 자녀로 칭송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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